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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Nov 30. 2020

페스트, 코로나, 그리고 인간

알베르 카뮈, <페스트>


카뮈의 <페스트>를 다시 읽은 이유는 순전히 요즘 상황 때문이다. 오래전 읽은 이 책을 사실 또 읽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민음사에서 나온, 선명하게 쥐가 새겨진 리커버판은 그 상징적인 이미지 때문에 소장용으로 간직하려고 사둔 책이었다. 그런데 요즘 문득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놀랐다. 페스트가 창궐한 오랑시와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이 땅이, 아니 이 지구가 어쩌면 이토록 똑같단 말인가. 카뮈에게 또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라 <페스트>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내가 이번에 주목해서 읽은 부분은 전염병이 창궐하고, 그에 따른 한 도시 공동체의 변화이다. 애초에 중국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불길한 전조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페스트>의 오랑시처럼 말이다. 이 작품은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자기의 진찰실을 나서다가 층계참 한복판에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로 시작한다. 죽은 쥐 한 마리.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리유 또한 당장에는 특별한 주의도 하지 않은 채 죽은 쥐를 발로 밀어 치우고 층계를 내려간다. 그럼에도 쥐가 나올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수위인 미셸 영감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그런데  미셸 영감의 반응을 보자 예삿일이 아닌 것 같다. 쥐가 여러 마리 보였다는 것이다.

같은 날 저녁 집으로 올라오다가 리유는 복도의 어두침침한 곳에서 또다시 큰 쥐 한 마리를 발견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쥐가 그를 향해 달려오다가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는 게 아닌가. 리유는 기이하다고 생각한다. 쥐가 ‘피를 토하고’ 죽어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그다음 날부터 죽은 쥐는 곳곳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발견된다. 쥐들이 쓰레기통에 쌓인 채, 아니면 도랑 속에 길게 열을 지은 채 기다리는 판국이다. 사람들도 조금씩 동요한다.

석간신문에서도 기사를 다루고, 과연 시 당국은 행동을 개시할 용의가 있는가 없는가, 구역질 나는 쥐 떼들의 침해로부터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는가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 당국은 아무런 제안도, 대책도 마련한 것이 없었지만 우선은 회의를 열기로 한다. 그러는 사이 사태는 점점 더 심각해진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4월 25일 단 하루 동안에 쥐 6,231마리가 수거, 소각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 도시에서 매일같이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의 분명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그 숫자는 사람들 마음속 혼란을 더욱 가중한다. 이제까지만 해도 그저 좀 불쾌한 사건이라고 투덜거릴 정도였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그 현상에는 왠지 무시무시한 구석이 있어 보인다.

4월 28일 약 8,000마리의 쥐를 수거했다는 뉴스가 발표되자 도시의 불안은 절정에 이른다. 사람들은 근본 대책을 세우라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고, 바닷가에 집을 가진 몇몇 사람들은 그곳으로 피난 갈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튿날 언론은 그 현상이 갑자기 멎었고, 죽은 쥐 숫자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감소했다고 보도한다. 석간신문을 파는 판매원들이 쥐들의 침해는 완전히 끝났다고 외치기 시작한다. 마침내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바로 그날 의사 리유는 수위 미셸의 죽음을 목도한다. 그는 고통스럽게 죽어가며 “쥐들!”하고 내뱉는다.

쥐가 죽어나가는 일이 멈추자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헛소리를 해대더니 아무 데서나 구토를 했다. 그런 이들은 온몸이 멍울 투성이고, 그 멍울은 곪기 시작하다가 이내 썩은 과일처럼 갈라졌다. 이런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은 하나같이 피를 흘리며 사지를 비틀었다. 배와 다리에 반점이 돋아나면서 멍울들은 곪지 않게 되었다가 곧 다시 부어올랐다. 대부분의 경우 환자들은 끔찍한 악취를 풍기며 죽어간다.


쥐들의 사건을 가지고 그렇게 떠들어 대던 신문이 이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쥐들은 눈에 띄는 거리에 나와 죽었지만 사람들은 방 안에서 죽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문은 오직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62쪽)


언론과 달리 도청과 시청에서는 의문을 느끼기 시작한다. 불과 며칠 동안에 사망 건수가 몇 배로 불어났고 의사들은 믿기지 않지만 그것이 ‘페스트’라고 추측한다. 역사상 알려진 약 서른 차례의 대규모 페스트가 일억에 가까운 인명을 빼앗아 갔다. 그러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양에서는 ‘그것’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증상은 페스트가 틀림없다. 그러나 의사들도 시당국도 그 ‘유행병’을 섣불리 ‘페스트’라 부르지 못한다. 그만큼 꺼림칙한 것이다.

