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세 미키오, <산의 소리>(1954)
태초에 하늘과 땅 사이는 휑하게 비어 있었다. 사람들은 비어 있는 너른 곳에 벽을 세우고 지붕을 얹어 공간을 만들었고 그 안에 자신의 존재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유명 가수의 콘서트 장에서 뿜어낸 열기, 광장을 가득 재운 촛불 같은 것들로 공간을 재웠다. 또 어떤 이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물들을 공간에 펼쳐놓고 자신을 드러냈고, 어떤 이들은 타인을 배제시키고 혼자 남기 위해 공간을 활용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이 공간에 사람과 사람, 그들의 관계를 넣어 두었다.
그가 1954년에 발표한 <산의 소리>의 주인공 오가타 신고는 중견기업의 간부로 , 같은 회사에 다니는 아들 슈이지 부부와 도쿄 인근 카마쿠라에서 함께 살고 있다. 아들 슈이치는 늦은 밤까지 정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며느리 키쿠코를 냉랭하게 대하고 있다 딸 후사코도 사위와 사이가 좋지 않아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찾
아오는 일이 잦다.
이들은 일본에서 흔히 불 수 있는 목조가옥에서 살고 있다. 일본은 습한 날씨 때문에 보온보다 통풍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래서 신고의 집도 여느 집처럼 너른 창과 문으로 외부와 쉽게 연결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하지만 관객이 보는 집은 어쩐지 갑갑하다. 정원과 연결되는 유리문의 반은 불투명하게 처리 되어 있고 그 바깥엔 틈 하나 없는 나무 문짝까지 달려있다. 미닫이문이 있지만 기역자 형태의 집 안쪽(거실과 부엌을 연결하는 복도 쪽은 빛이 잘 들지 않는다. 문이 닫히면 금방 깜깜해지는 신고의 집은 투명한 유리장문이 달려 있어 훨씬 밝게 표현되었던 내연녀 키누코의 집과 대조적이다 키누코는 룸메이트 이케다와 내연남을 함께 만나고 속이야기도 나눌 정도로 가까운 반면, 어두운 분위기와 플랫한 조명으로 표현되는 집에서 신고의 가족들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특히나 이 가족에게 문은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열 수 있으나 열 수 없는 ' 단단한 벽으로 존재한다 후사코의 딸인 사토코가 항상 문 밖에 서 있는 이유도 이 것이다 사토코는 후사코가 허락할 때만 문 너머로 들어설 수 있고, 때로는 그녀의 명령에 따라 방을 나서야 한다. 그럼으로써 후사코는 아빠를 닮은 사토코에 대한 거리감을 보여준다. 문 너머에는 이 집 아들 슈이지도 서있다. 그가 집에서 (직접) 여는 문은 현관문뿐이다. 그 외의 공간에서는 그저 '존재함'으로써 가족과 적극적으로 소통하지 않으려는, 거리감이 있는 슈이지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미닫이문을 열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는 인물이 시아버지 신고와 며느리 키쿠코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키쿠코는 부엌과 거실, 방과 욕실을 포함한 집안 곳곳을 다닌다. 그녀는 차가운 남편 대신 다른 가족들과 소통하며 힘을 얻길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받아 주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인물이 신고다. 신고 역시 키쿠코가 있는 공간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이러한 두 사람의 동선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소통에 대한 의지와 연결되어 있다. 이 의지는 나중에 엔딩 시퀀스의 공원으로 확장된다 그토록 많은 문을 열었으나 정작 자신의 방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던 키쿠코는 어두운 집을 나와 공원에 섰다. 태초의 그 때처럼 넓고 비어있는 공간이다. 막힐 것 없는 그 공간은 새로운 관계, 새로운 소통을 시작하려는 키쿠코와 신코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마지막에 키쿠코와 신코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문을 열었는가, 그 문 너머에 있는 가족에게 다가섰는가 —
매번 찾아와서 자기 맘을 몰라준다 속상해하던 후사코문 영화 후반부가 되어서야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 키쿠코가 친정에 간 후 저녁상을 차릴 때다. 다른 방에 있던 후사코가 그릇을 들고 부엌과 거실을 오갈 때, 시금치를 안 먹는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할 때 그제야 가족은 그녀와 대화를 시작한다 한 걸음 내딛을 용기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아 보인다.
-17년에 쓴 글을 찾았다.
지금 보면 얕은 글인데, 이때 그런 생각을 한 내가 기특해서 남겨둔다.
<산의 소리> (1954)
감독: 나루세 미키오
주연: 하라 세츠코, 우헤하라 켄, 야마무라 소우, 나카오카 테루코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