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 신문, 잡지, 브라운관으로 단어들이 떠다닌다.
나는 확률을 잘 믿지 않지만, 그 흔한 허락 하나 구하지 않은 단어들이 브라운관을 비출 때면 '1천만 분의 확률이 아니고서야'하고 웃고 마는 것이다. 이제 막 손끝으로 탄생한 언어가 날것에 대한 갈망처럼 마구잡이로 전파를 탔다.
언어는 이제 기억에서 멀어져 버린 아주 오래된 것들도 뒤섞여 있었다. 유년의 것을 뒤적이듯 오래된 언어들이 여전히 브라우저 너머에 살아 숨 쉬고 있을 때, 돌연 두려워졌다.
나를 어디에서 봤나?
아니면 우회 경로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지나쳐도 되는 일인가?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그 언어를 두고 낯부끄러워했다. 쓰임과 출처가 불확실함에도 그 주인이 있는 양 여겨져 사용이 불편했던 까닭이다. 나는 애멀게 응시하다 노트를 펼쳐 단어를 끄적여 본다. 나를 메워온 단어들이 시종일관 타인의 입을 통해 오르내리는 일을 두고, 쓰던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 서툴러진 것에 대해 나는 구태여 저항하고 있지 않았다.
수만 개의 단어가 떠다니고,
그 중에 해일을 일구는 절반의 단어가 나를 가리키고 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별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처럼 소비가 끝난 언어들은 빠르게 삭제되어 갔다. 그것은 유행의 흐름이 그랬고, 욕망을 들추어낸 치부처럼 그랬다. 아무래도 빠른 소비가 일군 대참사였다. 하나의 언어가 태어나고 소모되기까지 전파는 약 1여 년의 시간을 소비했다. 그 언어는 널리 전파되지 못했고, 그 쓰임이 본연의 성질을 잊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울 때까지 나는 한참이나 언어를 그대로 두었다.
사람들은 더이상 언어를 찾지 않았다. 시대를 풍미하듯 기이하게 소비된 단어들은 가끔 우스갯거리처럼 사용되고 또 사라졌다. 나는 제 것이 아닌 양 코웃음을 치면서도 몇 번인가 그것들을 쓰다듬었다. 한참이나 손으로 쓰다듬었다.
대게 거부하던 것들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 누군가는 가장 객관적인 시선을 갖게 된다. 맥없이 소모된 것들에 대해, 변질된 것들을 두고 나는 꼭 그런 따분한 선택을 했다. 어쩌면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TV 드라마를 통해 손가락을 두드리는 행위를 두고 호기심이 생겨 인터넷을 뒤져 본 적이 있다. 위험에 처하거나, 자신의 정보를 비밀리에 전할 때 일정한 간격을 두어 두드리는 일종의 교신 언어를 두고 모스 부호라고 한다.
나는 언어를 몫이 좋은 자리를 찾아 전했다.
반드시 본 적이 있는 언어를 끌어 안고, 설레는 발걸음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