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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Feb 22. 2021

미래의 고전이 될 작품

버나딘 에바리스토,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영국 런던 한 극장에서 어떤 연극이 시작한다. 이 연극을 위해 모인 사람들은 다양할 것이다. 먼저 무대 위에 오르는 배우도 있고, 이 연극을 기획하고 만드는 데 애를 쓴 연출가 및 극단 관련자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이 연극을 보고자 모인 수많은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한 공간에 모인 이들 대다수는 아무런 관련이 없겠지만, 그들 중 몇몇은 서로 크든 작든 인연이 있을 수 있다.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이런 배경 아래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열두 명의 서로 다른 여성들의 삶을 그려 나간다. 


이 작품은 ‘앰마’와 ‘도미니크’ 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다호메이의 여전사들> 이 연극 초연을 앞두고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는 여성이 앰마이기 때문이다. 도미니크는 앰마와 죽이 잘 맞는 친구로 한때 앰마와 함께 여성들만의 극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지금은 저 먼 미국으로 떠나 생활하고 있으나, 오늘만큼은 절친인 앰마의 연극을 위해 그 먼 곳에서 날아왔다. 두 사람은 1980년대에 여자 교도소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오디션장에서 만났다. 그 무렵 그들은 노예, 하녀, 매춘부, 유모, 범죄자 같은 배역을 받거나 그마저 없으면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데 넌더리가 났고 마침내 서로 의기투합해 여성들을 위한 극단을 직접 세웠다. 앰마도 도미니크도 둘 다 레즈비언이지만 서로 반하지는 않은 단짝 친구로 그들 모두 페미니스트이며 흑인 역사, 문학, 정치 등을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유롭고 똑똑한 중년 여성이다. 


앰마에게는 ‘야즈’라는 이름의 딸이 하나 있는데, 자신처럼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게이의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했고, 그녀는 아이가 생김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어쩐지 반 페미니즘적인 것 같아서 그런 느낌을 아무에게나 잘 털어놓지는 못한다. 어느덧 대학생이 된 ‘야즈’는 딸 앞에서도 늘 새로운 파트너를 데리고 오는 일을 멈추지 않는 천하의 바람둥이 엄마와 똑똑하지만 나르시시스트인 게이 교수 아빠 두 집을 번갈아 오가면서 자랐고, 부모가 저마다 자기 활동에 힘 쏟는 동안에는 여러 대모와 대부(주로 레즈비언과 게이들인)에게 맡겨져 자랐다. 


앰마는 야즈가 자유로운 환경에서 페미니스트가 되길 바랐는데 야즈는 최근 들어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심지어 앰마에게 ‘페미나치’라는 소리까지 한다. 야즈가 말하기를 “페미니즘은 너무 떼 지어 몰려다니는 짓” 같고 “솔직히 여자라는 것도 요즘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단다. 야즈는 말한다. “모건  말렌가라고 내 눈을 뜨게 해 준 논바이너리 활동가가 있어 미래엔 우리 모두 논바이너리가 될 거라고 생각해 여자도 아니고 나자도  아닌 어쨌든 이런 건 젠더 기반의 성가신 일이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엄마가 말하는 여성의 정치 자체가 필요 없어질 거라는 얘기야  그건 그렇고 나는 인도주의자야 페미니즘보다 훨씬 더 높은 단계지 그게 뭔지 엄마는 알기나 해?”(62쪽) 하, 녀석 기막히게 말 한 번 잘한다. 


