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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은 Dec 19. 2023

제대로 해본 사람들이 맘먹고 만든, 오피스 제주 사계점

타고난 센스와 치열한 고민, 집요한 관찰을 이길 수 없는 이유

갑작스런 눈보라에 발이 묶여버린 장소가 이곳인 건 큰 행운이었다. 제주 전역에 눈과 우박이 떨어지던 12월의 어느 날. 동지 무렵 짧은 해는 5시도 채 되지 않아 이내 자취를 감췄고, 서귀포의 작은 마을 사계리는 금세 까만 어둠으로 뒤덮였다. 낮부터 심상치 않던 제주 바람은 항공 스케줄이 지연될 정도의 강풍이 되어 사방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어두워서 운전을 할 수도, 강풍이 불어 걸어나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고립되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을 깨끗이 접고 일찍부터 안에서 작업을 하기로 했다. 공유 오피스에 자리를 잡고, 커피 머신에서 아메리카노를 가져와서, 노트북을 펼쳤다. 그리고 조금 과장하자면 그 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4시간 동안 무엇에도 방해 받지 않고 일에 집중하며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원고와 마음만 먹고 쓰지 못하던 서평을 완성했다. 여행을 포기하고 일로 돌아온 하루였지만, 아주 오랜만에 경험한 순수한 몰입의 상태는 바깥의 여행이 줄 수 있는 어떤 즐거움보다도 더 컸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의 작업으로 여유가 생긴 스케쥴을 정리했다. 그리고 오피스 공간의 구석구석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글은 그곳에서 왜 일이 잘 되었던 건지, 공간을 관찰하고 경험을 회고한 기록이다.


광풍의 밤이 지나고 평화로워진 사계리의 일요일 아침 - iPhone 13 Pro



번아웃 됐던 이들이 만든 공유 오피스

오피스 제주는 노마드 워커의, 노마드 워커에 의한, 노마드 워커를 위한 공간이다. 도시에서 번아웃을 겪은 노마드 워커가 제주로 와서 만든 일할 공간. ‘책상 한자리 빌려주는 공유 오피스가 아니라, 침해 당하지 않는 평화로움과 몰입의 시간을 선물하는 곳’을 추구한다. 첫 번째 공간인 조천점은 제주도의 북쪽에 위치한 제주시 조천읍에 생겼다. 22개의 데스크와 1개의 회의실, 2개의 방음부스가 있는 공유 오피스와 조천읍의 마을 숙소를 연계해 조성한 워케이션 타운은 2019년 당시 제주에서 처음 있는 시도였다고.


제주 북쪽 바다 앞 마을의 조천점 - Fujifilm x100v


2022년에는 서귀포 사계리에 두 번째 지점인 오피스 제주 사계점을 열었다. 좌석 수로만 따져도 조천점의 두 배에 달하는 40석 공유 오피스에 2인 객실 20개로 구성되어 최대 40명까지 이용 가능한, 자체로 하나의 타운인 공간. 여기에 자유로운 네트워킹 모임과 수요 맛집 투어 등 다른 이용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 바당(바다) 요가와 곶자왈 숲 사운드 워킹 등 사계리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프로그램 까지 콘텐츠를 더했다.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직접 운영하는 범위가 늘어나면서 시도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진 듯 하다.


