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잠자냥 Nov 27. 2020

다양성은 늘고 외로움의 총합은 줄어드는 세계를 꿈꾸며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그리는 세계는 분명히 지금 내가 사는 세상과는 동떨어진, 몇 백 년 뒤에나 존재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세계이다. 그곳에서는 이제 인류가 꿈꿔온 우주 탐사도 가능해졌고, 원하는 대로 유전자를 조작해 완벽한 인간을 만들 수도 있으며, 행성에서 행성 간 이동도 자유롭다. 그런 데다가 저 먼 우주에 지구인과 다른 생명체가 존재할까 하는 인류의 질문도 응답을 받아, 외계 생명체를 만나는 지구인도 있으며, 그들과 정신적으로 교류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죽은 사람들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한 ‘마인드’를 수집하는 도서관에서 사랑하는, 그러나 이제는 세상을 떠난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모두가 정말 꿈만 같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코 아주 먼 미래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 아닌, 지금 내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일상이 펼쳐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기술은 매우 진보했는데,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다.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그려지는 세계는 행성 간 이동이 가능한, 틀림없이 아주 먼 미래이다. 그런 시대에 슬렌포니아라는 제3행성에 가기 위해 ‘안나’라는 한 노인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 그래서 철거를 앞둔 어느 우주정류장에서 혼자 우주선을 기다린다. 한때 과학자였던 이 노인은 어쩌다 오지 않는 우주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일까? 남편과 아이를 먼저 보낸 그 행성으로 그녀 또한 곧 따라갈 계획이었지만, 아주 잠깐의 차이로 함께 떠나지 못한다. 그 사이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로 개척 행성에서 ‘먼 우주’로 급격하게 밀려난 행성들은 수십 개가 넘게 되고, 그 수십 개의 행성에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들을 보내기에는 ‘경제성이 너무나 떨어’지기에 안나는 가족과 영영 생이별을 하게 된다.

이렇게 그녀처럼 소중한 사람들과 떨어져 지구에 남겨진 사람들은 제법 되지만 우주 연방은 그들을 외면한다. 경제성이 떨어지는 일이므로 당연한 조치이다. 제아무리 행성 간 이동이 가능해졌어도 인간은 여전히 빛의 속도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우주를 정복하기라도 한 것처럼’ 군다. 그러면서도 경제성에 떠밀려 사랑하는 이들과의 생이별을 고통스럽게 감내해야만 한다. 안나는 말한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181~182쪽)하고. 이 작품은 오직 경제적 이윤만을 으뜸으로 여기면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은 갈수록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이 세계를 거울처럼 보여준다.

<관내분실>에서는 더 이상 죽은 사람을 매장하거나, 화장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한 ‘마인드’를 수집하는 도서관에서 마인드 접속기를 통해 죽은 사람과 재회할 수 있다. 그런 미래에서 그리는 세계 또한 지금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민은 어느 날 엄마의 데이터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접속할 수 없지만 엄마의 마인드 자체는 데이터베이스 어딘가에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사망과 실종이 다른 것처럼, 이미 세상을 떠난 엄마이지만 도서관 어디에서 실종된 상태이다. 엄마의 마인드를 찾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지민은 엄마의 상상하지 못한 과거를 만나게 된다.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따뜻한 적이 없었던 엄마, 늘 우울한 모습으로 자식에게 상처만 준 그 엄마도 한때는 일하고 자기만의 꿈을 꾸던 여자였다. 결혼과 임신, 출산과 함께 일을 놓아버리고 결국 집안에만 갇혀버리는 지민 엄마의 모습은 지금 이곳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인류 최초의 터널 우주비행사로 선발된 왜소한 체격의 동양인 여성, 임신과 출산을 겪은 비혼의 중년 여성 최재경의 삶을 다룬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더 현실과 중첩된다. 신체 조건에서 월등한 백인 남성들을 제치고 나이도 많고 체격도 볼품없는 동양인 여성이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 최재경의 자격에 의문을 품고 비난을 퍼붓는다. 그녀의 능력과 노력은 깡그리 무시당한 채 오직 그녀가 선발된 이유를 ‘인종과 성별 쿼터제’ 덕분으로 몰아가는 행태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재경의 마지막 선택을 두고 언론 및 대중들이 비난하는 행태는 또 어떤가. 이 작품에서 묘사하는 세계는 우주 탐사가 가능해진 그 먼 미래에도 인간의 성찰이나 깨달음, 각성이 없다면 인간의 지성과 의식은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지도 모른다는, 경고로 읽히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 미래에도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별다른 변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음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주를 탐사하느니 자유로이 바다를 헤엄치는 인어가 되고자 했던 최재경의 선택에는 깊은 공감과 함께 박수를 보내게 된다.

