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말랑말랑

[말랑말랑 지브리①]-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열도의 파멸 속 폐허에서 피어난 피어난 포스트모던의 씨앗

by 말랑말랑
image.JPEG?type=w966 바람계곡의 나우시카(風の谷のナウシカ) 1984

-모더니즘의 정수와, 또 그로 인해 인해 발생하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있게 다루는 미야자키 감독의 서사에서 첫 극장용 장편영화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임에 저는 참으로 행복한 감정을 느낍니다-



일본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굳이 이야기할 필요 없겠지만, 같은 추축국 출신이어서인지 일본의 문화에는 많은 부분 독일의 문화가 스며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발전을 위한 학습엔 많은 방법이 있지만, 내 경험 상으로도 가장 효과적이라고 꼽히는 방법은 목표 삼은 모델을 정해놓고 그 모델을 귿로 따라하는 것이다. 개화기 동아시아 국가 일본의 경우 보편 윤리와 함리적 이성이 근대국가로 나아감에 있어서 제국주의 국가들을 국가성장의 모델로 삼았다. 일본은 근대화에 있어 당시 서구 열강들을 모델로 삼았고 영국과 더불어 특히 독일의 문화를 많이 참고 했던 것 같다.

독일이 당시 유럽에서 가장 최근 근대화와 발전을 이룬 나라여서인지, 세계대전을 전후 그들을 추축국으로 묶어준 세계 정세와 그들의 이해관계가 작용한 것인지는 지금의 내 관점으론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서구문화와 일본 문화에 문외한인, 그저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사람으로서도 일본 문화 콘텐츠의 다양한 부분에서 독일 문화에 영향 받은 부분 쉽게 느낄 수 있다.

이는 이후 많은 일본 콘텐츠와 대부분의, 사실 거의 모든 타 지브리 작품에도 마찬가지다.


피부색으로 사람의 계급을 나누는 스페인계의 식민지 사람들은 일본인들을 동양의 백인이라 분류했다고 한다. 과정과 그 알맹이야 어찌 되었든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빠른 근대화 과정을 겪었고, 그 과정의 철학적 교육적 사고관을 형성함에 있어 서구적 사고관을 아주 치밀하고 철저하게도 받아들인 것 같다.

일본인들의 분석적인 산업, 경제, 학문 시스템과 그것의 기본이 되는 그들의 사고관을 보면 그들은 동양인이라기 보단 서구인인 것 같다. 일본의 그들의 연구와 번역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영어가 아닌 논문을 작성하고도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가 있을 정도다.


아시아의 서구인인 일본인이 극본을 쓰고, 채색하고, 더빙한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도 자연히 그 근원은 일본에 스민 극히 서구적인 요소들이 취합된 것 같다. 이 작품에서 그 요소들을 대략 정리해 보자면 그리스 신화,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적 분위기, 게르만신화, 에코페미니즘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이토록 거대하지만, 아직도 서브컬처로 여겨지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작품에 작가주의가 적용 된 지는(애니메이션이 적어도 영화 수준의 문학 작품으로 대우받게 된 지는)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루팡3세와 미래소년 코난으로 커리어를 쌓았던 미야자키 하야오 였음에도, 제작사는 그의 만화 원작이 없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 요청을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고 한다. “만화 원작도 없는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극장에 거냐?”는 제작사의 태도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만화로 구현한다. 그 만화는 1982년 만화 잡지 인기투표에 5위에 랭크됐고 7권으로 묶인 단행본으로도 발매된다.(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이 만화 2권정도의 앞부분 내용을 다룬다. 사실 초반 이후 애니메이션과 원작 만화는 설정이 내용과, 세계관 관점이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만화를 원작이라 할 수는 없다. 참고로 만화의 경우 그 내용이 훨씬 더 잔혹하다) 그렇게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지난한 우여곡절 끝에 지브리의 효시가 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영화화가 성사됐다고 한다.

image.JPEG?type=w966

스토리


대단한 명성에 비해 이 작품의 러닝타임은 짧은편이고 스토리도 굉장히 단순하다. 물론 그 배경 설정이 혀를 내두르게 정교하다.


