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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Jan 02. 2021

아무것도 아닌 이들의 파라다이스

아룬다티 로이, <지복의 성자>

                                                            


                                                                                                   

기분이 축축 처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때는 책도 별 재미가 없다. 습관처럼 읽고는 있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무리 감동 어린 이야기가 책 속에 펼쳐져도, 그건 그저 책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 나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만 같다. 기분이 처지는 날에는 인생 자체에 회의가 밀려온다. 어차피 이렇게 천천히 늙어가며  죽어서 무덤으로 갈 인생,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삶의 의미를 모르겠는 그런 나날을 보내던 중 <지복의  성자>를 읽는다.

아룬다티 로이, 그 이름만 보고 이 책을 사두었다. 그이의 신간 소식, 그것도 소설이라니, 반가운 마음이 컸다. 사두고 몇 주 그냥 두었던 책을 손에 들고  몇 장 읽어 나가는데, 온갖 고민이 머릿속에서 말끔히 잊힌다.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아 요즘은 책도 재미없네’했던 생각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마음을 다잡고 이 작품을 읽게 된다. 그저 이렇게  재미있다고만 느끼며 흘려보낼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고, 그 어느 순간 아, 정말 아름답다, 말할 수 없이…….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발견한다.

첫 장부터 의미심장하다. <지복의 성자>를 다 읽은 이라면 대부분은 처음 두세 쪽이 얼마나 잘 쓰였는지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녀는 묘지에서  나무처럼 살았다. 사람들이 그녀를 서커스 없는 광대, 궁전 없는 여왕이라고 헐뜯을 때에도 그 상처가 그녀의 가지들 사이로  산들바람처럼 불어 가게 했고, 살랑거리는 잎사귀들의 음악을 고통을 달래주는 진통제로 삼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곧 그녀의 이름으로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영어를 아는 한 남자가 그녀 이름을 거꾸로 하면 ‘마즈누Majnu’가 된다고  말해준다. 그러면서 영어에도 라일라와 마즈누 이야기가 있는데 거기서 마즈누는 로미오, 라일라는 줄리엣이라고 그녀에게 알려준다. 
 
다음에  만났을 때 영어를 아는 남자는 자신이 착각했다고 말한다. 그녀 이름을 거꾸로 쓰면 ‘무즈나Mujna’가 되고 그건 아무 뜻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상관없다고 말한다. “난 다 되니까요. 난 로미와 줄리이고, 라일라와 마즈누죠. 그리고 무즈나도 돼요. 안  될 게 뭐예요? 내 이름이 안줌이라고 누가 그래요? 난 안줌이 아니라 안주만(모임 집합이라는 뜻)이에요. 난 메필(음악과 춤이  있는 소규모 연회)에요. 모든 사람과 아무도 아닌 사람,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의 모임.”(13~14쪽)이라고 말한다.

그녀 이름에 얽힌 이 알쏭달쏭한 이야기는 <지복의 성자>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단 몇 문장에 압축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뒤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감탄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 이름에 얽힌 말들이 그냥 흘릴 수  없으리라는 걸 예감했다고나 해야 할까. 묘지에서 나무처럼 살아가며 궁전 없는 왕비, 서커스 없는 광대이며, 로미오가 될 수도  있고 줄리엣이 될 수도 있는 사람, 살랑거리는 잎사귀들의 속삭임으로 자신의 상처를 바람에 씻겨낸 사람, 그녀의 이름은  ‘안줌’이다. 그녀의 말처럼 모든 사람이자 아무도 아닌 사람. 그녀는 자신을 왜 이렇게 이야기할까?

의문은  곧 풀린다. 안줌은 이른바 ‘히즈라’이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동시에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한 제3의 성.  힌두어로 그런 이들을 ‘히즈라’라 부른다. 안줌은 인도의 올드델리에서 칭기즈칸의 후손임을 자랑으로 여기는 무슬림의 넷째 아이로 태어난다. 아들의 탄생 소식을 접한 안줌의 부모는 더할 수 없이 행복감에 젖는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안줌의 엄마는 아들의  남성 성기 아래 여성 성기가 있음을 발견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아들’을 갖고 싶었던 안줌의 아버지는 아들의 여성적인 성향 따위는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으며 아들 안줌, 그러니까 그녀의 어린 시절 이름인 ‘아프타브’를 아들로 키우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아프타브는 아버지가 칭기즈칸처럼 용사였던 선조들이 전장에서 보인 용맹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아무런 감흥이 없다. 오히려 칭기즈칸이 아름다운  아내 보르테 카툰과 결혼하게 된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자신이 칭기즈칸 같은 용사보다는 보르테 카툰이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데다가 우연히 시장에서 여장을 한 히즈라를 보고 그녀에게 매료된다. 그리고 마침내 열다섯 살에 아프타브는 그의  가족이 수세기 동안 살아온 터전에서 겨우 몇 백 야드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히즈라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인  ‘꿈의 집’이라는 의미의 콰브가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안줌은 남성 성기를 제거하고 호르몬제를 복용하면서 자신이 꿈꾸던 ‘여성성’을 마음껏 발휘하며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몇 년이 흘러 안줌은 델리에서 가장 유명한 히즈라가 된다. 영화제작자들이 서로 그녀를 차지하려고 했고, NGO단체들도 그녀를 독점하려 한다.

