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렷한 취향과 무심한 태도의 미학,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완성하는 디테일
"여기는 프라이탁이나 필름 카메라,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못 들어오는 곳이야?" d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기다리던 중, 처음 온 일행이 물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비슷한 톤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비슷한 종류의 물건들을 꺼내놓은 채 흩어져 앉아 있었다. 브랜드가 겹치는 건 예사에, 종종 말투까지도 서로 닮아 있는 하나의 무리. 뚜렷한 취향에는 비슷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이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당연하지. 넌 나랑 같이 있어서 들어올 수 있었던 줄 알아." 목에 필름 카메라를 걸고 손에 프라이탁을 든 내가 대답했다.
고백하건대 D&DEPARTMENT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을 팔로우하는 팬이다. 롱 라이프 디자인과 로컬리티, D&D가 표방하는 가치들을 지지하고 내용과 형식 양면으로 좋아한다. 그런 나에게 d room에 묵으면서 d 스토어의 물건을 사용하고, d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하루는 열 살짜리 아이가 생일 선물로 받은 디즈니 랜드에서의 하루처럼 신나고 흥분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후기에서 전달하는 감상은 객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일 수 없으며, 객관적이고자 노력조차 하지 않았음을 미리 밝혀둔다.
다만 느끼고 얻은 모든 것과 그 이유들은 전부 진짜다. 오히려 좋아하는만큼 매순간의 감각을 최대치로 개방하고 예민한 상태로 경험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사고회로를 더욱 명료하게 들여다 볼 수 있었으므로.
'전하는 가게' D&DEPARTMENT는 지역적 배경을 탐색하는 로컬리티의 관점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쓰여지는 롱 라이프 디자인을 발굴하고 판매하는 상점이다. 단순히 상품 뿐 아니라 생산지의 특성과 생산자의 신념까지, 이 물건이 어디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에 대한 스토리를 중요하게 다룬다. 한국에 생긴 두 번째 지점 D&DEPARTMENT JEJU by ARARIO는 이런 d의 철학과 아라리오 갤러리의 미학, 두 개의 렌즈로 발견해 낸 제주의 디자인을 판매 상품(d 스토어)과 식음료(d 식당), 그리고 숙박 경험(d room)으로 전하고 있다.
d room은 D&DEPARTMENT가 만든 최초의 숙박 공간이다. 창업자이자 디자이너인 나카오카 겐메이는 이 공간에 대해 호텔이 아닌 '호텔 같은 것'을 지향하며, 보통의 호텔이 되어버리지 않을 방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게스트가 제주 사는 친구 집에 온 듯, 편안하고 익숙하게 머물기를 바라며 기획한 공간. d 스토어와 일관성을 주고자하는 의도가 공간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요소들에 반영되어 있다. 싱글룸과 더블룸, 트윈룸 총 13개 객실이 있고, 롱 라이프 디자인 멤버십에 가입한 유료 회원에 한해 숙박이 가능하다. (2022년 3월 기준)
여행지에서 머물 숙소로 호텔보다는 게스트하우스를 선호하는 편이다. 나에게 여행은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전에는 몰랐던 좋아함의 영역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기에, 호텔의 표준화된 깔끔함과 편안함이 주는 효용보다 게스트하우스마다 제각각인 어수선한 흥미로움이 주는 가치가 훨씬 크게 와닿기 때문이다. 거기에 현지인으로서 주는 여행지에 대한 정보와 여행자를 위한 제안들이 놓여져 있다면 금상첨화임은 물론이다.
'친구 집 같은 호텔 아닌 공간'을 표방하는 d room은 게스트하우스를 넘어, 누군가의 집에 초대 받아 게스트룸에 묵는 듯한 경험을 디자인한다. 편한 옷을 빌려 입고, 응접실에서 책을 꺼내 읽다가, 평소 궁금했던 브랜드의 제품으로 씻고 자는 그런 밤. 아는 사람일 리 없는 이 집의 호스트가 왠지 어렴풋하게나마 나의 먼 지인 정도로 느껴지는 건, 뚜렷하게 그려진 그의 취향이 어딘가에서 나의 취향과 닿아 있음을 발견하는 지점들 때문일 것이다.
백미는 전하는 이의 태도에 있다. 나는 이런 것들이 멋지고 좋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모아놓아 봤어. 궁금하면 여기에서 입고, 쓰고, 읽고, 먹어봐도 좋아. 아마 너의 마음에도 들지 않을까 싶은데. 정도의 온도. 갖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취향을 꺼내놓고서, 딱히 어떤 행동이나 결정을 권한 것도 아닌데 내가 스스로 먼저 "이거 저한테 팔아주시면 안 돼요?"라고 말하고 싶게 만드는 전달 방식. 그렇게 무심한 태도로 이렇게 설레게 하면, 요즘 말로 '유죄'라고 하거든요?
취향과 태도가 비슷한 사람이 모인 덕분에 생긴 따뜻한 이야기 두 개. 첫 번째, 체크인할 때 만난 리셉션 스태프 분이 다음날 일정을 묻고 그쪽 동네에서 본인이 좋아하는 곳들을 포스트잇에 적어주셨다. 추천 받은 책방은 그동안 가 본 서점 중 손에 꼽게 마음에 들어 온 곳이었다. 두 번째, 라운지에서 일하던 중 누군가 수줍게 다가와 귤 두 개와 쪽지를 건넸다. 다른 방의 투숙객인 그녀는 귤을 나누어 주고 싶은데 작업을 방해할까봐 말은 걸지 못하고 글을 적었다고 했다. 같은 정도의 민감성과 거리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주는 안정감, 다정했다.