우주로 날아가는 시대에도 여전히 성차별, 인종차별이 존재하면서 한 개인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지구- 그렇다면 인간 배아를 디자인할 수 있게 되어 어떤 결점도 없이 아름답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신인류, 서로를 밟고 그 위에 서지 않는 신인류들만이 모여 사는 그런 세계는  행복할까? 서로의 결점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이들만 모여 사는 사회, ‘서로의 존재를 결코 배제’ 하지 않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사회는 진짜 유토피아일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흉측한 얼룩을 남기는 유전병 때문에 지구인들에게 마음껏 멸시당하고 혐오받았던 이민자의 딸 ‘릴리’. 릴리는 인간 배아를 디자인해 선량하고 아름다운 인간들만 모여 사는 완벽한 세상을 만들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지구로 순례를 떠난 뒤에, 이상하게도 고통의 행성 지구에 남아있기를 선택한다. 마을로 돌아오더라도 몇몇 이들은 지구를 그리워한다. 지속적으로 고통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그 지구에 과연 무엇이 있기에 그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거나, 와서도 지구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감정의 물성>에서 사람들이 ‘우울’이나 ‘분노’, ‘공포’ 등 부정적인 감정들까지 돈을 주고 사서 소유하려고 하는 것처럼 순례자들도 고통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지구에 남기를 선택한다. 바로 여기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유토피아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스펙트럼>에서 ‘희진’이 만난 외계 생명체 ‘루이’는 친절함, 배려, 상냥함 등등 인간의 긍정적 특성이라고 생각되는 점들을 갖고 있다. 루이가 속한 무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들의 언어는 조금 특이해서 ‘색채 언어’이다. 루이가 ‘다르다’라고 표시하는 수많은 붉은색들 사이의 차이점을 지구인 희진은 알 수 없다. 수많은 파란색, 수많은 보라색, 수많은 초록색과 노란색이 있다. 루이는 그 색상들을 모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 어느 것도 같지 않다. 희진이 외계 생명체인 루이를 연구하듯, 루이 또한 자신에게는 외계 생명체인 희진을 연구한다. 희진을 연구한 루이의 종이 위의 색채들은 마치 누군가 수백 종의 물감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다채롭다. 희진은 그 가운데 한 문장을 겨우 해석하게 된다. 자신을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라고 말하는 루이. 그들의 색채 언어에 비하면 인간의 언어는 너무나도 명확하고 직접적이며 제한적이다. 해석의 다양성이나 미묘한 차이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루이가 희진이라는 한 사람을 연구하고 기록한 종이는 수백 종의 물감을 흩뿌려 놓은 것처럼 다채롭다. 사람은 저마다 모두가 그만큼의 ‘다양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오롯이 표현할 수 없는 다양성, 개성.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양성을 모두가 존중할 줄 아는 세계라면, 결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세상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루이와 같은 외계 생명체는 아주 수만 년 전, 그보다 더 오래전에 지구 밖 어느 행성에서 인류를 찾아와 우리 뇌에 자리 잡으며 우리의 유년기를 지배하면서 인간을 윤리적 주체가 되도록 가르쳐왔을지도 모른다(<공생가설>).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외계 생명체가 꼭 저 우주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런 존재라고만 볼 수 있을까? 내가 아닌 타자, 내가 잘 알지 못하고,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그래서 어쩌면 꺼려하고 혐오하기도 하는 대상. 그런 존재 또한 외계 생명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존재를 ‘루이’의 색채 언어처럼 무수히 많은 다양성 표현하고 받아들이고 포용함으로써 인간에게도 더 열린 세계가 가능해지고, 거기에서 잃어버린 윤리 의식까지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 넓고도 넓은 우주에서 외로움의 총합은 더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조금 줄어들 수도 있다고, 김초엽의 작품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삶의 '눈보라'를 예리하게 포착한 시인 푸시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