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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은 Nov 15. 2023

지금 가장 한국적인 한국문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인 시대, 다시 읽는〈한국의 정체성〉

한국영화가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한국 아티스트가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오른다는 소식이 더 이상 놀라울 것 없는 2023년이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소식에 열광하고, 그래미 어워즈에서 BTS의 수상이 불발될 때마다 화제와 논란으로 불타오르는 건 한국 언론보다 오히려 해외 미디어들이다. 2000년대 초반 '한류'라 불리며 일부 국가의 서브컬쳐 정도로 여겨졌던 한국문화는, 이제 세계적인 주류문화를 휩쓰는 'K-wave'가 되었다.


그렇기에 지금에 와서 〈한국의 정체성〉을 읽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책이 20년도 더 전인 2000년에 쓰여졌으며, 그 이후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격세지감을 느낄만큼 달라졌다는 것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사실 서두에 한국을 약소국, 후진국으로 자칭하거나 문화적 변방국으로 인식하는 콤플렉스가 드러나는 부분에서는 이 책이 시대에 뒤떨어진, 더 이상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고찰 자체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나름의 기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한국적인 것의 개념이 유동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지금 시대에 더욱 큰 가치를 갖는다.



I.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정체성'은 형이상학적 개념으로서 "누구인가",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인의 정체성은 다른 개념이며, 두 가지를 동일시하는 것은 합성의 오류, 또는 분할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집단이 갖는 여러 분야의 공통된 특성을 찾음으로써 한국의 집단정체성을 탐구할 수 있다.


II. 한국적인 것, 세계적인 것

추상명사는 개별자를 분류하기 위해 편의에 따라 만들어진 개념으로서, 물리적 기반이 존재하는 개별자와는 달리 실존하지 않는다.

'보편성'은 추상명사에 해당하므로 (자연과학이 아닌 인문학의 관점에서) 관념적으로만 존재할 뿐 실존하지 않는다.

한국문화가 세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1) 인류 보편적 가치를 말하는 내용과 정서를 2) 한국 문화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소재와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III. 정체성 판단의 기준

'고유성'은 원조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발전한 개성이나 독특함이 있는가의 문제이다.

'창의성'은 기존의 것에 새로운 가치가 더해져 재창조가 이루어졌는가의 문제로 단순한 변화와 구별된다.

어떤 것이 한국의 정체성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는 1) '현재성(지금 일어나는 일인가)'과 2) '대중성(다수가 선호하는 것인가)', 3) '주체성(한국적이기를 지향하는가)'이 있다.



책의 전체 내용에서 저자의 주장에 해당하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2023년의 시점에서 한국문화의 세계 진출 성공 사례라는 결과를 가지고 각각의 주장이 사례와 부합하는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어떤 것이 한국의 정체성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는 1) 현재성(지금 일어나는 일인가)과 2) 대중성(다수가 선호하는 것인가), 3) 주체성(한국적이기를 지향하는가)이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MZ세대로 불리는 청년층 사이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선호가 높아졌다. 이들은 한옥을 개조한 식당이나 카페를 찾고, 커피에 약과 등 전통다과를 곁들여 먹고, 때로는 친구들과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수십년 간 과거의 유산으로만 존재하며 동시대의 정체성과 멀어져 있던 전통문화는 이제 복원된 과거, 즉 현재로 존재하며 한국의 정체성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전통문화는 한 때 현재성과 대중성을 상실하여 한국의 고유한 문화일지언정 정체성은 아닌 것으로 여겨졌으나, 시대가 변화하며 현재성과 대중성을 회복함으로써 다시금 정체성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한국 문화가 세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1) 인류 보편적 가치를 말하는 내용과 정서를 2) 한국 문화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소재와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 부문을 수상하고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은 한국 배우들이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어로 연기한, 철저히 한국적인 영화다. 반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빈부격차와 수직적 계층에 대한 담론은 한국사회에 국한되지 않은 전세계적인 문제였기에 세계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현상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때로는 'K-신파'로 폄하되기도 하는 특유의 감정적 서사가 본질적으로 가족의 의미, 사랑과 우정, 고난의 극복 등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에 국적을 불문하고 전세계의 시청자를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례가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으나 대표적으로 꼽히는 다수의 사례가 저자가 주장한 바와 유사한 방식으로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볼 때 이 주장은 한국문화의 세계화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기생충과 오징어게임, BTS와 블랙핑크 — 한국 문화가 현시점에 전세계적으로 가장 트렌디한 문화 중 한 갈래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일 것이다. 영화와 음악 뿐 아니라 패션, 뷰티, 디자인 등 다양한 문화영역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고무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 문화는 한 때의 트렌드로 지나갈 것인지, 오래도록 클래식으로 머물 것인지 나뉘는 갈림길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제 한국의 제작자들은 나름의 성공 공식을 찾은 듯 보이지만 미디어와 콘텐츠의 폼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그 공식이 언제까지 통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무엇이 한국적이다"라는 답을 내리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이 한국적이며 또 한국적이지 않은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가 내려질 것이다. 한국적인 것으로 세계적인 것을 만들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한국의 정체성

저자 탁석산 | 책세상 | 2000.4.27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 과연 한국적인 것이란 게 존재할까? 존재한다면 과연 그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나 근거가 있을까? 그리고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이런 물음에 답하려면, 보편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을 구별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이 책은 그 과제를 풀고자 한국적인 것은 무엇이고 정체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구체적으로 탐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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