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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상샬롬 May 08. 2020

딸기농장 사모님에서 다시 전업주부로-나의 시작  

진주에서 경기도로 다시 시작

  결혼 15년 차 동갑내기인 우리 부부는 서울 토박이들이다. 서울에서 자라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살다가 남편의 부서 발령으로 경기도에서 살게 되었다.


  난임으로 6번을 유산하는 등 6년을 고생하다 신기하게도 경기도로 이사하자마자 시도한 마지막 5차 시험관성공으로 귀하고 소중한 딸내미를 만났다.  


  그러다 우리나라에서 1,2위를 다투는 대기업에서 10년도 넘게 다닌 남편은 직장에서 희망퇴직을 받는다는 소식에 한 두 달을 고민하다가 마흔 초반의 나이에 희망퇴직을 하였다.


  새벽부터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현장관리업무.  남편은 앞으로 얼마나 다닐지도 모르겠고, 비전도 없고, 일은 잘하지만 윗 상사에게 따박따박 할 말 다하고 싸바싸바도 못하는 성격의 남편을 이쁘게 볼 리 없는 곳.  그리고 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보내고 이쁘게 자라는 모습을 함께 보고 느끼고 싶다는 것이 희망퇴직 이유였다.   

  

  그렇게 희망퇴직을 하고 두세 달 쉬면서 앞으로 무엇을 할지 고민을 하다가 지인의 소개로 귀농을 결정하게 되었다.

  

  귀농 아이템은 바로 딸기.

눈이 거의 오지 않고 항상 따스한 편이고 자연재해 피해가 많이 없는 곳 바로 경남 진주에서 딸기농장을 시작하게 되었다.  

  

  진주라는 지역명을 듣고 처음에는 정확히 어디쯤 있는 건지도 몰랐다. 통영은 확실히 아는데  진주는 어디쯤인지, 많이 들어는 봤는데 말이다.


  그런 진주라는 곳으로 내가 내려가 살게 될 줄이야.  사람일은 어찌 될지 정말 알 수 없는 여정이다. 암튼 진주에서 통영까지는 30분도 안 걸린다. 이 얘기를 하면 다들 "아 거기? 그렇게 멀어?"라며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귀농한다는 소리를 듣고 친구들과 지인들은 나보고 대단하다고들 했다.  잘 나가던 대기업을 다니던 남편이 그만둔다고 할 때 왜 안 말렸냐, 귀농하러 간다는데 안 무섭냐,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데 외롭지 않겠냐, 남편만 내려가면 되지 그 먼 곳까지 같이 꼭 가야 하냐는등의 얘기들을 했다. 그런데 나는 남편이 하는 일에 그냥 믿음이 생겼다. 평소에도 무책임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함부로 말을 내뱉거나 계획하지 않 일은 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보다 아내인 내가 남편을 제일 먼저 믿어주고 힘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떤 일이 닥치든 함께 해나가면 잘될 거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렇게 경기도에서 진주로 이사간지 3개월. 남편의 딸기 농장일도 착착 잘 진행되고 나와 6살 된 딸내미도 진주에서 적응이 슬슬 되기 시작하던 어느 날 나는 목감기가 심하게 걸려 2,3주 고생을 했다. 약 먹어도 낫지 않고 몸에 힘도 없고 너무 피곤하고 해서 안 되겠다 싶어 다른 큰 병원에 가보자 생각을 하다가 느낌이 좀 이상했다. 더 이상했던 건 평소 술을 못하는 내가 남편이 농장에서 돌아올 때 전화를 해서는 캔맥주를 서너 개씩 사 오라 했던 기억이 났다.

 

  에이 아닌데. 설마. 아닐 거야. 난 임신이 안 되는 남임이라 했는데 그래서 피임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그래도 또 설마설마하며 확실히 아니라는 걸 확인해보고 병원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약국에 가서 아주 오랜만에 임신테스트기를 샀다.  몇 년 만에 보는 임테기인지. 어렵게 가진  임신을 확인하고 6년 만에 사보는 임테기였다.


  약국을 다녀와서 아침 9시쯤, 집에 오자마자 화장실에 가서 소변검사를 했다. 그런데 헉! 바로 진한 두 줄이 딱 나타났다. 세상에나 만상에나 오 마이 갓.


'내가 임신이라니

그것도 자연임신이라니

마흔 넘은 나이에 임신이라니 그것도 둘째라니

감기약도 먹었는데

2주 전에 건강검진 다하고 초음파에 엑스레이까지 찍었는데

임신이라니'


  덜덜덜 떨리면서 기쁨보다 걱정. 불안.

