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의 성 라퓨타

상승의 욕망과 하강의 순리로 그려낸 비행 <지브리 애니메이션② >

by 말랑말랑
image.JPEG?type=w966


요즘에야 vod, 스트리밍 등의 다양한 서비스가 싸거나 공짜로 돈 없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콘텐츠들을 제공해 주지만, 어린 시절 우리 집 TV에 콘텐츠를 제공해 주는 창구는 채널 몇 개 되지 않는 가장 저렴한 케이블 방송과 비디오테이프 재생기 하나 뿐이었다. 그 집에서 살았던 내가 그것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좋아했다는 것이 참 비극이었다.

당시 내겐 주말에 아버지를 몇 시간이고 졸라 비디오방에서 1000원에서 1500원 정도의, 아버지의 검열과 취향을 통과할 만한 비디오 정도가 가장 새로운 콘텐츠 창구였다. 그래서 방학 전후나 등에 학교에서 틀어주었던 비디오 영화들도 내게 굉장히 소중한 추억이었는데 내가 처음 접한 지브리 첫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도 그 시절 학교에서 틀어준 비디오로 처음 접했다. 그래서 내 첫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하울도, 나우시카도 아닌 비디오로 접한 라퓨타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지브리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던 이유는, 소년 만화에 흠뻑 빠져있던 내가 처음 접한 작품이 지브리 영화 중 당시 내게 가장 익숙했던 이야기 구조의 ‘천공의 성 라퓨타’였던 덕이지 않나 싶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우여곡절 끝에 나우시카를 세상에 소개시킨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가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름으로 제작한 첫 영화이다.(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오프닝에는 아직 지브리 마스코트 토토로가 등장하지 않고, 이 영화부터서야 등장한다) 영화를 비롯한 문화산업에선 위험을 감수할수록 명작과 성공에 가까워진다는 비현실적인 금언이 있지만, 어른들의 사정으로 돌아가는 거대한 세상에서 그 금언에 따른 모험은 쉽지 않은 법이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존망이 걸렸던 첫 작품인 이 영화는 그래서(감히 비겁하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보이 미츠 걸의 스토리, 연출이 굉장히 안전지향적이다. 개인적으로 ‘천공의 성 라퓨타’는 지브리의 가장 지브리스럽지 않고, 전형적이며, 단순한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 사실이 이 작품을 평작 이하의 작품으로 만들지는 않으며 이 작품의 메시지와 구성은 관객들을 매료시키기 충분하다. 이 작품은 비록 괄목할만한 평가나 관객 수를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의 성공은 지브리 스튜디오가 다음 작품으로 나아가기에 충분한 디딤돌이 됐고 '이웃집 토토로'와 '추억은 방울방울'이라는 모험적 작품 제작을 가능하게 해준 비료가 됐지 싶다.


image.JPEG?type=w466
image.JPEG?type=w466


스토리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등장하는 비행석이 이 작품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나우시카의 세계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도 있지만 이 작품 내외의 정황으로 볼 때 그 가정은 불문에 부치려 한다. 다만, 이 작품도 전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처럼 도입부에서 감각적인 일러스트를 통해 멸망한 한 나라에 관한 작품의 배경과 설정을 함축하여 제시한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설정에서 과거 인류는(혹은 인류의 일부는) 지하의 여러 자원을 이용하여 굉장한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로 그 문명은 중력을 이기고 비행하는 법을 터득했고, 이내 생활이 가능한 터전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데까지 성공한다. 공중 도시들로 이루어진 이 위대했던 기술문명은 700여 년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파멸에 이르고, 그 문명의 구성원들은 지상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700여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 아직 하늘에 떠 있는(아마도 마지막) 구름 속의 공중도시 라퓨타는 전설로 남게 되고, 세상에서 소설이나 공상 속에나 있는 존재로 치부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추락한 고대 문명 기술의 로봇을 발견한 한 정부는 라퓨타의 실존을 직감하게 되고 라퓨타를 발견하여 그 재화와 기술, 힘을 차지하려 한다. 그 정부의 요원 무스카는 산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라퓨타의 왕녀 시타의 존재를 알게되고, 그녀와 라퓨타 기술의 결정체 비행석 팬던트를 통해 라퓨타에 이르려한다. 하지만, 시타의 비행석을 노리는 해적 일당에 의해 정부의 손에서 벗어나 광산마을에 사는 소년 파즈와 조우한다.


