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로 떠나는 직장인 나트륨씨 #6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아주 낮은 직급을 가진 나에게 애초에 권력이란 게 있을 수 없단 건 잘 알고 있다. 요즘 들어 느끼는 건 나는 정말 회사가 가진 체스 말 정도라는 거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신규 고용이 중단되고, 연봉 동결까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물론 회사도 현실적인 문제가 있을 것을 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서로가 이야기하면서 도울 수 있는 건 돕고 앞으로 나가려고 노력하는 것 아닐까? 친구 사이도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그 관계가 정의된다고 하는데, 회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오히려 상하관계가 더 고착화되고, 윗 직급은 아랫 직급에게 굳이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 어느 선까지는 그들이 가진 권력을 인정하면서도 그게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까지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달갑지는 않다.
싱가포르로 이전하는 시점에 대한 것이 특히 그렇다. 내가 싱가포르로 옮겨가는 시점에 대해서 내 현실적인 상황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묻지도 않고 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5월 말까지 서울 사무실에 출근하고 6월 초부터 싱가포르 입국 직전까지 내 휴가를 차감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5월 중순부터는 휴가를 계획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들끼리 의논하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실제로 재택근무 기간 내내 ‘이미 나갈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모든 업무에서 밀려나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물론 아주 윗 단에서 해결하실 문제들이 있었겠지만, 나의 현실적인 상황은 누가 물어보지도 않은 채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회사에 크게 실망했다. 직전 포스트에서 언급했듯, 팀장님의 메시지들에서 그런 ‘뉘앙스’가 느껴졌지만, 결국 내 휴가를 사용하고 나가는 시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나의 몫이고 내 권리이기 때문에 그 선을 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게 실수였다.
그래서 불가능한 상황임을 더 늦기 전에 어필했다. 그룹장에게 나는 이런 상황이고 당장 이 시점 이후부터는 지낼 곳이 없다고 알렸다. 그랬더니 이제 와서 내 협조를 얻으려고 했다. 부탁이라며, 이럴 수밖에 없는 회사의 현재 상황을 더 이해해달라고 했다. 나도 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해보겠으나, 이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메시지를 보내 두었다. 다음 날, 출근해서는 바로 이야기를 나누길 청해왔고, 아주 뒷 목 잡는 발언들을 하기 시작했다.
회사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어려운 상황이고, 나를 계획대로 싱가포르로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며 나를 안 보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대체 인력을 못 뽑는 상황이라며, 가용 인력이 주는 것은 타격이 크다며 이 문제를 왜 이기적으로 혼자 결정하냐고 물었다. 꼬인 나에게는 이 말들이 협박처럼 들려왔다. 마치 내가 협조하지 않으면 날 보내주지 않겠다는 압박이었다. 게다가 이 결정을 이기적이라고 칭했다. 나의 현실적인 상황은 아예 보지 않고 그들의 ‘현실적인 상황’만 고집하는 게 누가 이기적이란 것인지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 회사는 나를 충분히 배려해주고 있다고 했다. 나로 인해 실무진이 힘들어한다고 까지 말했다. 실무진이 힘든 건 ‘나갈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모든 프로젝트에서 밀려나면서 실무 인력의 업무가 늘어난 것인데, 그걸 어떻게 내 탓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의 담당자를 교체한 건, 나와 전혀 이야기가 되지 않았고, 그것을 고객사에 먼저 공유해버리면서 나를 밀어낸 것은 팀장인데 이제 와서 실무인력을 배려해달라고 하는 게 정말이지 헛웃음이 나왔다.
떠나는 사람이 아름답게 떠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최대한 서로를 배려하며 좋게 결정할 수 있는 건데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사측을 어떻게 좋게 바라보란 것일까...? 회사가 다 이렇겠지만,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울 줄 알았다면 그저 퇴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 나는 심지어 이 오퍼를 거절하며 퇴사를 하고 싶었다. 그룹장은 내게 싱가포르로 보내지 않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 상황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내가 회사를 계속 다닐 것이라 생각한 걸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채용 시장이 죽었어도, 사람은 항상 부족하고 내 연차에 이직은 쉽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고 그의 말을 되짚어 볼수록, 내가 그룹장과 나눈 대화는 정말 협박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어차피 나는 나갈 사람이고, 현실적으로 내가 5월 중순 이후에 서울에 있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직까지 심각한데 싱가포르로 떠나면 언제 다시 한국으로 올 수 있을지 모른다. 싱가포르의 상황은 하루하루가 지나며 심각해지고 있고, 국가적인 락 다운까지 선언된 상황이다. 만약 그룹장의 말대로, 내가 못 가게 된다면 그냥 그만두면 되는 일이다. 이건 직장 내 괴롭힘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본인의 휴가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회사 상황은 감안해야 하지만, 내 휴가 시점을 본인들이 좋을 대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싱가포르의 팀장에게도 이런 상황에 대해 알렸고, 싱가포르 인사팀에도 공유해두었다. 심지어 한국 인사팀에서도 내 상황을 더 염려해주면서 결정되는 대로 알려달라고 했는데 그룹장을 비롯한 팀장들은 되려 협박을 한다. 회사에서 도구로써 존재한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내가 헌신했던 회사에서 이기적이라는 평가를 듣고 떠나게 되어 마음이 불편하지만 더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만 아플 뿐이다. 마음을 비우고 마지막 출근일까지 버티면 될 일이다.
7탄에서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