선과 면과 색이 즐거움과 안정감을 주는 사계점의 공간들 - SONY rx100m7



시침질 아닌 박음질로, 촘촘한 고객 여정 지도

오피스는 기본적으로 무인으로 운영 중. 객실 체크인은 SMS 문자로, 이용권 구매는 키오스크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자는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 공간을 이용하는 내내 누군가의 친절한 가이드를 따라가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정보가 이용자의 동선을 따라 적재적소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묻기 전에 안내하고 필요로 하기 전에 제공하는, 공백 없는 무인 가이드는 이용자가 어디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언제 무엇이 필요할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세심하게 관찰함으로써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자 방 안에서 Lo-fi 재즈가 흘러나왔다. 입실 시간에 맞추어 미리 재생해둔 워케이션 플레이리스트. 단순한 제스쳐 하나에 똑같은 방이 그저 예약한 객실에서 '나를 위해 준비된 공간'으로 한 순간에 바뀌었다. 책상 위에는 귤 네 개가 놓여 있었다. 겨울철 제주에 오면 식당이며 카페에서 몇 개씩 쥐여주는 흔하디 흔한 귤이지만 이 네 알은 특별했다. "WELCOME TO O-PEACE JEJU"라는 짧지만 강력한 환영의 메시지 때문에. 이건 누가 뭐래도 타고난 센스의 영역이다.


반가워요! 웰컴 메시지와 귤귤귤귤 - SONY rx100m7


방에서 노트북과 다이어리를 챙겨나와 공유 오피스에 자리를 잡았다. 듀얼 모니터가 셋팅된 자리에 앉았는데, hdmi to c 어댑터를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모니터는 못 쓰겠는데, 자리를 옮겨야하나? 싶었을 때 그 선반을 발견했다. "WORKING TOOLS RENTAL CORNER". 각종 어댑터와 충전 케이블, 모니터 받침대에 키보드와 마우스까지. 있으면 좀 더 편할텐데 싶은 건 그냥 다 있었다. 노트북 주변기기들 사이에 머리끈이 든 통을 발견했을 땐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사람들, 정말 무서울 정도로 진심이었다.


넥가드와 헤어 타이. 스스로 몰랐던 필요까지 파고드는 집요함. - SONY rx100m7


입구 앞에는 키오스크로 셀프 결제하는 무인 매대가 있다. '성선설 자판기'라는 위트 있는 이름을 달고, 칫솔, 치약, 면도기, 마스크, 귀마개, 물티슈에 휴지까지 필요하지만 빠뜨리기 쉬운 필수품을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마침 여행용 칫솔 세트의 치약이 떨어졌던 터라 바로 하나를 구매했다. 눈보라를 뚫고 편의점까지 사러 다녀오지 않아도 되어서 얼마나 안심했던지. 이용자의 시간과 체력을 아껴주는 소소한 배려 뒤에는 재고 관리와 사입의 불편을 감수하고 고객 편의를 제공하고자 하는 운영자의 사려 깊음이 있었다.


착한 사람만 구매할 수 있는 성선설 자판기 - SONY rx100m7



순도를 높이려면 불순물을 제거해야 한다

금속을 가공하는 과정에는 제련과 정련이 있다고 한다. 제련(製鍊)은 광석으로부터 금속을 추출하는 방법이고, 정련(精鍊)은 이렇게 제련한 금속에서 불순물을 걸러내고 순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정제'라고도 한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일하기 편한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제련에 비유한다면, 정련은 그 공간에서 이용자가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방해가 되는 사소한 것들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오피스 제주는 이용자의 몰입이라는 반짝이는 것을 순수하게 정제해낸다.


사실 생산성이란 것을 '높이는 방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사람마다 하는 일의 분야와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공간을 깨끗이 청소하고, 잔잔한 음악을 틀어두고, 참고가 될만한 책을 비치하는 것 정도. 반면에 방해 요소를 '줄이는 방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워케이션 오피스라는 비일상의 공간에서 일상의 일을 할 환경을 갖추는 데는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므로. 노트북과 무선 인터넷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지만, 일을 한다는 것과 일에 몰입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두 이야기다. 


아무리 잘 설계된 공간이라 하더라도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는 툭툭 튀어나와 몰입을 깨뜨릴만한 자잘한 방해 요소가 산재해 있게 마련이다. 콘센트가 어디에 있지?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앗, 충전기를 안 챙겨왔네. 누구에게나 종종 있을만한 아주 사소한 불편의 경험들. 집중에 빠져드는 것, 혹은 빠져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방해하는 틈새마다의 노이즈를 제거할 때 일에 대한 몰입의 순도가 높아진다. 순수한 금속을 만드는 데에는 더 많은 광석을 들이붓는 것이 아니라 불순물을 잘 걸러내는 것이 필요하니까.