이후 시타, 파즈와 정부군, 해적일당은 모두 여러 사건 사고를 통해 결국 라퓨타에 이르게 된다. 라퓨타에 이르자, 정부 요원 무스카는 자신도 라퓨타 왕족의 후예라고 밝히면서 과거 라퓨타의 기술을 이용하여 다시금 라퓨타 제국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야욕을 드러낸다. 무스카의 폭력적인 야욕을 막기 위해 시타와 파즈는 라퓨타를 파멸시키는 주문을 외쳐 잊혀진 도시를 파멸시키고, 주문과 함께 발광한 파멸의 빛에 의해 무스카도 눈이 멀고 도시와 함께 추락하며 파멸을 맞이한다. 다행히 파츠와 시타는 자신들이 타고 온 글라이더로 바람을 타고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고, 나무뿌리에 엉킨 라퓨타의 거대 비행석과 상층부 유적은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을 높은 하늘로 날아가 버리며 극은 끝을 맺는다.




배경과 설정


작중에서는 조나단 스위프트의 소설이 구약성서라든가, 고대 인도의 신화를 언급된다. 인물들의 옷과 비행기, 운송 수단, 주인공 파즈가 사는 공간도 18~19세기 현실의 모습과 유사하다.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의 세계관을 현실의 18~19세기를 기반으로 만든, 나우시카의 세계와 전혀 세계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세계는 레퍼런스가 전혀 없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뚝딱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관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이 작품은 전, 후 지브리 작품들에 비해 가장 지브리스럽지가 않다. 이 극은 기존 소년이 주인공이 되어 성장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장르인 소년만화의 장르구성을 충실히 쫓는다. 그래서 지브리에선 이례적으로 소년 주인공에게 극의 초점이 맞춰져 있고, 다양한 대사에서 소년만화의 마초적인 분위기마저 풍긴다. 이는 감독의 기존의 성공작이었던 작품 미래소년 코난을 많이 참고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선지 내가 TV로 볼 수 있었던 몇 개 안 되는 만화영화 중 하나인 미래소년 코난의 모습이 이 작품과 쉽게 오버랩 된다.




걸리버 시리즈의 라퓨타



‘천공의 성 라퓨타’는 조나단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 중 3번째 시리즈 하늘의 섬 라퓨타 이야기에 가장 큰 뿌리를 두고 있다. 조난단 스위프트는 풍자와 해악, 언어에 능했던 사람으로, 그의 작품은 18세기 영국의 다양한 부조리들을 위트 있게 다루고 있다.(고백하자면, 걸리버 여행기는 거인국을 다룬 어린이용 소설과 만화로 밖에 읽어보지 못했다) 라퓨타라는 이름에도 그의 독특한 언어감각을 거친 언어유희가 녹아있다.

스페인어로 lapita는 그리스 영웅시대의 시민을 의미하는 한편, la puta는 창녀를 의미한다.(그래서 이 작품은 원래 이름으로 스페인에서 개봉하지 못했다는 말도 있다) 이 중의적인 제목의 소설 속 라퓨타인들은 놀라운 과학기술을 이뤘지만, 실상 그들의 지식은 뜬구름 잡는 공상이나, 비현실적인 상상이나 지껄이는 무능력함 사람들이다. 그래서 상식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을 기준으로 그곳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세계가 아니다. 이처럼 당시 부조리했던 영국을 투사하는 우스꽝스러운 세계를, 그 스위프트는 그의 독특한 언어유희의 골계로 다뤘다. 소설 원작에서 작가가 다루었던 현실 비판의식의 구도는 정교하고 또한 직관적이기에 그의 공중 도시 라퓨타는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많은 작품의 모티프가 돼주고 있다.



image.JPEG?type=w966


성(城,the castle)



유럽 귀족을 연상시키는 고급 자동차 브랜드 메르세데스 벤츠가 지향하는 이미지는 ‘성(城)’이다. 성. 고고한 귀족, 왕족의 이미지와 쉽게 연결되는 성은 높은 벽을 통해 안과 밖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동시에 위와 아래를 구분한다.(‘하울에 움직이는 성’에서는 하울의 도피처인 성에서 상하 구분의 이미지를 삭제하기 위해서 성이 기괴하게 ‘움직’인다) 주요 산과 계곡 등의 높은 위치에 위치한 성은 그 위치에서 지리적 요충지로서의 기능을 극대화 하는 동시에 그 성 깊숙한 곳에 속하는 사람과 그 밖에 속하는 사람의 상하, 내외 관계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극에서 이러한 성의 이미지로 상하 관계를 가장 극단화 하는 방법은 성을 높은 곳으로 올리는 것이다. 산을 넘어 하늘로까지 말이다.


