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늙고 싶다.
‘젊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나에게 '젊다'는 말 앞에 '아직'이라는 말을 붙이거나, '젊어 보인다'라는 애매한 말을 남긴다. 젊을 때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아니까 '너 젊다'라고 말 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한테 '너 동안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듯이.
아마 '젊어 보여요'라는 말은 '당신은 늙었네요'와 같은 의미로 해석하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늙고, 결국은 죽는다.
하지만 늙으면 늙을수록 아직 늙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싶다.
'늙는 게 뭐 어때서!'라며 생각은 하면서도, 나는 주름을 펴기 위해 효과도 없는 화장품을 열심히 바르고, 흰머리를 가리기 위해 염색을 한다.
20대 때는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의 모습을 보면 절대 도달할 리 없는 먼 나라 외계인같이 생각됐다. 노인은 원래 노인으로 태어난 것처럼 여겼다.
마흔을 넘기고 나니 노인을 보면 내가 대입된다. 이제야 나도 노인이 된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요즘 들어 부쩍 나는 어떤 노인이 될 것인지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다.
유은실의 동화 <마지막 이벤트>에 나오는 표시한 할아버지는 잘 늙은 걸까? 잘 못 늙은 걸까?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사업 실패로 재산을 탕진하고, 술 먹으면 주사로 자식들과 부인까지 고통 속에 살게 했던 인물이다. 사기까지 당하는 바람에 오갈 데가 없어진 표시한 할아버지는 아들네 집에서 눈치를 보며 살게 된다.
표시한 할아버지의 아들은 아버지와 한집에 살면서도 말도 한마디 섞지 않을 정도로 마음속에 원망을 켜켜이 쌓아 두고 있다. 부인마저도 막내를 결혼시키고 이혼장을 내밀었고, 젊고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 재가를 했다.
표시한 할아버지의 아들은 아버지의 방탕함으로 어머니까지 잃었다는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정을 전혀 느끼며 크지 못했는데, 늙은 아버지를 부양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생판 모르는 남을 부양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일지도 모른다.
마땅히 불쌍해 보여야 하는 표시한 할아버지는 이 동화에서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고 경제적 능력도 전혀 없는 표시한 할아버지가 불행하거나 불쌍해 보이지 않는 건 자신을 끔찍하게 좋아해 주는 손자 ‘표영욱’이 있어서다. 영욱이는 할아버지의 검버섯과 주름의 느낌까지도 좋아하는 정말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아이이다. 할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손자와 한 방을 쓰다가 삶의 마지막 날 손자와 손잡고 눈을 감는다. 하나도 안 불쌍한 할아버지다. 오히려 부럽기까지 하다.
표시한 할아버지는 경제적 능력만 빼고는 내가 바라는 노년상에 가깝다. 꼿꼿한 허리도 가지고 있고, 첨단 기기도 능수능란하게 다룰 만큼 유연한 사고를 할 줄 알고, 무엇보다 죽기 전날까지도 자유롭게 거동하다가 잠자면서 죽은 것이 가장 부럽다.
어느 자식 하나 임종을 지켜주지 못했지만, 죽음의 곁에 자신을 최고라 여겨주는 손자가 있었다는 것만으로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평소 소소한 이벤트를 즐겨하던 표시한 할아버지는 <마지막 이벤트>로 여자 수의를 준비했다. 여자 수의와 함께 편지도 있었다. 편지에는 다시 태어나면 여자로 태어나 좋은 부인과 엄마가 되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무친 후회를 이렇게 유쾌하게 보여 주는 것이 이 동화의 백미라 하겠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마지막 유언 이벤트를 따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두 우왕좌왕했지만, 할아버지의 이벤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평소 콤플렉스였던 검버섯을 포토샵으로 모두 없앤 영정 사진에, 자신이 입을 여자 수의까지 준비한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의연하기까지 하다.
연이은 사업 실패와 황혼이혼으로 부인에게도 자식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구차한 삶을 살았던 어느 노인의 장례 이야기가 동화 속에서 눈물과 웃음으로 잘 버무려졌다.
단 한 명에게라도 진실한 사랑을 받는 사람은 빛이 난다. 영욱이가 할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의 검버섯까지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까? 나의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장례식장에는 누가 올까? 내 죽음을 누가 가장 슬퍼할까? 죽으면 아무 상관도 없어질 부질없는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잘 늙은 노인은 어떤 모습일까?
늙어도 외모가 고왔으면 좋겠다.
하얀 백발을 염색으로 감추지 않고 드러내도 추레해 보이지 않는 외모에 허리는 꼿꼿했으면 좋겠다. 좋은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것이 선한 인상으로 드러나면 좋겠다. 백발이 되어도 잡티 없이 좋은 피부를 유지했으면 좋겠다. 꾸준한 운동으로 남들이 보기에도, 내가 생활하기에도 불편함 없는 몸매였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가 소망하는 노인의 모습이다.
내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경제력이 있으면 좋겠다.
경제력은 어쩌면 웰다잉 (well-diing)의 가장 중요한 조건일지도 모른다. 젊을 때는 모두가 빛났지만, 노인은 돈을 들여도 빛나 보이기 힘들다. 그래도 돈이 없는 것보다 돈이 많을 때 빛나 보일 가능성이 높다.
나이가 들어서 일을 안 해도 될 만큼의 충분한 부를 축적하지 못한다면 표시한 할아버지처럼 자식들의 짐이 되어 눈치를 보게 될 게 뻔하다. 자식 도움 없이 어떻게든 살아간다 해도, 넉넉하지 못한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의 마음은 편치 않을 것이다. 부모 걱정 말고도 얼마나 할 걱정이 많은 세상인가.
나이만큼의 지혜가 생겼으면 좋겠다.
늙은 나와 이야기했을 때 답답해하지 않고 들어줄 만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노인이 되면 좋겠다. 나이가 들수록 더 자기만 생각하고 서운한 것만 기어이 찾아서 늘어놓는 심술쟁이 아이 같은 노인은 되고 싶지 않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자신이 가진 것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도 소소한 행복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노인이 되었을 때도 ‘할 일’이 있으면 좋겠다.
수입이 발생하는 일이 있으면 좋겠지만, 수입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내가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취미가 있으면 좋겠다. 화초를 가꾸거나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무엇이든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다. 지금 내 취미는 독서와 글쓰기인데, 노인이 되어서도 이 취미를 즐길 수 있도록 건강관리를 잘해야겠다. 지금도 눈이 침침하고 시력이 좋지 않은데 100세까지 써먹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할아버진 죽어서도 인기가 없구나’(p. 98) 영욱이는 장례식장에 놓인 화환들을 다른 장례인들과 비교하며 마음 아파한다. 영욱이의 존재는 할아버지에게 장례식장에 놓인 수많은 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 나도 이런 손자를 이 생애에 만나고 싶다. 아직 철딱서니 없는 아들, 철은 잔뜩 들었으나 자기 자신을 챙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딸. 이들이 나에게 이런 손자를 줄 수 있을까?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