이 극의 배경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인류의 문명의 폭싹 멸망하고 난 뒤의 미래를 다루고 있다. 극중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과거 인류는 결국 인류를 멸망 시킬 병기를 만들기에 이르고, 거신병이라 불리는 거인 형태의 생체병기는 7일 만에 인류의 문명을 멸망시키고 만다.

더욱이 멸망한 이전 문명의 여러 오염 물질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거대한 오염지대를 형성하게 되고, 나날이 넓어지는 이 오염지역을 미래 인류에게 부해라는 불른다. 폐를 녹여버리는 오염 물질이 가득한 부해에는 기괴하고 거대한 곤충들이 살고 있다.

극 중 노파가 말하는 전설에 따르면, 인류가 이 부해를 파괴하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거대 곤충들이 들이닥쳐서 파괴를 시도한 인간의 도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는 독성물질과, 그곳에서 자라 그 독을 내뿜는 곰팡이, 거대 곤충들을 피해 모여 살게 되고, 그 시점에도 나름의 새로운 마을, 국가, 연합, 제국을 형성한다. 작품이 배경이 되는 바람계곡은 바닷가 마을로, 바다에서 계속이 불어주는 바람이 대륙의 오염물질을 막아주어 형성된 작은 마을이다.

극한의 환경에서도 나름 평화로운 터전인 바람계곡에 어느 날 서쪽의 대국 토르메키아의 함대가 불시착하게 된다. 황녀 크샤나가 이끄는 함대는 과거 문명을 멸망시킨 거신병의 힘으로 거대한 곤충들이 가득한 오염지대 부해를 파괴하고 다시 안전하고 발전된 문명을 건설하고자 한다.

크샤나와 나우시카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여러 사건사고 끝에 나우시카는 부해라고 불리는 지대가 사실 과거의 인간이 만들어낸 오염물질이 자연 정화되고 있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거대 곤충들이 그토록 처절하게 그 지역을 지키려 했던 이유도 그 정화되어가는 지역을 지키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종반, 국가간의 전쟁과 알력다툼으로 인한 음모로 인해 토로메키아 군이 주둔해 있는 바람계곡으로 거대 곤충무리가 밀어닥치게 되고, 바람계곡은 곤충무리의 돌진으로 인해 토르메키아 함대와 함께 멸망할 되어버릴 운명에 처한다.

크샤나와 토르메키아군은 과거 인류의 병기인 거신병의 힘으로 그 돌진을 막아보려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절망의 순간 나우시카는 노파가 이야기 한 전설 속 인물처럼 등장하여 곤충들의 돌진에 몸을 던진다. 거대 곤충들은 나우시카의 중재에 돌진을 멈추고 상처입은 나우시카를 높게 들어 올린다. 오무 무리는 신비한 힘으로 나우시카를 치료하고 평화롭게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사건으로 거신병을 잃게 된 토르메키아 군은 조용히 바람계곡을 떠나고, 바람계곡은 다시금 평화를 맞이한다.



말랑말랑 배경&설정



image.JPEG?type=w966

포스트 아포칼립스


미야지카 하야오의 초기 작품인 TV애니메이션 시리즈 미래소년 코난은 핵 전쟁으로 대부분의 문명이 멸망한 후의 세상을 그리고 있다. 그의 첫 극장용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도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관을 그린다. 사실 잔혹한 세계대전 이후엔, 서구를 중심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 수 많은 작품들이 등장했다. 다만, 서구의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 대부분이 절망적인 환경에서 벌어지는 만인에 대한 혹독한 투쟁 혹은 그 환경을 극복해 내는 우아미(優雅美)를 그리고 있다면, 미야자키 감독의 포스트아포칼립스에서 타인과 자연은 대립이나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환경과 사람들은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다를지언정, 대화와 공감으로 설득이 가능한 존재들이다. 감독의 자연도 그 과정이 지난할지언정 대화와 이해와,공감과 화해, 공존이 가능한 대상이다. 일본인은 동양의 순화적 세계관 안에서 서구의 물질문명을 받아드리고 한계마저 만나봤다. 그 일본인이 그린 작품관에서 어쩌면 거대한 재앙은 차라리 자연과 사회의 가치를 재고, 반성해보고 이상적 사회를 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긍정적 계기인지도 모르겠다.

image.JPEG?type=w966

바람


동서양 할 것 없이 바람은 오랫동안 형이상학적 상징물로 사용되었다.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의 시발점이 되며, 모든일을 이루어내는 바람은 생동하는 변화, 생명과 그 이미지가 쉽게 연결된다. 우리 언어에도 바람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하는 바람에’ 등과 같이 형이상학적 인과를 상징하는 개념으로 쉽게 사용된다. 서양에선, 특히 4원소 중 불과 바람이 섞인 개념이 프네우마라는 따뜻한 바람은 변화와 생명, 상승을 내포한다는 상징으로 자주 사용된다. 대표적으로 그리스도교 성서의 ‘성령’이라는 단어는 모두 이 그리스어 프네우마(바람)라 표기되어 있다.