하늘로 올린 거대한 성은,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사람과 그곳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직관적으로 구분한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하늘 섬사람들은 당시 영국의 귀족들처럼 높은 위치라는 우월적 상황을 이용하여 그 밑의 사람들을 협박하고 지배한다. 그 밑의 사람들은 합당하지 못한 권력과 횡포를 누리는 하늘 성의 사람들에 대한 공포와 분노를 가지고 있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제시한 이 구도는 최근의 작품들의 설정으로 채용됐다.

image.png
image.png

영화 ‘가타카 (1997)’의 디스토피아 사회에서 주인공 빈센트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본래 우주여행을 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매일 하늘을 보며 저 멀리 갈 수 없는 태양계 우주 기지에서 일하는 우주 비행사가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구조에서 발버둥 치고 결국 그 구조 안에서 꿈을 이루는 개인을 그리는데, 영화 엘리시움 (Elysium, 2013)의 경우는 그 구조를 더 직관적으로 제시하고 그 구조를 자체를 전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주 대기권에 떠 있는 엘리시움은 그 곳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다다르고자 하는 곳인 동시에 부조리한 전복의 대상이다. 알리타: 배틀 엔젤 (Alita: Battle Angel, 2018)의 공중도시 자렘도 이와 비슷하다. 알리타에서도 극 중 모든 갈등들은 상하 계급 관계를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공중도시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천공의 성읍을 거부하는 이유는 조금 포인트가 다르다. 이 작품은 인간의 계급 갈등보다, 삶의 터전이 하늘에 떠 있다는 것 자체를 순리에 대한 반역으로 여기는 듯 하다.

이 작품에 따르면 하늘은 동경과 도전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거주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비행으로 그 이상을 만끽한다 해도 시타에 말 따나 인간은 반드시 땅으로, 대지로 돌아와야만 한다.



image.JPEG?type=w966



하늘




하늘은 표상 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하늘은 인간이 소유하는 것도, 똑같이 모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늘은 무한하며,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무한한 공간인 하늘은, 거의 모든 종교와 인류의 문명에서(특히나 동양에서) 각별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하늘에 이르려는 노력은 인간의 초월에 대한 우아한 도전인 동시에 오만한 금기였다. 히브리 성서에 하늘에 이르려던 바벨탑은 무너졌고, 그리스 신화 속의 이카루스와 페스세우스도 하늘을 동경하며 날개와 페가수스로 그곳으로 다가가다가 비참하게 추락해버렸다. 극 중에서도 엔진의 힘으로 라퓨타로 나아갔던 해적선과 군함선(그 이름부터 다윗에게 허무하게 죽은 골리앗이다)은 결국 지상으로 귀환하지 못한다.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고 도전을 중시하는 서구의 관점에선 이 관점이 굉장히 못마땅할 수 있지만, 적어도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하늘은 도전과 정복, 쟁취의 대상이 아닐뿐더러 정착의 반석도 아닌 듯하다.


극 중 그 놀라운 기술을 가졌던 많은 공중 도시 문명들이 왜 파멸에 이르렀는지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작품 초반 일러스트에서 파괴된 도시에서 개미처럼 흩어져 나오는 사람들을 볼 때, 적어도 그것은 시타의 읊조린 말처럼 그 문명에서 주체적으로 내린 결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극 중 시타는 공중도시들이 사라진 이유를 인간이 대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 명확하게 말한다. 거듭말하자면, 그녀가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노래와 할머니의 가르침으로 배운 사실, 곧 라퓨타인들이 대지로 흩어진 이유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대지, 자연과 함께 그것에 순응하며 살아야하는 존재라고 배웠다. 시타의 이 기계문명의 탐욕에 대한 이 외침 외에, 극중 하늘을 누비던 도시들이 사리진 이유는 필요하지도 의미를 가지지도 않아 보인다. 이 작품에서도 전작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처럼 파멸은 단순히 부정적이며 항구적인 종말을 의미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되는 듯 하다.