  “솔직하게 당신 생각을 말해 주시오. 당신은 이것이 페스트라고 확신합니까?”
  “질문을 잘못하셨습니다. 이건 어휘 문제가 아니고 시간문제입니다.” (87쪽)


다행스럽게도 유행병은 수그러져 가는 듯싶었다. 며칠 동안 사망자 수는 불과 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당국도 안도하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 또한 불길한 전조였을 뿐이다. 갑자기 병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고, 사망자 수가 다시 서른 명으로 늘어난 날, 의사  리유는 “저들이 겁을 먹었소.”하며 지사가 내미는 전보 공문을 받아 읽는다. 전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

불길한 전조가 보이고, 몇몇 의사는 그 전조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왠지 꺼림칙한 현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언론이 호도하고, 당국은 그 전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다가, 또는 섣불리 낙관하다가 사태를 키우고, 결국 오랑이라는 한 도시를 봉쇄하는 극단 조치를 취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중국 우한이나 요즈음 이 땅의 사태와 놀랍도록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카뮈의 <페스트>가 이런 사태를 나열하는 데 그쳤다면 이 작품은 하나의 르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페스트>가 오늘날까지 손에 꼽히는 명작으로 남은 까닭은 그 안에 갇힌 ‘사람들’에 주목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써 나가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과정들은 이 작품의 시작 부분에 속한다. 페스트로 봉쇄된 도시에 남은 인간 군상들, 의사인 ‘리유’를 비롯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랑에 머물고 있는 ‘장 타루’, 사랑하는 이와 갑자기 생이별을 당하게 된 신문기자 ‘랑베르’, 시의 말단 공무원 ‘그랑’, 신부 ‘파늘루’, 페스트가 일어나기 전 자살을 시도했다가, 페스트가 번지자 오히려 평온을 되찾은 기이한 사나이 ‘코타르’까지. 이 인물들이 서로 얽히면서 빚어내는 이야기들이 이 작품을 하나의 명작으로 만들어낸다.

코로나 이후 우리나라 사태와 견주어서 <페스트>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신부 ‘파늘루’의 존재이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꼭 그것을 종교와 연관 지으려는 이들은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는가 보다. <페스트>에서 파늘루 신부가 그런 존재이다. 페스트가 속수무책으로 번지자 오랑시의 고위 성직자 측에서는 집단 기도 주간을 설정함으로써 그들 특유의 방법으로 페스트와 싸우기로 한다. 그 기회에 파늘루 신부는 설교를 위촉받고 예배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 형제들, 여러분은 불행을 겪고 계십니다. 여러 형제들, 여러분은 그 불행을 겪어 마땅합니다.” 출애굽기 한 구절을 인용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 재앙이 처음으로 역사상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신에게 대적한 자들을 쳐부수기 위해서였습니다. 에굽왕은 하느님의 영원한 뜻을 거역하였는지라 페스트가 그를 굴복시켰습니다. 태초부터 신의 재앙은 오만한 자들과 눈먼 자들을 그 발아래 꿇어앉혔습니다.”(154쪽) 이 얼마나 코로나 이후 보여준 우리나라의 몇몇 종교의 모습과 닮았는가! 역병이 죄 많은 인간에게 내려진 형벌이라고, 그런 이들은 죄받아 마땅하다고 외치던 이 신부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폐쇄 이후의 오랑시, 페스트의 지배 아래 들어간 이 도시에서는 이제는 누구도 거창한 감정을 품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이 단조로운 감정만 느끼게 된다. 그들이 느끼는 공통 감정은 ‘생이별과 귀양살이’이다. 거기에는 일종의 공포와 반항이 깃들어 있다. ‘항상 나보다 더 부자유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무렵에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페스트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심지어 우정을 나눌 힘조차도 빼앗아가 버린다. 연애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미래가 요구되어야 하는데, 이들에게는 ‘현재의 순간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꿈속에서 밖에는 희망을 품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놈의 멍울, 이젠 좀 끝장이 났으면!’하고 생각할 정도로 페스트에 온통 자신을 맡겨 버린 상태가 된다. 이 질병의 무지막지한 침범은, 그 첫 결과로써 시민들을 마치 사적인 감정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112쪽)

의사인 리유조차 페스트 생각을 할 때마다 매번 일어나는 가벼운 현기증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 또한 자신이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카페에  두 번이나 들어간 것을 상기하고 후회하곤 한다. 그럼에도 그가 카페를 찾아갔던 이유는 오직 하나이다. 접촉이 거의 불가능한 그 시기에 ‘인간의 훈훈한 체온’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인간의 훈훈한 체온’에 <페스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도시는 폐쇄당하고 사람들은 격리된 채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려하게 되고, 벼룩을 옮긴다는 이유로 개와 고양이를 총으로 쏴 죽이는 지경. 그럼에도 그들 중에는 분명 이 도시에서, 페스트라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이곳에서 누군가를 위해 행동한다. 스스로 ‘보건대’를 만들어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이 무너지는 공동체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기 위해 싸움을 시작한다. 자신은 이 도시 사람이 아니라고, 저 바깥에 사랑하는 이가 있다고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던 랑베르조차 어느 순간 자기만 행복하기는 부끄럽다며 오랑시에 남기를 선택한다. 그 누구라도 인간에게는 그러한 면이 있다. 있다고 믿는다. 파늘루 신부가 말한 것처럼 죄받아 마땅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나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한 면은 하나쯤 있다고 믿는다. <페스트>에서는 그런 진실을 전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 싸움에서 인간은 쉽게 지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지구 곳곳에서 혐오가 넘치고 있다. 그 혐오가 페스트보다도, 코로나바이러스보다도 더 심한 독이 아닐까. 이 작품 끝 무렵에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만다”는 말은 그래서 더 마음에 남는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일반적인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261쪽)


자기는 죽음의 세계 한가운데서도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 죽음은 하늘로부터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그와 같은 것이니 페스트와 완전히 격리된 섬이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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