소국과민의 평화로운 바람계곡이 그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근원적인 원동력도 다름아닌 바람이다. 더러운 것을 밀어주고, 새로운 운동과 생명의 원천이 되어주는 바람은 바람계곡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환경 요소이다. 그래서 극 중에서도 모든 바람계곡의 구성원들은 바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또한 바람계곡의 가장 위기에 순간에는 바람이 멈춰버리며 모든 바람계곡 구성원들이 이에 대한 불안감을 공명한다. 이 작품에서 바람은 하늘은 나는 행위와 더불어 직관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 주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image.JPEG?type=w966
image.JPEG?type=w966
image.JPEG?type=w966

조로아스터교 및 서구의 종교, 신화관


조로아스터교는 종교학에서 유대, 그리스도, 이슬람교로 이어지는 유일신교의 뿌리로 여겨지는 종교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라는 발음으로 더 유명한, 선지자 조로아스터가 창시한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와 심판을 행한 선한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와, 그로부터 분열 된 악신인 앙그라 마이뉴의 대립으로 시공의 역사를 상정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천사와 악마, 선한 신과 사탄의 구도의 시초는 모두 이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세계관이 독특한 점은 세상 시간의 시작과 끝, 영원 대한 관점이다.

(순환이 잦은 몬순기후의 인도를 포함한) 동양은 물론이거니와, 그리스와 이집트의 신화적 세계관에서도 세상의 운행은 순환론적이었다. 즉 인류의 대부분의 문명에서 세상은 그 시작과 끝이 없으며, 끊임없이 생성과 죽음도 이 반복되는 순환의 역사 안에 있다. 하지만, 대 제국 페르시아의 국교로 자리 잡은 조로아스터교는 이러한 순환론적 시종을 거부하고, 세상의 탄생과 심판, 종말의 선적인 세계관을 유일신과 결부하여 설명했다. 결국 이 생소하고도 희귀한 세계관은 제국의 힘을 업고 중동에 중요한 세계관을 자리잡게 되어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로서 중동지역에 중요한 문화적 사조가 된다. (그 영향으로 히브리성서(구약)와 그리스도교 성서(신약)도 당시에 유행했던 묵시문학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이 작품은 그 초반에 노골적으로 자신이 서구 및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적 세계관을 흡수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게르만 신화처럼 거인들로 인해 7일 만에 세상이 멸망했다는 사실을 일러스트로 제시하는 한편, 인류가 멸망에 이르게 된 과정을 묘사하는 그림 속 인물들은 현실 세계의 고대 벽화 속 조로아스터교의 이미지를 모사하고 있다. 또한 작품 내에서 바람계곡을 비롯한 페지테인들이 입고 있는 평상복도 조로아스터교도의 의복과 흡사하다. 그러나 내 눈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서구적인 세계라기 보단, 서구에 만연한 조로아스터교의 묵시론적 세계관과 동양의 순환론적 세계관의 변증법적 중간 정도의 세계로 보였다.

조로아스터교에서 파생된 서구의 선적인 세계관은 물질세계에 아무것도 없었던 태초와 아무것도 없을 종말을 상정한다. 이 작품이 주로 서구 및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적 세계관을 그리고 있음에도, 작품에서 현실 세계가 완전히 멸망할 것 같이 보이진 않는다. 물론 극 중 인류는 오염물질에 고통 받고 있고,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극악한 환경에서 제국, 바람계곡 그 어느쪽에서도 인류가 멸망해 벌릴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영화가 끈질긴 생명과 그 터전이 되는 자연에 대한 긍정을 감추지 않기 때문인 듯 하다. 그래서 이 극의 메인 스토리는 생명이(타인이) 생명을 위협하고, 자연히 생명을 위협하는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생명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타 생명과 자연환경에 대한 나우시카와 크샤나의 관점은 다르지만 사그라들지 않는 생명의 힘과 희망을 긍정한다는 사실 만큼은 두 인물 공통의 지향이다.