image.JPEG?type=w466
image.JPEG?type=w466


성과 속의 구분




종교학의 거장 마르치아 엘리아데의 통찰은 종교학 전체에서 두루두루 이용되는 아주 중요한 관점들을 제시했다. 엘리아데의 유명한 통찰 중 하나가 성과 속[The Sacred and the Profane]에 대한 통찰이다. 특히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많은 작품들은 시각적 공간을 구성함에 있어서 성과 속을 시각적으로 구별하는 작업에 굉장한 애를 쓴다. (개인적으로 토토로가 이 작업에 가장 공을 들였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는 작중인물 무스카의 입을 통해 ‘성스러운’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된다.(지브리의 작품에서 그 단어가 시각적이 연출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발화됨도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런데 무스카가 이야기하는 성스러움과, 작품의식이 구현해 내는 성스러움은 판이하다. 주지하고 넘어가자면, 엘리아데가 정리한 성과 속의 구분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상황과 문화다마 다양하게 드러나는 성과 속의 본질은 '구별'이다.




무스카가 지향하는 구분은 강하고 폭력적인 기술을 이용한 종적인 구분이다. 그의 성스러움은 압도적인 힘을 통해 타인 위에 위치하여, 타인을 지배하는 성스러움이다. 당연히 그것은 아무나 쉽게 다다를 수 없어야 하고,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떠나간 공중도시 라퓨타가 지향했던 성과 속의 구분은 무스카의 그것과 너무나도 판이하다.


무기와 보물, 과학 시설이 가득한 라퓨타 하층부와 달리 라퓨타의 상층부에는 아름다운 공중정원이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에 남아 움직이고 있는 과학기술 결정체인 로봇의 임무는 이 정원을 돌보는 것과 이제는 읽을 수 없는 글자(메소포타미아의 갈대 쐐기문자를 닮아있다)로 기록된 묘비를 돌보는 일이다. 라퓨타의 상층부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도시, 풍부한 물이 위치해 있고 그 생명력이 아직도 많은 동식물들을 가꾸고 있다.(골렘 옆을 나우시카에도 나왔던 여우다람쥐가 반갑게 노닌다.) 이처럼 라퓨타의 성과 속의 구분, 상층부와 하층부의 구분의 기준은 미야자키 감독이 모든 작품에서 끈질기게 강조하는 '생명'으로 보인다. 이 생명의 성스로운 힘은 나무의 뿌리의 모양으로 오랫동안 폭력의 질서에서 벗어난 라퓨타 전체를 덮고 있다.


당연히 무스카는 자신의 관점과 다르게 구현된 있는 라퓨타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기준에서 철저히 차갑고, 구분되고, 정교해야 할 공간인 라퓨타 중심부에 물과 식물이 만연하게 가득한 모습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갈대와 나무뿌리를 신경질적으로 파헤치면서 민감하게 분노한다.


반면, 이 성스러운 생명에 힘, 즉 라퓨타의 거대한 나무의 뿌리는 그 가치를 알아보는 주인공에게 큰 도움이 된다. 라퓨타 전체를 덮은 나무의 뿌리 덕분에 주인공 파즈는 위기 순간에도 추락하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두터운 뿌리는 라퓨타의 정수를 붙들고 하늘로 올라감으로 700년 이상 지향해오던 생명의 성스러움을 지켜낸다. 극은 이렇게 젊은 관객이 이해하기 힘든 진정성 없는 목가적인 향수를 초월하여 자연에 대한 감독의 의도를 개연성 있게 모든 관객에게 관철시킨다. 이를 알아본 대사, 극의 종반에 “그 아이들이 바보들로부터 라퓨타를 구했다”라는 해적 돌라의 대사는 정교한 진정성이 울림을 주는 명대사였다.



image.JPEG?type=w466
image.JPEG?type=w466


image.JPEG?type=w466







우주목(宇宙木, The tree of life)


종교 문화에서 해, 달, 물 등 많은 상징을 접하고 연구하지만, 나무만큼 중요한 상징물이 있을까 싶다.