'이렇게까지'가 주는 놀라움과 감동

그래서 하루만 이용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 공간을 만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 리모트 워크를 해보았을지, 그 경험을 공간에 녹여내기 위해 얼마나 깊은 고민을 했을지, 그리고 공간을 연 이후에도 실제 이용자의 행동을 얼마나 자세히 관찰해왔을지. 오피스 제주가 만든 공간은 중간 결과물이고, 최종 결과물은 이용자의 일하는 기분과 생산성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피스와 숙소를 이용하는 내내 "이렇게까지 고려했다고?" 싶은, 놀랍고 감동적인 포인트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벌써 식사 시간이네. 밥은 어디서 먹어야하지? 멀리 나가야 하나?
→ 주변 맛집 추천 리스트를 게시해두었다. 도보권 / 차로 10분 이내로 구분해서 정리해둠.


일하던 흐름을 깨지 않고 간단히 요기 정도만 하고 싶다.
→ 캔틴에 식빵과 토스터, 잼과 피넛버터가 준비되어 있다. 커피 무료 제공, 우유 구매 가능.


먹을 걱정은 안 해도 괜찮아! 맛집 리스트와 토스트. - iPhone 13 Pro, SONY rx100m7


평소에 노트북을 오래 쓰지 않던 사람들은 불편할 수도 있겠는데?
→ 듀얼 모니터 좌석에서 키보드, 마우스를 연결하면 데스크탑처럼 작업할 수 있다.


객실에서 일해야 하는데, 책상 말고 침대에서 편하게 일하고 싶다.
→ 벽장 안에 베드 트레이가 있다. 침대 머리맡에는 스마트폰/태블릿 거치대도 있음.


달달한 간식이 땡기는데, 편의점까지 다녀오긴 너무 귀찮아.
→ 캔틴에서 낱개 과자와 아이스크림, 에너지 드링크 구매 가능. 결제는 카카오페이로.


무인 판매대에서 구매한 과자와 치약, 펜. 가격은 5,500원. - iPhone 13 Pro



잘 보낸 하루, 뿌듯한 안녕

하던 일을 마치고 나자 이곳에서의 남은 시간을 최대한 밀도 있게 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노트북을 펼치고 손에 잡히는 일을 하는 대신, 다이어리를 펴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분류했다. 급하고 중요한 일(A), 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B),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C),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D). 그리고 급하지 않다는 핑계로, 사실은 시작하기가 어려워서 미뤄두던 중요한 일들(C)을 했다. 시작만 했을 뿐인데 스스로를 괴롭히던 자책의 긴 그림자를 지워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이 녹기 시작한 사계리를 뒤로 하고 떠나는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산뜻했다. 계절이 바뀌면 이번에는 19시간이 아니라 43시간 갇히기 위해 다시 찾아와야겠다. 함께 몰입에 고립될, 일에 진심인 파티원들을 구해서!


겨울이 지나고 다시 올게! - iPhone 13 Pro




✦ 한줄평 | "잘하는 사람이 진심이기까지 할 때 생겨나는 뾰족한 탁월함"

✦ 추천합니다 | 모든 노이즈를 제거하고 일에만 몰두하고자 하는 개인 혹은 소규모 팀


오피스 제주 | @o.peace.jeju

도시에서 번아웃 됐던 이들이 평화로운 곳에 살고 싶어 제주에 왔다. 자연스런 삶을 어느 정도 회복한 후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잠시 연결을 끊고 먼 곳에 오면 오히려 일도 잘 되지 않을까? 하루의 1/3을 일하면서 보내는데 일할 때도 행복하고 평화로운 공간이 필요하다. 책상 한 자리 빌려주는 공유오피스가 아니라 '침해 당하지 않는 평화로움과 몰입의 시간'을 선물하는 곳을 만들어보자. 그렇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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