극 중 서구적 그리스도교의 핵심 메시지와 동양적 생명의 화해를 연결시키는 연출도 기가 막힌다. 임박한 종말 앞에서 화해와 소통을 위한 희생한 순결한 매개자. 죄 없이 피투성이로 들어올려져 희생당하고 부활한 존재. 이는 그리스도교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이미지이다. 종말론적 절망이 팽배한 분위기에 이 작품의 주인공 나우시카 또한 극의 클라막스에서 피투성이로 높이 들리어, 추락한다. 그리고 피에 젖은 옷을 입은 채 다시 들리어 부활한다. 이 과정에서 영화의 주요 테마였던 나우시카 진혼곡은 나우시카의 부활 축하곡으로 바뀌고, 나우시카는 그 음악에 맞추어 황금 들판에서 두 팔을 들로 춤을 춘다. 희생과 부활의 과정에서 그리스도는 인간과 신의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었고, 나우시카는 인간과 자연의 오해에서 비롯된 갈등을 화해로 종식시켰다.


image.JPEG?type=w966
image.JPEG?type=w966


에코 페미니즘과 악에 대한 관점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 중 엔지니어 지로가 주인공인 2013년 작 ‘바람이 분다’를 제외하면 모든 작품에서 (단발머리)소녀가 주인공이다.(천공의 성 라퓨타는 남녀 공동 주인공으로 얼버무려주었으면 좋겠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어떤 잣대와 관점으로 페미니스트가 규정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페미니스트다.(최근 내게 언어의 오용과 오염이 이토록 무섭다는 사실이 절절한 부분이다) 다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페미니즘은 노골적이지 않다.


전형적인 소년 만화의 틀을 따르는 '붉은 돼지'에선 주인공은 수동적인 인물이며, 오히려 주인공 주변의 여성캐릭터들이 극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간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기존 소년만화의 초점을 여성주인공에 맞췄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원령공주는 다른 신념을 가진 두 여성을 대척점에 세워두고 강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이처럼 미야지키 감독의 페미니즘은 굉장히 독특한 동시에, 놀라운 개연성을 통해 모든 관객들이 받아드릴 수 있는 보편적인 목소리로 말한다.



에코페미니즘



이성적 정상인을 남성으로 상정하고, 자연을 탐구와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던 서구의 주류 의식체계는 산업혁명과 과학발전으로 인류에게 큰 변화를 선사했다. 위험한 자연과 미신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해온 이 사조는 과학의 힘으로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의 도전을 맞닥들이게 된다. 이성적인 주류 남성에게 대상화되고 착취당했다는 공통점은 가진 자연생태(에코)와 여성(페미니즘)에 대한 의식운동은 이러한 포스트모던의 시류를 타고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됐다. 이에 서구에서 '킹콩'과 같은 주류의 반성어린 상업적 수작이 등장하기도 했고, 페미니즘 영화라는 장르의 안에서 많은 영화들이 등장했지만, 에코페미니즘의 범주 안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만큼 상업적으로 괄목할만한 성적을 거둔, 많은 이들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된 작품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는 생태 여성학의 주류를 담당하는 서구의 여성학의 생태에 대한 고찰도 그들이 증오하는 고전적인 서구의 자연관이라는 사슬에 묶여있기 때문이 아닐까?