나무는 그 뿌리를 깊은 지하에 두고 있고, 그 줄기는 지상의 우리 곁에 있다. 그리고 그 잎가지들은 하늘을 지향하며 높이 위로 뻗어 바람에 흩날린다. 수명이 긴 나무의 줄기와 뿌리는 마치 영원한 것 처럼 항구하고, 그 잎과 열매는 매년 끊임없이 새로운 생성과 죽음의 주기를 맞이한다. 이처럼 나무는 지하와 지상, 하늘 모두를 아우르는 존재이며 영겁의 영원과, 끊임없는 생명 순환을 아우르는 존재이다. 그래서 많은 문화권에서 나무는 우주 그 자체의 유비적 대상이다. 나무, 우주목의 상징은 모든 문화권에서 주요하게 드러난다.


우리네 장승과 서낭당 나무를 신성하게 생각한 샤머니즘 문화에서부터, 자신을 포도나무라 지칭한 그리스도교의 예수, 다양한 나무가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의 상징이 되는 그리스 신화를 지나 게르만 신화의 우주목인 이그드라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의 세계관을 형성함에 있어 중추적인 상징으로 사용된다. 유물로 남아있는 신라의 왕관에서부터, 영국인의 소설 반지의 제왕의 속 왕국 곤도르의 왕관에 이르기까지 많은 왕관들이 나뭇잎의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왕이 나뭇잎모양의 상징물을 머리에 씀은, 첫째로 바람이라는 형이상학적 질서의 힘을 머리에 쓴다는 의미고, 또한 머리에 잎을 씀으로써 그가 우주목이 되어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를 상징하는 나무의 권위를 입는다는 것이다.


작품에서도 생명의 나무, 우주목은 멸망한 도시 라퓨타를 지탱해 라퓨타 그 자체가 됐다. 이 나무의 생명력은 죽은 도시 라퓨타가 생명이 가득한 도시로 유지 될 수 있게하며 또한 그 생명의 힘은 하즈로 하여금 라퓨타의 성스러움을 지킬 수 있게 해준다.


라퓨타의 나무는 라퓨타 과학기술의 핵심인 거대 비행석을 중심으로 라퓨타를 감싸고 있다. 그래서 파멸의 주문을 외웠을 때도 라퓨타가 완전히 붕괴하지 않고, 생명이 가득한 상층부는 계속이 하늘에 남아있을 수 있게 된다. 결국 라퓨타 최고의 보물은 오직 이 나무의 차지인 것이다. 더불어, 파즈에 이어 또 한번 이 생명나무의 뿌리 덕에 주인공 일행이 라퓨타의 추락에서 살아남아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image.JPEG?type=w466
image.JPEG?type=w466


image.JPEG?type=w466
image.JPEG?type=w466



주문과 이름



일본에 유명한 인터넷 플래시몹이 있다 한다. 일본은 우리네 명절에 성룡의 영화를 틀어주듯,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TV에서 방영해 주는 시기 있는데, 그 시기에 방영되는 이 영화의 파멸의 주문 장면에 맞춰 트위터상에서 네티즌들이 그 주문을 동시에 외치는 일이 일본에선 상당히 유명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 파멸의 주문 바루스.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패장(敗將)의 이름이자, 극 중 라퓨타어로 '닫혀라'라는 뜻의 주문이란다.


서구에서 ‘단어의 문자 구성을 짚는 작업’을 의미하는 spell이라는 단어는 ‘주문을 외우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이제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사실이지만, 유명한 소설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주문은 라틴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그래서 영어를 조금만 알아도 그 어원으로써 주문들의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를 기준으로 다른 언어권의 주문이라 신비스럽고 비밀스럽게 느껴질 뿐, 서구의 사람들은 선언 그 자체가 주문인 셈이다. 우리식으로 이를테면 지팡이를 들고 “밝아질지어다!”라고 외치면 지팡이에서 빛이 나는 식이다. 이처럼 인류에게 언어 행위는 지금 우리들의 생각보다 신비한 힘이 있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이성과 언어능력으로 보았다.


태초의 아담은 만물에 ‘이름’을 지어 ‘부르는 일’을 행했다. 만물의 영장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언어로 규정한다는 것, 이름을 짓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유롭게 부른다는 것은 이름 지어지는 대상의 본질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그것을 통제한 다는 것이다. 굉장히 위대하고, 또한 사실 상당히 폭력적인 일이다.