얼핏 보기에, 비록 ‘땜질된 몸’이지만 자신과 비슷한 이들과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안줌은 부러울 게 없을 것 같다. 그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면 나름 행복한 인생일 것 같다. 그러나 삶이 늘 그렇듯이 뜻대로만 풀리지 않는다. 콰브가에서 삼십년 넘게 살던 그녀가 마흔 여섯이라는 나이에 문득 그곳을 떠나고 싶다고 한다. 두니야(세상)로 돌아가서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 ‘엄마’가 되고 싶다고……. 어쩌면 안줌은 운이 좋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되고 싶다는 그녀 앞에 우연히 한 아이가  나타난다. 사원 계단에서 울고 있는 세 살쯤 된 아이 ‘자이나브’를 발견하고 안줌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아이의 엄마가 된다. 자이나브는 안줌의 유일한 사랑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엄마가 되고 싶다던 소망도 이뤄졌는데, 안줌은 왜 무덤가에서 나무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남성의 몸 안에 갇힌 여성으로 태어난 안줌, 그리고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재탄생, 그녀가 꿈꾸던 엄마로서의 삶의 시작 등등은 이 작품의 초반에 해당한다. 앞으로 안줌이 만나게 될 다양한 사람들과 그녀와 얽히는 ‘틸로’라는 또 다른 여성의 이야기까지 교차하면 <지복의 성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얽히고설키며 살아가는 인도 사회의 축소판으로, 그들의 삶을 통해 그 세계가 지닌 온갖 모순과 고통, 처참한 현실을 더없이 세밀하게 그려나간다.

책을  읽는 동안 인도와 파키스탄, 구라자트 학살, 카슈미르 분쟁 등을 검색해봤다. 이 책을 읽는 많은 이들이 그랬을 것이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카스트제도, 빈부격차 등등 얼핏 알고만 있던 인도의 복잡한 현실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남성의 몸  안에 갇힌 여성 안줌의 처지는 어떻게 보면 그 몸 자체로 인도의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힌두교 안의 이슬람, 인도 안의 이슬람교도, 또는 카슈미르인. 그 모든 것들이 그 한 몸에서 날마다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은 과연 끝이 날 수 없는  것일까? 신이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 보기 위해 히즈라를 만들었다는 말처럼 히즈라와 같은 인도는 정녕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일까?


“신이 왜 히즈라를 만들었는지 알아?”
“일종의 실험이었어. 신은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한 거야. 그래서 우리를 만들었지.”
“여기서  누가 행복한데? 전부 가짜고 속임수야. 너 같은 정상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뭐지? 너 말고 너 같은 어른들을 말하는 거야.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뭐지? 물가 상승, 자녀 입시, 남편의 폭력, 아내의 부정행위, 힌두-이슬람 폭동, 인도-파키스탄  전쟁……. 결국엔 해결이 되는 외적인 문제들이지. 하지만 우리에겐 물가 상승, 입시, 때리는 남편 부정한 아내가 전부 우리 내부에  있어. 폭동도 우리 내부에 있지.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고. 인도-파키스탄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어. 그리고 그것들은 절대로  해결이 안 돼.”(39쪽)


구라자트  학살을 몸소 겪고, 그 충격으로 콰브가를 떠나 공동묘지에서 폐인처럼 살던 안줌, 나무처럼 살아가던 그녀의 변화에서 그 해답이  있을지 모른다. 안줌은 슬픔에서 벗어나 무덤들 사이에 방을 꾸며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만든다. 파라다이스라는 의미의  ‘잔나트’. 죽은 이들이 사는 공간인 묘지가 삶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곳은 안줌만이 아니라 모든 소외되고 버림받은 존재들을  위한 보금자리가 된다. ‘추락하는 사람들의 집’이다. 게다가 매춘부라는 이유로 장례식장에서 받아주지 않는 여자의 시신을 목욕시켜  장례를 치러주면서 이곳은 게스트하우스 겸 장례식장도 된다. 산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까지 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진정한 파라다이스. 안줌의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지켜보노라면 이곳이 무덤인지, 저곳- 그러니까 여전히 폭력이 난무하고 계급과 그에 따른 차별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저 인도의 ‘두니야’가 무덤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 ‘두니야’에 비하면 ‘만신창이가  된 묘지의 천사들이 만신창이가 된 피수호자들을 보살피며, 두 세계 사이의 문을 열어두어 이승의 영혼들과 이승을 떠난 영혼들이  같은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처럼 어울릴 수 있게’ 해준 이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는 진정으로 축복받은 천국 같은 공간이 아닐까. 그래서  이곳에서는 ‘왠지 모든 게 조금은 더 견디기 쉬워’진다’(522쪽)

한때 안줌의 엄마가 어린 아들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의지했던 신, 그리고 이제는 안줌이 섬기는 지복의 신 ‘하즈라트  사르마드’는 페르시아 출신의 성인(聖人)이다. 그는 일생의 사랑을 찾아 인도 델리로 온 뒤 유대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였고, 힌두교인 소년과 사랑에 빠졌다. 자신의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 소년을 향한 사랑의 시를 읊는다.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성인이며,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자들, 신자들 속의 신성모독자. 신성모독자들 속 신자의 위안’인 그. 그 신의 모습에서 어느덧 안줌의  모습이 떠오른다.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서 그 모든 ‘정상’을 벗어난 이들을 산 자와 죽은 자, 가리지 않고 온 마음으로 껴안는  안줌. 그녀가 바로 21세기 지복의 신 ‘사르마드’가 아닐까. 하나의 종교, 하나의 성별만을 고집하는 경직된 인도에 이 안줌 같은 존재야 말로 답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고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는  안줌의 포용성 안에 인도의 또 하나의 상처라고도 할 수 있는 ‘우다야’같은 아기도 새로운 해가 떠오르듯이 자라날 수 있지  않을까. <지복의 성자>는 내게 ‘잔나트 게스트하우스’같은 존재가 되었다. 삶에 조금 지쳤을 때 안줌 같은 사람이 진심으로 나를 껴안아주고 괜찮다고 토닥여준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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