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을 넘은 아이

어른이 되어서도 동화를 읽는 이유

by 나로


방송에서 '미투'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희롱을 당하고, 폭행을 당하고, 성적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아무 말 못 하며 당당한 가해자를 보며 숨죽여 살던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냈다. 말할 수 있는 그녀들의 용기가 너무나 놀라웠다.

나도 성적 수치심을 참고 참다가 결국 사회에 첫발을 디뎠던 회사를 1년 만에 그만둔 경험이 있다. 같은 기분을 느낀 여직원끼리 성토하며 위로할 뿐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회사를 그만둔 지 2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그 회사가 있는 곳으로는 지나가기도 싫다. 희롱하며 이죽거리는 상사의 면전에 한마디 대꾸도 못한, 못나고 나약한 내가 자꾸 생각 나서다. 지금이라면 따귀라도 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는 한마디 들으면 얼굴만 벌게질 뿐 아무 말 못 했다. 그게 재미있는 놀림거리가 되어 또 상사는 농담이랍시고 야한 소리를 내 면전에 아무렇지 않게 뱉어냈다. 자기가 얼마나 강한지, 자기 부인과의 잠자리가 얼마나 뜨거운지 딸 뻘되는 여직원에게 말하던 그 인간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을까.

내일 눈을 뜨면 회사를 가야 된다는 생각에 울면서 잠이 들기를 반복하다 나는 결국 사직서를 냈다.

입사한 지 1년 만이었다.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돈도 많이 주는 그 좋은 회사를 왜 그만두냐'라고 했다. 그 이유를 '나랑 안 맞는 회사라서.'라고 말했다.

상사의 성희롱이 심했다는 이유로 그만뒀다고 말하기에 부끄러웠다. 나 자신한테 부끄럽고, 다른 사람한테 부끄럽고, 단번에 박차고 나오지 못하고 1년이나 견뎌낸 스물다섯 내 모습이 수치스러웠다.


나는 그렇게 바보처럼 아무 말 못 했는데, 어느 날 용기 있는 여성들이 텔레비전에 나타났다. 그녀들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그 놈'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여자들의 용기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저렇게 해야 됐던 거구나. 내 잘못이 아니었구나. 나는 용감한 그녀들을 보며 내 마음 한 구석에 단단한 돌멩이처럼 걸려 있던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담을 넘은 아이> 같은 용감한 여자 아이가 나오는 동화를 어릴 적 많이 읽었다면 나는 좀 더 용감한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이렇게 용감한 어린이가 나오는 동화를 좋아한다. 동화 속 어린이 주인공은 대부분 용감하다. 처음에는 용기가 없는 아이였지만 결국은 용기를 내고 비틀린 어른에, 또 세상에 맞선다. 그런 동화 속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른인 나는 배우고 위로받는다.


<담을 넘은 아이>의 주인공 푸실이었다면 상사가 모욕적인 언사를 했을 때 참지 않고 어떻게든 자신의 생각을 말했을 것이다.


푸실이는 빚을 갚기 위해 대감집 손주의 유모로 간 엄마를 대신해 남겨진 남동생과 갓 태어난 여동생을 돌보게 된다. 젖동냥을 다니고, 집안 살림을 하고, 끼니를 만들어 내기 위해 산나물을 캔다. 그리고, 산에서 주은 '여군자전'이라는 책을 읽으며 글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조선 후기의 철저한 신분 사회에서 비천한 신분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극복해 나가는 어린이의 모습은 큰 울림이 있었다.


부모가 버린 갓난 동생을 지키기 위해 용감무쌍한 행동을 감행할 때마다 조바심이 나면서도 후련했다. 어른도 하지 못하는 일을 어린아이의 몸으로 꿋꿋하게 이겨내는 모습은 안쓰러우면서도 기특했다.

꼭 다시 태어나라. 그때는 이 어미의 태가 아니라 양반님댁 귀한 마님 태에서 태어나라. 한준 도련님처럼 태어나라. 어머니는 계속 흐느꼈다.
“이깟 게 뭐라고 귀손이를 때려? 게다가 우리 주제에 서책이 가당키나 하니? 네가 이런 거나 읽으니 괜히 간이 커져서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게다.”
귀손아, 접때 누나가 때려서 미안해.
아기야, 지금 뭐하니?
젖은 배불리 먹고 있니?
언니 소원은 아기가 젖을 배불리 먹는 거야.

대감집 손주 유모로 떠나 버린 엄마를 대신해 갓난 동생을 키우는 푸실이의 소원은 '아기'가 젖을 배불리 먹는 거다. 모성과 부성을 뛰어넘는, 동생에 대한 언니의 사랑에 가슴이 뭉클하다.


국가와 사회가 세워 놓은 굳건한 담을 넘는 용기 있는 푸실이의 이야기를 읽는 어린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될 것 같다.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에 있다면, 용감한 어린이가 나오는 동화를 읽어보면 좋겠다. 동화 속 어린이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몫을 감내하면서 비틀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한다. 그 모습을 보며 어린 날 나를 만나기도 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아이보다 못한 내 모습을 보기도 한다.


몽글몽글한 위로 속에 용기를 배우고 싶은 어른에게 <담을 넘은 아이>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