초조함이 생겼다.  딸을 힘들게 가졌고 다시 또 유산될까 싶어 열 달을 누워 지내며 지켜내 겨우 힘들게 만났는데 둘째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거실에 있던 남편에게 바로 달려가 임테기를 보여주며 산부인과에 빨리 가자고 했다.  


 두둥!

 임신 5주 4일.

 

  결혼 12년 만에 그것도 자연임신으로 둘째가 생겼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참 신기하게도 다른 지역으로  또 이사를 가자마자 아기가 생긴 것이다. 흠 이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쿨럭. 흐흐


  암튼 자연임신을 했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았다. 다낭성에 배란도 불규칙하고 자궁내막증에, 나팔관도 한쪽이 없는 내가 자연임신을 하다니.  그날부터 입덧을 시작해서 임신 4개월까지 울렁대고 토하는 입덧을 했다. 첫째도 입덧이 심했는데 둘째는 더 심했다. 그래도 입덧을 해야 건강하고 튼튼한 아기라는 말을 난 믿으니 그냥 다 감사하 기뻐하며 견뎌냈다.

  

  그러다 임신 5개월에 태반이 내려가 출혈이 생겨 일주일을 입원했다가 정상으로 되고 임신 6개월에 자궁경부가 자꾸 짧아져 자궁문이 열린다며 무조건 누워서 안정을 취해야 한대서 3개월을 병원에 입원해서 임신 9개월째 우리 둘째 아들을 낳았다. 한 달 빨리 태어났지만 3킬로로 건강하고 튼튼하게 태어났다.


 그렇게 기적 같은  둘째도 태어나고 귀농해서 첫 번째로 수확하는 딸기도 성공해서 아주 맛있게 잘 수확을 하고 판매하여 수입도 생겨 먹고살만하였다.

   큰딸이 유치원을 다니면서  유치원 버스 등 하원 때에 만나는 아파트 엄마들과도 친해져서 가족같이 지냈고 그 엄마들은 나를 별칭으로 딸기농장 사모님이라 불렀다.

  아이들도 나도 다 잘 지내고 딸기농장도 잘되는 등 모든 게 다 잘되나 싶었는데 귀농한 지 2년 차에 남편이 농장에서 일을 하다 허리를 삐끗했다. 땅에 주저앉아 못 일어날 정도로 힘들어했는데 병원에 가보니 디스크가 터졌단다. 다행히 수술까진 아니고 간단한 시술을 받고 2주 정도 입원 후 집에 돌아왔다. 의사 선생님은 앞으로 농사일은 절대 하면 안 된다며 다시 디스크에 이상이 생기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남편은 1년 반을 집에서 쉬면서 허리가 조금씩 좋아졌고 딸기농장일은 더 이상 할 수가 없어 정리를 했다. 그래도 남편과 함께 집에 있으면서 둘째를 공동 육아할 수 있어 정말 좋았다. 엄마인 내가 나이도 많고 여기저기 아프고 특히나 딸 키우다 아들을 키우려니 어휴 열 배는 더 힘든 듯했지만 역시 둘째는 사랑이던가. 뭘 해도 이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1년 반을 쉬면서 모아둔 돈도 다 바닥이 나고 남편도 이제 슬슬 일을 해야 할 때가 되자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진주는 아주 작은 소도시이고 생산도시가 아닌 소비도시라 진주에서 남편의 일자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좌절하고 우울해있던 남편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남편의 친한 선배였는데 자신이 개인적인 사정이 있으니 자신의 일을 잠깐 도와줄 수 있겠냐는 제안이었다.  남편은 흔쾌히 바로 승낙을 했고 2,3주간 경기도로 올라가 선배의 일을 했다. 그리고 선배는 사정이 있어 이직을 하면서 남편은 그 직장에 정규직 사원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진주에 4년을 살고 다시 경기도로 올라오게 되었다.


  지금 경기도로 올라와 산지 6개월째이다. 양가 부모님들이 모두 경기도에 살아 자주 볼 수 있어서 좋고, 남편과 나의 친구들도 모두 수도권에 사니 좋고 남편도 직장을 들어가 일을 할 수 있어서 좋고, 다 좋고 감사할 뿐이다.


  다시 경기도에서 시작된 나와 남편의 도전은 이제부터인 듯하다.

앞으론 더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펼쳐질까 궁금하다.




남편이 첫 수확했던 딸기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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