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이 멀어 서너 달에 한 번을 갈까 말까라 한번 가면 족히 8-9일을 머물다 온다. 거기에 두 딸까지 데리고 가니 혼자 남겨질 병히에겐 세상 달콤한 자유의 시간이리라. 그래서 한 번씩 그를 떠보는데 인터넷 짤로 단련한 유부남 병히는 쉽사리 미끼를 물지 않는다.
"나랑 애들 친정 가면 너 살판나겠네? 뭐 할 거야?"
"하긴 뭘 해. 넥플릭스나 보다 자는 거지"
퍽이나.... 억지로 짓는 시무룩한 표정까지. 인터넷 게시글 '마누라 친정 갈 때 행동지침'을 참으로 성실하게 따르는 속이 훤한 그다. 그래도 일단 친정에 가고보자. 아파트 차량 입출입 시간이 따박따박 날짜별로 찍히니 다녀와서 병히를 심판해도 늦지 않을 테니.
친정부모님이 두 딸과 나를 먹이고 재우고 돌보는 동안 자유인 병히는 뭘 하며 긴긴밤을 보낼지 참으로 궁금했다. 매일밤 영상통화를 하며 뭐 하고 있냐 물으면 그는 영화를 본다 혹은 게임을 한다고 뻔한 소리를 했다. 내가 웃으며 이럴 때 유흥을 즐겨야 되는 게 아니냐 물으면 정색을 하며 헛소리를 할 거면 끊으라고 되려 성질을 부리곤 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버럭 화를 내지? 영상통화너머로 구린내가 풍겨왔지만 설마 하고 싹트는 의심을 애써 접으며 잠드는 나날이었다.
어느새 시간이 살같이 흘러 병히가 친정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일주일 넘게 홀아비가 지낸 집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냉장고에 먹다 남은 치킨, 피자, 족발 등 배달음식이 종이박스채로 들어가 있고 식탁 위엔 온갖 잡동사니가 쌓였으며 현관에는 종이 박스가 널브러져 있고 화장실에 물때가 빨갛게 끼었다. 집안 꼴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9일 치의 밀린 살림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에효. 병히를 째려보니 일하고 와서 집을 치울 새가 없었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손 많이 가는 남의 집 아들을 갖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어라! 저게 뭐지? 서재에 못 보던 물건이 놓여있었다.
내가 인상을 구기며 서재를 스캔하자 병히가 호다닥 와서는
"한정판 피규어인데 싸게 샀어"
내가 묻기도 전에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정판이라는 못 보던 피규어가 세 개나 놓여있었다. 내가 없는 사이 병히는 신나게 피규어를 배송받은 것이다. 내가 있을 때 배송이 오면 반송시킬 것을 예측하여 내가 친정에 간 사이 배송받고 상자를 뜯어 반품하지 못하게 조립 후 진열해 둔 것이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야! 장난하냐? 나 없을 때 이것들 사모으고 있었냐?"
"......"
안절부절못하며 울상을 짓는 그가 어이가 없었다. 순간 엄마 눈치 보며 몰래 장난감을 사다 걸린 어린 아들 같아 웃음이 났다. 내가 웃자 병히도 따라 웃으며,
"이거 싸게 샀어. 진짜야."
싸다는 소리만 서너 번을 더 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비싸구나 생각하며 더는 캐묻지 않았다. 병히의 일탈은 참으로 소소하고 시시했다. 얼마나 갖고 싶었으면 이랬을까 싶어 귀엽기까지 했다.
남편이 귀여워 보이면 게임 끝이라던데..... 난 병히에게 GG를 선포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쭈욱 잘 데리고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