이런 ‘야즈’에게는 백인 친구도 있고 무슬림 친구도 있다. 백인 친구는 흑인인 야즈를 사귀면서 특권을 조금 포기해야 하며, 아랍인이 아닌데도 히잡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아랍인이라고 오해받는 ‘와리스’는 특권이라는 것 자체를 누려본 적이 없다. 와리스는 흑인, 무슬림, 여성, 가난한 자, 히잡을 쓴 사람, 다섯 가지 모두에 해당하기에 누구보다 억압받는다. ‘무슬림 한 명이 총기 난사를 하거나 폭탄을 터뜨려 사람을 죽이면 테러리스트라고 불리지만 백인 한 명이 똑같은 짓을 하면 그저 미친 사람이라고 불리는’(88쪽) 세상에서 흑인이면서 히잡을 쓴 와리스의 억압과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한편 앰마에게는 도미니크와는 정반대인 친구 ‘셜리’가 있다. 셜리는 답답할 정도로 모범생이다. 그러나 앰마가 백인들만 있는 학교를 다니며 왕따를 당하던 시절, 셜리 그 자신 또한 흑인의 한 사람으로 앰마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때부터 둘은 단짝이 된다. 정체성의 혼란을 잠시 겪은 뒤 앰마가 레즈비언으로서 당당히 선언하자, 단짝 친구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왠지 꺼려지면서도 앰마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하나뿐인 딸이면서도 오빠들과 차별받으며 자란 셜리는 공부로써 자신을 증명한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 역사를 공부하고 교사 자격증까지 따자 그제야 부모들은 자랑스러워한다. 오빠들은 해내지 못했지만 그녀는 해낸 것이다. 그녀는 집안의 성공 스토리가 된다. 교사로서 첫 발을 내디딘 셜리는 꿈에 부푼다. 흑인 아이들에게 자기처럼 성공의 기회를 주고, 시궁창 같은 삶을 벗어날 기회를 주겠노라 뜨겁게 마음먹는다. 실제로 셜리는 타고난 교사라고 칭찬받는다. 학생들과 잘 공감하고 교사의 의무를 넘어 모범적인 교육 방법으로 월등한 시험 결과를 얻으며 ‘같은 민족’에게 귀감이 된다고 교장에게 칭찬받는다. 셜리는 지금까지도 압박감을 느낀다. 훌륭한 교사이자 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 전 세계 모든 흑인을 대표하는 그런 대표. 그렇지만 오랜 교사 생활 후 남은 것은 시들어버린 꿈과 남루한 인생뿐이다. 이제는 남편과 함께 해마다 엄마인 ‘윈섬’의 집을 찾아 대가족이 여름휴가를 즐기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 되었다. 오늘 앰마의 초대로 연극을 보러 온 셜리는 그곳에서 우연히 뜻밖의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열두 명의 여자들 중 앰마, 야즈, 도미니크, 셜리 등 네 사람의 이야기만 했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는 인종, 성(性), 젠더, 계급 문제까지 드러난다. 나머지 여성들, ‘캐럴’. ‘버미’, ‘라티샤’, ‘윈섬’, ‘퍼넬러피’, ‘메건/모건’, ‘해티’, ‘그레이스’ 는 앰마, 야즈, 도미니크, 셜리와 어떤 관계이며 저마다 또 어떤 이야기를 펼쳐 보여줄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 작품은 첫 장부터 매우 역동적으로 흡인력 넘치는 이야기 풀어가며 독자를 끌어들인다. 인용 구절을 보고 눈치챈 이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 작품에는 마침표가 없다. 609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끝나는, 그조차도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로 맺어지는, 어찌 보면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열 두 여성의 삶의 기록이자 연대기이다. 그런데 그 흐름이 물 흐르듯 막힘이 없다. 그러면서도 앞서 이야기했듯이 오늘날 현대 사회가 지닌 거의 모든 문제, 인종 차별, 성 차별, 계급 차별,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영국 사회의 문제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읽다 보면 정말 대단한 작품이구나,  마거릿 애트우드와 부커상을 공동으로 수상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구나,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2019년에 부커상이 이 흑백 두 여성에게, 그것도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증언들>과 같은 페미니즘 작품에 상을 준 것도 시대 흐름상 마땅한 결과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은 페미니스트가 되는 게 유행이야  블로그, 시위, 크라우드 펀딩, 정말 못 봐주겠어
페미니즘이 다시 살아나 활기를 띠는 게 왜 좋지 않은 일인지 날 이해시켜 볼래? 
사실 내가 거슬리는 건 페미니즘의 상업화야 엠마, 예전에는 미디어에서 페미니스트를 심하게 비난하다 보니 아무도 페미니스트라는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아서 몇 세대의 여자들이 자신의 해방을 외면해왔지 이제는 미디어와 야합하고 있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파격적인 옷차림을 한 채 거창한 몸놀림을 보이는 화려한 사진 본 적 있지? 이제는 유행도 아니야
페미니즘의 토대 전체가 바뀌어야 해 그저 유행을 따르는 변모 정도가 아니고
수백만의 여자가 깨어나 완전한 권리를 지난 인간으로서 우리 세계의 주인 자리를 찾는 가능성에 눈을 뜬다는 건 축하할 일이야
우리가 어떻게 이걸 반박할 수 있겠어? (608~609쪽)


앰마와 도미니크의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페미니즘이 유행처럼 번지고 상업화되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이 작품 속 ‘퍼넬러피’처럼 페미니스트가 됨으로써 가정이 깨지고, 그래서 홀로 늙어가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자유를 즐기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페미니즘이 내 삶을 망치는 데 일조했다고 불만을 품은 여자도 있을 수 있고, 뒤늦게 페미니즘을 알아가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뜨며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 자기 욕망에도 눈뜨는 ‘윈섬’ 같은 여성도 있을 수 있으며, 야즈나 ‘모건’처럼 페미니즘은 이제 한물간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젠더 프리’를 외치며 더 앞선 세상을 꿈꾸는 젊은이들도 있을 수 있다. 여성해방보다도 살기 위해, 시궁창 같은 삶을 벗어나기 위해  백인과도 같은 삶을 받아들이는 일이 먼저인 ‘캐럴’같은 여성도 있을 것이며, 19세기, 20세기 초에 태어나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알기도 전에 가부장제의 폭력에 시달린 ‘그레이스’ 같은 여성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열두 명의 삶은 “우리 여자들/아무도 칭송하며 노래해주지 않고/아무도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356쪽) 그 여성들의 삶을 전면에 내세우며 모두가 귀 기울이게 하는 데 성공한다. 그저 젊고 활기찬 세대뿐만이 아니라 처음에는 딸이었고 다음에는 아내이자 어머니였고 이제는 할머니면서 증조할머니, 또는 고조할머니가 된 여성들의 이야기도 ‘한 개인’으로 보여준다는 데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들의 삶을 지켜보노라면 어느 지점에선가 아, 이건 내 이야기구나 하게 된다. 특히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마지막 ‘그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이 이야기가 결국은 인간 전체의 이야기임을 깨닫게 되며 이 영리하고 에너지 넘치는 작가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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