'취향'이 최근의 사회적 현상들을 설명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면서 그에 대한 반감처럼 취향을 주장하는 태도, 혹은 취향이라는 말 자체를 스노비즘(snobbism)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개인이 취향을 갖는 일은 단순히 감성, 소위 '갬성'의 영역이 아니다. 하루에도 수 백, 수 천 개의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가 생겨나는 선택 과잉의 시대에, 개인의 필요와 선호에 따라 일관되게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한 자신만의 기준을 갖는,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이다.
일하는 사람으로서 취향이 갖는 쓸모 또한 분명하다. 좋은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건 결국 다양한 카테고리에서 잘 된 레퍼런스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고, 좋은 레퍼런스는 새로운 프로젝트의 시작에서 유효한 방향성을 빠르게 찾는 나침반이 되기도, 중간 중간 결정이 필요한 시점마다 근거로 믿고 갈 디딤돌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특히 일반적으로 '기획'이라고 불리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취향은 기획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는 하나의 자본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가득 채워진 이 공간이 모두를 위한 워케이션 장소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기획과 디자인, 특히나 경험을 다루는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에게는 영감과 공부가 되는 공간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약 단기적인 아웃풋을 내야할 때가 아닌 장기적으로 인풋을 채워야하는 시기라면, 이곳에 말 그대로 널려있는 레퍼런스를 그저 자유롭게 들여다 보고, 발견하고, 기록하는 시간들이 온전히 자신만의 자산으로 치환될 것이다. (단기적인 아웃풋도 불가능하지 않다. 새벽까지 4천 자 짜리 글 한 편의 초고를 완성했으니까. 하면 다 된다.)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공간인지를 따져볼 때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를 본다. 1) 필요한 만큼 오래 머물러도 좋은 장소에 2) 적당한 높이의 책상과 의자, 3) 충분한 수의 콘센트가 있고 4) 무선 인터넷이 불편 없는 속도로 제공되는지. 그 외의 것들은 있으면 좋은 정도의 플러스 알파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d room은 이 '플러스 알파'의 영역에 사려 깊은 제안들을 세심한 디테일의 형태로 두고 있었다.
라운지 : 공간이 적막하지 않게 흐르되, 방해되지 않는 수준의 음악 볼륨 셋팅 / 책상과 의자를 놓은 자리와 소파와 테이블을 둔 자리, 조명이 드는 밝은 좌석과 어둡고 아늑한 좌석이 섞여 있는 플로어 배치 / 궁금해진 책과 음반, 그림과 가구에 이미 얹혀 있는 소개글과 안내 문구
객실 : 일문판이라 읽을 수 없던 d travel 매거진에 붙어있던 한글 번역 페이지 / 제주의 다양한 먹을거리와 d 라거가 구비된 스낵바 / 스낵바에 비치되어 있는 상품의 생산지와 정보를 표시해 둔 제주 지도 / 프릳츠 커피, 이솝 샴푸와 클렌저 등 d 스토어 추천 브랜드로 구성한 어메니티
부대 서비스/접객 : 마음에 든 어메니티와 스낵을 추가로 구매할 수 있게 구비해둔 상품 매대 / 다소 어두운 객실 내 발뮤다 랜턴 대여 서비스(리셉션에서 수령) / 오픈시간 전의 d 식당에서 한적하게 즐기는 제주 제철 아침식사 / 리셉션 스태프가 직접 공간 소개와 이용 안내를 전달해주는 체크인 절차
그 밤으로부터 3개월, 그 사이 내가 기획했던 프로젝트는 이런 것들이었다: 공예품 큐레이션 세트 구성, 공간 서비스 경험 디자인, 로컬 브랜드 패키지 디자인, 워케이션 홍보 영상 연출. 결과물은 다르지만, 기획자로서 전하고자 하는 것의 맥락을 정제해서 시각적인 형태로 풀어가는 작업이라는 점은 동일했다. 수 많은 고민의 시간을 우려낸 과정과 결과에 내가 그날 밤 고객으로서 경험한 것들, 특히 '확신을 보이되 부드럽게 전하는' 미학적 커뮤니케이션에서 깨달은 것들이 녹아있음을 스스로 발견한다. 기획자에게는 좋은 인풋이 필요하다.
책방을 추천해주었던 리셉션 스태프 분께 명함을 받아두었다가, 서울로 돌아와서 메일로 감사 인사를 보냈다. 다정한 답장이 도착했고, 두 달 뒤 우리는 다시 제주에서 만났다. 나와 똑같은 색상, 똑같은 기종의 아이폰을 쓰는 그녀는 나의 첫 번째 제주 친구가 되었다. 다시 d room에 묵는 날은 정말 친구네 집에서 자는 날이 되겠다. 알 수 없는 인연, 흥미로운 인생.
✦ 한줄평 | "같은 시간을 다른 밀도로, 공간이 아닌 시간을 사는 경험"
✦ 추천합니다 | 글을 쓰거나, 디자인을 하거나, 좋은 레퍼런스로 영감을 채우고 싶은 개인
호텔 같기도, D&DEPARTMENT의 쇼룸 같기도, 제주에 사는 친구의 집 같기도 한 감각으로 묵을 수 있는 곳. 모든 객실은 D&DEPARTMENT에서 제안하는 롱 라이프 디자인 상품과 유즈드 가구로 구성되며, 룸웨어와 식기는 물론, 미술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품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전통과 역사가 축적된 공간 d room에서 롱 라이프 디자인의 가치를 더 가까이 체험하고 일상으로 돌아가 그 여운을 내 일상에 적용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