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잠자냥 Feb 19. 2021

'문'을 여는 기쁨 그리고 고통

서보 머그더, <도어>


서보 머그더의 <도어>를 읽는 내내 심적으로 조금 힘들었다. 작품이 폭력적이거나 끔찍한 것은 전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나’와 ‘에메렌츠’라는 두 여성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기록이라 어느 땐 조금 지루하기도 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힘들었을까? 책을 다 읽은 뒤 며칠이 지난 뒤에야 깨닫는다. ‘에메렌츠’라는 사람, 바로 그녀 때문이라고. ‘에메렌츠’는 강렬하게 개성적인 인물이다. 최근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이랄까. 그렇지만 ‘에메렌츠’를 좋아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저을 것 같다. <도어>의 화자이자 작가의 분신 또는 서보 머그더 그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 ‘나’는 이 ‘에메렌츠’와의 20여 년 동안 특별한 관계를 쌓아가고, 그 기억을 중심으로 이 작품을 써나간다.


유명 작가인 ‘나’는 집필에만 전념하고자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을 구한다. 친구는 ‘에메렌츠’라는 여성을 추천하는데, 묘한 말을 남긴다. ‘그녀가 널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니, 뭔가 주객전도 느낌이다. 아니나 다를까 에메렌츠는 마치 자신이 주인으로 모실 사람을 고르듯이 ‘나’와  ‘나의 남편’을 꼼꼼히 심사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먼저 일을 해보고 나서 급료를 직접 정하겠단다. 게다가 자기 근무 시간 외에는 절대로 성가시게 해서도 안 되며, 그 어떤 고마움의 표시나 사례 따위도 거절한다고 고집스럽게 말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에메렌츠는 ‘나’의 집안일을 해주기로 승낙한다. 거의 말이 없고, 괴팍스러우며, 고집불통인 이 에메렌츠는 ‘나’의  집안일에 대해서도 직접 규칙을 세운다. ‘나’는 자기 집의 주인이면서도 에메렌츠의 규칙을 말없이 따라야 한다. 그런 상황에 묘하게  반감이 들고 짜증이 나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녀가 정말이지 일을 너무나 잘하기 때문이다. 요리면 요리, 청소면 청소, 빨래면 빨래……. 일하는 티도 나지 않는데 놀라울 정도로 집안은 잘 정돈되고 ‘나’와 ‘남편’은 그런 에메렌츠의 방식에 만족하게  된다.


그런데 이 여인은 여러 면에서 남다른 구석이 있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마을 사람들의 집안일을 거들어 주면서 꽤 많은 돈을 모은 것 같은데, 홀로 매우 검소하게  수도승처럼 살아간다. 심지어 자기 집안으로 절대 그 누구도 초대한 적이 없다. 에메렌츠의 집 ‘도어’는 누구에게나 늘 굳게 닫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괴팍한 여성을 마을 사람들은 좋아해서 종종 그녀를 방문하는데, 그럴 때면 에메렌츠는 자신의 집 마당에  식탁을 차려놓고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나’ 또한 에메렌츠와 관계를 쌓아가면서 이 마당에 차려진 식탁에 초대받는다. 그러나 늘  거기까지이다. 그녀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절대로 열 수 없다. 에메렌츠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기에 그토록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외골수처럼 살아가는 것일까? 이 책의 첫 번째 재미는 바로 이 에메렌츠의 비밀을 알아가는 데 있다.


두 번째 재미는 작품 초반에 보이는 문장 ‘에메렌츠를 죽인 것은 나였다.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는 말도, 여기서는 그 사실 관계를 바꿀 수 없다.’(10쪽) 때문이다. ‘나’는 정말로 에메렌츠를 죽인 것일까? 만일 그랬다면 어떤 방식으로 죽였을까? 죽이고 싶었던 게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는데, 과연 에메렌츠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를 ‘구원’하려고  죽이게 됐을까 등등. 이 한 문장으로 온갖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에메렌츠의 과거를 좇는 일과 두 여성의 관계 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게 된다.


‘나’는 에메렌츠에 대해 얼마 지나지 않아 중요한 사실을 몇 가지 알게 된다. 주변 사람들을 통해 듣게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에메렌츠 스스로, 절대로 열 것  같지 않았던 그 무거운 입을 열기도 한다. 이는 그만큼 ‘나’를 여느 사람과 달리 봤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작가라는 신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책과 언어의 세계에서 사는 ‘지성인’이자 ‘교양인’으로서 에메렌츠가 이제까지 상대해온 이들과는 조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에메렌츠가 ‘나’에게 매우 투박한 방식으로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은 ‘나’가 그런 지성인이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에메렌츠 그녀에게 섣불리 질문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성격. 또 그러면서도 인간이기에 에메렌츠에게 기분  나쁘거나 상처 받거나 화가 나면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게 되는 그 솔직함 때문에 에메렌츠가 ‘나’를 한 사람으로,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고 그것을 들어줄 줄 아는 사람으로 점찍게 된 것은 아닐까.


에메렌츠의 세상에는 ‘빗자루질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대표되는 두 부류가 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빗자루질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가 속한 세계, 그러니까 책을 많이 읽고, 언어로 뭔가를 만들어 내고, 방송에 나와서 유식한 소리를 떠드는 ‘지성인’들은 빗자루질을 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가짜’와도 같다. 에메렌츠가 보기에 ‘나’와  같은 사람이 왜 그런 가짜 세계에 속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렇듯 에메렌츠는 문학이나 영화처럼 ‘빗자루질’ 없이 이루어지는  세계는 모두가 가짜이며 오히려 노동과 실천으로 이루어진 삶이 진짜라고 믿는다. 그래서 에메렌츠는 ‘나’에게 선물 받은 텔레비전으로 가짜 세계를 보느니, 마당에 나가서 내린 눈을 조용히 쓸 뿐이다. 이렇게 자신이 직접 뭔가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삶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들고, 주변의 길 잃은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에게 아낌없는 애정을 쏟으며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어려워하면서도 좋아하는 것이리라.


에메렌츠의  비밀을 알게 되면, 그녀가 왜 그토록 자기 집의 문은 물론 마음의 문도 닫아버리고 살아왔는지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힘들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꽤 스트레스받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서서히 인간적으로 끌리게 될까? ‘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나’의 씻을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때 이미 ‘나’와 ‘에메렌츠’는 단순한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뛰어넘어 그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둘도 없는 친구처럼, 또 때로는 엄마와 딸 같은 단단한 애정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에메렌츠의 그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게 되고, 그로 인해 둘은 파국을 맞는다.


이 책을 덮고 나서도 질문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내가 판단하기에 좋지 않은 선택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가장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좋을 법한 것을 해주는 게 그를 위한 최선인지. 누군가의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은 기꺼이 즐겁고 행복한, 기적 같은 일이 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늘 여러 의미의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일임을 <도어>는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에메렌츠를 죽인 것은 나였다.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는 말도’ 이 문장의 의미를 마침내 깨닫지만, 에메렌츠 처지에서는 그것이 과연 구원이었을지  ‘나’의 회한 어린 기록 속에 여전히 묵직한 질문으로 남는다.

작가의 이전글 연애박사 스탕달이 쓴 청춘의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