우리처럼 모든 사람의 이름에 고유한 뜻이 있는 히브리 문화권에서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이름과 그 뜻을 묻는 행위는 굉장히 무례한 행위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힘을 자신이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오만한 행위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의 그 물음을 꾸짓으며 자신의 이름(הוה, YHWH)의 뜻을 알려주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 오컬트영화 검은 사제들 (The Priests, 2015)에서 이번에는 신부가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권능을 빌려 악마의 ‘이름’을 알게되고 그 ‘이름’을 외칠 수 있게 되자, 악마를 제압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만화 데스노트에서도 데스노트 소유자는 피시전자의 ‘이름’을 알아야 데스노트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나를 포함한 동양의 문화권에서도 모든 이름에 각각의 소중한 뜻이 있고 문화권의 사람들은 소중한 뜻을 지닌 각자의 이름, 특히 본명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자, 호 등의 다른 이름을 만드는 방식으로 본명 외에 불리기 좋은 다른 이름을 만들거나, 성 뒤에 직위 직책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물질문명이 잠식한 서구사회에서 언어 행위는 예전의 그 깊은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나도 여기에 젖어 어린 시절 처음 해리포터의 주문이 그저 뜻이 있는 라틴어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이 신비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 행위는 그저 자연을 정의하고 정리하여 물질적인 목적에 맞게 이용하기 위한 규정하는 행위, 그 이상, 이하의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물질 문명에 민감한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폭력에 관한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을 리 없다. 지브리의 게드전기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그 문제의식이 자연스럽게 극에 녹아있다.


이 영화에선 그 문제의식이 주문과 이름과 대한 시타와 무스카에게 큰 태도 차이로 나타난다.


우선 주인공 시타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고 사랑하는 소년 파즈와 충분한 라포(관계)와 믿음이 형성된 이후에 자신의 본명을 알려준다. 라퓨타의 왕녀로서의 정체성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녀로서 그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타는 소중한 인격적 존재와의 공감을 위해 조심스레 이름을 공유한다. 할머니로부터 이어진 자신의 깊은 존재론적 비밀을 조심스레 나누듯 말이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본질을 담은 소중한 이름을 결코 함부로 타인에게 발설하지 않았다.


반면 무스카는 자신의 정체를 묻는 시타의 물음에 자신이 라퓨타의 옛 왕족의 후예임을 밝히며 자신의 본명을 쉽게 발설한다. 그에게 그의 이름은 라퓨타의 폭력적인 기술과 힘을 획득하기 위한 자기암시적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그가 라퓨타의 폭력적 힘에 다다랐을 때 자신의 본명을 어떻한 인격적 관계도 가지지 않은 타인인 시타에게 원소기호나 이야기하듯 가볍게 내뱉어 버린다.


주문에 대한 관점도 마찬가지로 두 인물에게 대립적으로 나타난다. 시타는 라퓨타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주문을 알고 있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매뉴얼을 외우듯 익힌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삶 속 다양한 상황에서 할머니에게 조금씩 배운 것이다.('모계'라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속인주의 성향이 강한 유대인교 전통에서 '엄마'가 유대인이어야 아이도 유대인으로 인정 받는다.) 시타는 주문 하나하나의 깊은 의미와 배우고, 이해하고, 익혔다. 그런 그녀는 어떤 주문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반면 무스카에게 주문은 그의 본명과 같이 그저 도구적일 뿐이다. 라퓨타의 시설에 들어가 수첩을 들고 “읽을 수 있어!”라고 환호하며 라퓨타를 통제하지만, 손으로 화면을 짚을 뿐, 그는 제대로 된 주문을 단 한마디도 발설하지 못한다. 시타가 없었다면, 아마 결국 그는 라퓨타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무스카는 주문, 언어를 이해하고 소중히 다루는 시타의 결단 어린 주문 앞에 속절없이 파멸해 버리고 만다.



