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미술과 친해져볼까요?
살아갈 힘을 되찾는 곳, 원주 뮤지엄산 (MUSEUM SAN) 에서 전시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뮤지엄산의 지난 그리고 지금의 전시들, 그 이야기들을 아카이브 해두고자 합니다.
원주 뮤지엄산(Museum SAN)에서 새로운 전시를 시작합니다. 뮤지엄산의 방대한 소장품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기획 전시로 <경계에서 (Borderless)>라는 타이틀 안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3인을 소개합니다. 박래현, 박생광 그리고 남관은 모두 일제 식민지 시기에 태어나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 미술에 최초로 접속한 세대입니다. 미술 교육 기반이 미약했고, 서구 미술 역시 일본을 경유해 제한적으로 수용되던 시대의 조건이 그들의 출발 지점이었지만, 해방과 전쟁, 근대화를 거치며 세 작가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각자의 예술적 지평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한국과 세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길을 내고, 고유의 조형 언어를 만들어 낸 이들이 작품으로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들어보려 합니다.
우향 박래현은 한국 화단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입니다. 오랫동안 예술가 박래현보다는 천재화가 운보 김기창의 아내로 불려왔지만, 시대를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아냈습니다. 결혼과 전쟁, 여성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제약 속에서도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며, 당시 드물었던 여성 화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지요.
1950년대 전쟁의 여파로 미술 재료가 귀했던 시기에도 2m가 넘는 대작에 몰두하며 일본 화풍에서 벗어난 새로운 한국화의 길을 모색했고, 1960년대 남편과 함께 참여한 해외 순회전을 계기로 당시 국제 화단의 주류가 되었던 추상 회화에서 큰 영감을 받습니다. 또한 유럽과 아프리카 등 세계를 여행하며 고대 문명의 유물을 접하고, 그 장식성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선보이게 됩니다. 판화의 다양한 기법을 배워, 이를 회화로 확장하며 후기 작업에서 중요한 매체로 활용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박래현의 작품은 회화적 구성 위에 직조적 감성을 더해, 캔버스가 마치 천처럼 촘촘히 짜여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녀의 작업은 전통적 이미지와 현대적 감각, 여성 작가의 삶과 예술적 실험이 공존하는 드문 텍스트로 남아 오늘날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박생광은 불교적 상징과 민속적 이미지, 오방색을 중심으로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독자적 화풍을 구축한 작가입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근대 미술을 접했고, 이 시기를 지나며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몰두하게 됩니다.
박생광의 작품은 단순히 전통 소재를 다루는 것을 넘어, 색과 구조를 통해 전통을 추상화하는 것에 목표를 둡니다. 화면 가득 원색을 강렬하게 병치하여, 한국적 주술성과 신화적 서사를 현대적 회화로 재 탄생시켰고, 삼국시대 고분도 벽화, 무속 신앙 등에서 가져온 상징적 이미지들은 화면 가득 에너지를 품으며 작가가 평생 탐구한 한국적 정체성의 회화적 번역을 완성해 갑니다. 경주의 유적지를 답사하며 스케치했던 불교와 민화 속 도상들로 화면을 구성한 <토함산 해돋이, 1979>는 화려한 오방색 구상의 서막을 여는 그의 대표작입니다.
남관은 일본과 유럽을 오가며 쌓은 다양한 시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동양의 공간 감각과 서구 추상의 원리를 하나의 화면 안에서 자연스럽게 결합한 작가입니다. 세계적인 미술평론가 가스통 디일로부터 ‘동서양 문화의 어느 일부도 희생시키지 않으며 두 문화를 융합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예술가’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1966년 프랑스 남부 도시 망통에서 열린 국제 비엔날레에서 작품 ‘태양이 비친 허물어진 고적’으로 당시 피카소와 장 뒤뷔페를 제치고 대상을 수상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프랑스가 사랑한 화가’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도 이 때문이죠.
남관의 작품은 대부분 동양의 정신과 오래된 것을 소재로 삼았으며, 한자가 연상되는 기호적 형태를 배치했으나, 구체적인 의미를 갖지는 않는 문자 추상으로도 유명합니다.
<삐에로의 축제>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문자의 형태를 변형하여 율동하는 사람을 표현하였습니다. 밝고 가벼운 색채를 주된 톤으로 하여 환상적인 느낌을 주며, 등장하는 삐에로는 남관의 말년작을 특징지을 수 있는 주요한 소재로 전쟁 등 암울한 기억에서 벗어나 보다 유희적 경향성을 띄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떤 예술은 하나의 시대를 넘어섭니다. 여러 세계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세 작가-박래현, 박생광, 남관의 여정은 이분법적인 구도의 대립적 틀을 넘나들며 새로운 것을 재구성하는 독특한 예술적 위치를 보여줍니다.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지역성과 보편성이 끊임없이 맞닿아 흘러가는 이 전시는, 결국 경계 없음(Borderless)이라는 오늘날의 시대정신과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요
전시명: 뮤지엄산 소장품 다시보기 | 경계에서 <Borderless>
기간: 2025. 12. 13(토) – 2026. 3. 15(일)
장소: 뮤지엄산 청조갤러리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오크밸리2길 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