인물




나는 욕망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어린 시절부터 욕심을 멀리하라 배웠고, 내 천성이 욕심이 많은 편이 아니라 확신하지만, 욕망이라는 단어의 원초적인 힘에 끌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욕망의 소용돌이. 멋진 단어이다. 욕망은 모든 갈등의 근본인 동시에, 모든 아름다움과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주지 않는가? 야망에 가득찬 소년 파즈부터, 지브리에서 희귀한 전형적 악역인 무스카에 이르기까지 내가 느끼는 ‘천공의 성 라퓨타’에 인물들 매력의 근원은 다름 아닌 욕망인 것 같다.

image.JPEG?type=w966


파즈



인생 대부분을 소년만화에 빠져 살아왔던 나로서는, 이 극에서 파즈가 가장 동일시하기 쉬운 캐릭터였다. 그의 이름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과거에 지은 여러 이름 중, 미래소년 코난을 만들고 남은 이름이라 한다. 그의 이름은 일본어로 깃털, 솜털의 발음과 유사하다. 바람에 따라 쉽게 상승하고 하강하는, 상승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듯한 연약한 솜털 말이다.


극 중 파즈는 가난한 탄광마을에 살고 있다. 그는 고아이며, 대장이라 불리는 사람과 함께 거친 탄광 일을 맡고 있다. 마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어린 소년이 혼자 살고 있다는 점과 모두가 아버지를 거짓말쟁이라 놀린다는 그의 대사를 미루어볼 때, 부모처럼 돌봐주는 제대로 된 후견인은 없는 모양이다. 자신의 머리가 대장의 주먹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대장과 거친 터전에서 일하며 머리를 많이 얻어 맞은 것도 같다. 무스카가 합의금 처럼 내민 금화를 차마 내 버리지 못하는 모습, 첫눈에 반한 시타와도 계란 반쪽을 나누어 먹는 장면을 보면, 그는 굉장히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옷도 극 내내 무릎이 헤져 덧대 깊은 바지를 입고있다. 이 힘겨운 삶과 그 터전에 파츠는 그다지 애착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시타의 마을에서 함께 살고자 하는 파즈의 극 중후반에 대사를 보면 그는 모험 이후에도 자신의 집에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이는 석탄먼지와 스모그, 혹독한 산업사회 노동에서 벗어나 목가적인 시타의 자연적 삶을 공유하고 싶다는 말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그의 작은 집에 미련이 없음은 분명해 보인다.


파즈는 이처럼 가난하고 혹독한 환경에 깃털처럼 나약한 모습이지만, 상승하는 깃털 같은 이상을 가지고 있다. 매일 아침 나팔을 불며 아침을 시작하고, 하얀색 비둘기를 키우고 자신의 비행기를 만들며, 마을을 벗어나는 비행을 꿈꾼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욕망이 이루어질 기회를 끈질기게 붙잡는다. 이 작지만 끈질긴 깃털 같은 상승의 의지는 아이러니하게도 하강하는 시타를 중심으로 동력을 얻는다.



시타



시타의 이름은 그리스 문자 쎄타(θ)를 일본식으로 읽은 발음으로 보인다. 또한 하강, 아래를 의미하는 일본어와 발음이 유사하다. 그녀는 하강하는 이요, 추락하는 이다. 하지만, 극의 초반 일러스트에서 드러난 듯 라퓨타의 위대한 상승의 동력은 깊이 파 내려간, 깊은 하강을 통한 부유석 채굴로 이루어졌다. 그처럼 이 극에서 모든 욕망을 구체적으로 상승시키는 에너지도 시타에서 나온다.


그녀의 존재 덕에 무스카는 라퓨타 제국의 꿈에 다가설 수 있었고, 해적 돌라의 라퓨타에 대한 탐욕 또한 그녀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주인공 파즈는 말할 것도 없다. 시타는 파즈에게 애정의 대상인 동시에 탄광 마을에서 벗어나고, 망상으로 취급받았던 아버지의 꿈을 현실화시킬 수 있게 해주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모든 욕망의 중심에 있는 주인공 시타의 욕망은 극 중 적극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라퓨타의 보물도, 왕가의 권위도, 비행석마저도 그녀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다. 소중한 존재가 된 소년 파즈를 위해 그녀는 그것들을 망설임 없이 포기해버린다. 구태여 그녀의 욕망이라 한다면 그것은 다시 대지와 계절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평화로운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결국 이 극에서 파즈와 시타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낸 셈이다.


image.JPEG?type=w466



image.JPEG?type=w466


무스카



무스카는 라틴어로 파리를 뜻한다. 이 단어가 복선일까? 그는 천공으로 나아가고자 하지만. 그 상승의 의지에는 하늘에 대한 동경이 전혀 없으며, 그는 창공으로 만물을 이끄는 바람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그의 비행은 오직 그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극 중 계속이 생명을 무시한다. 또한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 발생한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다. 그러다 그는 결국 쓰레기 취급했던 사람들과만 붙어 있다가, 그들에게 벗어나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마치 파리처럼.


그의 욕망은 과거 라퓨타의 기술로 라퓨타 제국을 부활시켜 황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라퓨타에게 그는 꼭, 고고한 라퓨타 조종석에서 무스카를 방해하는 파리들과 같은 존재와 같아 보인다. 그는 자신이 라퓨타의 왕족이라 주장하지만, 주문에 대해 무지하고 비행석이 그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아 라퓨타 통치의 정당성을 가질 만한 존재는 아닌 것 같다. 그는 극 중 가장 탐욕적이지만. 정작 그의 탐욕은 비현실적이며 유치하다. 그래서 우리가 미워하기 더 좋다. (앞서 말했듯 그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에서 이례적으로 평면적인 악역이다. )


무스카라는 단어는 또한 스페인어(라퓨타를 창녀로도 만드는 원작의 언어유희의 언어)로 암갈색을 뜻한다. 그래서인지 무스카는 극 중 항상 갈색 머리에 진갈색 양복을 입고, 갈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암갈색을 외피로 두른 그는 극 중 누구와도 교감하지 않는다. 작 중 무스카는 갈색의 외피 안에 그 누구에게도 인격적인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탐욕을 이루기 위해 타인을 이용할 뿐이다. 그러나 라퓨타 최후의 순간 그 외피는 그를 지켜주지도 못한다. 갈색 선글라스를 꼈음에도 비행석에서 나오는 빛에 그는 눈이 멀게 되고, 그는 암갈색 정장을 입고 암갈색의 라퓨타 파편과 함께 추락하여 최후를 맞이한다.




image.JPEG?type=w966

돌라



그녀는 이 영화에서 내게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그녀의 행동은 모든 사건과 상황에 시발점이 되어준다. 물론 돌라는 해적이요(아마 삐삐 롱스타킹이 모델인 듯 한다), 그의 재물에 대한 탐욕은 노골적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캘시퍼를 탐욕 하는 황야의 마녀와 닮았다. 탐욕적임에도 별로 밉지 않은 이유까지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황야의 마녀를 닮았다. 무스카와 달리 이 극에서 그녀가 밉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주인공들을 그저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주기 때문이다.


일단 그녀는 대장부다. 탱크 앞에서도 겁먹지 않았고, 거대 전함 아래서도 시타를 기어이 구해냈다. 그녀는 해적단을 이끌며, 겁쟁이 아들들을 카리스마 있게 이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의 재산을 훔쳐왔고, 공공기물을 파괴했으며, 많은 이들의 터전을 파괴해왔다. 처음 그녀가 시타와 엮이게 된 이유도 오로지 그녀의 탐욕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해관계로 인해 그녀는 주인공들과 한 배를 타게 되었을 때, 무스카와 달리 그녀는 자신의 배에 들인 주인공들을 탐욕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대하지 않는다. 그들의 능력을 단번에 파악하고, 역할과 인격을 존중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준다. 라퓨타의 본질을 깨닫고 주인공들의 의지를 도와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최후의 최후, 끝까지 자신의 탐욕을 노골적으로 드러 낸다. 그런 그녀의 솔찍한 모습이 그녀를 매력적으로 만든다.




p.s 1 돌라의 행적과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시타가 이후에 그녀처럼 변한다는 그녀의 말이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




p.s.2 단발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하울을 위해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단박에 잘라버린 소피를 보고 그때부터 단발을 좋아했다. 소중한 것의 희생. 거추장스럽고 구속적인 것으로부터의 탈피. 그의 작품에서 단발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진다. 대담한 공존이다. 이 작품에서 시타의 단발도 내게 그 드라마틱한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름다운 단발을 볼 수 있는 극 중 시간이 너무 짧아 아쉬웠다.







image.JPEG?type=w966




p.s.3 뽀뇨를 똑 닮은 소녀가 대장의 딸로 등장한다. 반가움과 귀여움에 깜짝 놀랐다.








매거진의 이전글[말랑말랑 지브리①]-바람계곡의 나우시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