동양인들은 자연을 투쟁과 쟁취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가정이 굉장히 어색하다. 동양인에겐 애시당초 이러한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후앙 기마랑스 로사의 `제3의 강둑’ 과 같이 인간이 거대한 자연과 맞서며 낭만적인 인간성을 불태우는 남미계열의 소설의 의식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 (아마 서구인들은 반대의 과정을 겪겠지,) 신화의 구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장한 인간의 모습을 한 신 토르가 망치로 무찔러줬으면 하는, 잔혹한 거인으로 묘사된 서구의 자연과 달리, 동양에서의 자연은 존경과 공존, 공감의 대상이다. 동양에서 인간과 자연은 상보적인 관계도 넘어 아예 자기동일적이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서 그 개념이 도전에 부딪쳤지만, 적어도 사상사에 있어서 만큼은 오랜 세월 축적된 동양의 전통이 현대 생태학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서구에도 에코페니니즘의 이론이 발달했지만, 이 작품에서 구현되는, 여성 캐릭터 나우시카가 대변하는 자연에 대한 관점도 서구인의 토양에서 등장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는 악인이 없다는 칼럼을 읽은 적 있다. 악(惡)을 무엇으로 생각하냐 따라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조로아스터교 전통의 악, 서구의 절대적 evil 개념의 악. 그 악만을 악으로 본다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그러한 악이 없다는 표현을 옳다. 다른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얽혔을 뿐,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속 인물들 중에 너무도 탐욕적이라거나, 살육을 즐기는 등의 납득하지 못만큼 악덕한 존재는 없다.(사실 천공의 성 라퓨타가 조금 걸린다) 그러나 동양의 악의 관점으로 보자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도 악은 존재한다.


많은 이들이 수업시간에 순자와 한비자 계열의 법가 사상가들은 성악설을 주장했다고 기계적으로 외운다.(나도 외워서 시험봤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성악을 말하지 않았을뿐더러, 동양에는 절대악 evil의 개념 차체가 없다. 동양에서 악은 굉장히 상대적인 개념이다. 같은 모래알이라도 운동장의 부드럽고 풍부한 모래는 선(좋은 것)이요, 내 밥그릇에 조금 섞여버린 모래알은 악이 되는 식이다. 그래서 동양의 사상가들이 경계했던 사실 악은 절대 악(evil)이 아니라 만인이 자신의 이익과 가치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다. 그들의 관심은 제국의 면모를 갖춰가는 거대한 사회에서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 어떻게 이 갈등을 줄이는가였다. 동양의 사상가들은 형이상학적 개념인 근원적 악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는 적어도 서구적 선악의 구분선을 명확하게 긋는 작업은 불가능하다. 이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사카에서는 생명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어슴프레한 기준을 잡고있을 뿐이다.





image.JPEG?type=w966



비행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비행이다. 하늘을 나는 것. 어린 소년시절부터 감독은 비행기와 비행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엔 마치 보편교회 신앙인의 미사시간 여음구처럼 항상 하늘을 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물론 이 감독의 비행은 모든 작품 속에서 저마다의 다양한 의미와 맥락,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극의 주인공 나우시카의 비행은 대부분 타인을 구하기 위한 비행이다. 비행으로 등장한 나우시카의 첫 이륙은 지역을 벗어난 거대 곤충들을 진정시키고 유도하기 위한 비행이었다. 이후로도 그녀의 비행 대부분은 소중한 동료들, 일면식도 없는 타인, 원수같은 제국의 공주에까지도 이르는, 생명을 구하기 위한 비행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나우시카의 비행은 간접적으로도 앞서말한 생명의 바람과 계속이 연결된다.


나우시카와 바람계곡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비행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들의 비행은 최소한의 동력만을 사용하여 바람계곡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타는 과정이다. 자연이, 형이상학적 순리가 이끄는데로 몸을 맡긴다. 그래서 바람계곡의 하나뿐인 엔진 비행기, 자신의 힘으로 하늘을 나는 과학기술은 당연하다는 듯이 박살이 나버린다. 이 영화의 엔딩은 바람계곡의 아이들이 나우시카에게 바람을 타는 법을 배우는 장면으로 맺는다. 당연히 이 어린이들이 배워가는 비행은 순리와 생명을 따르는 바람계곡의 비행이다.


바람을 따르는, 바람계곡의 비행과 달리 크샤나의 트로메키아 군 비행선들은 외적으로도 날개에 비해 너무도 거대한 몸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과도한 의도로 순리를 재단하려는 무모한 전함들의 비행은 모두 이내 추락으로 이어진다. 거신병을 본국으로 나르던 수송선도 추락했고, 나우시카를 태우고 본국으로 돌아가던 여정도 마찬가지다. 달에도 다녀왔다는 과거 기술의 비행선도 허름한 폐허일 뿐이고, 앞서 말했듯 바람계곡에 하나뿐인 건쉽(강한 엔진을 가진 전투기)도 영화 후반 속절없이 박살나고 만다.


image.JPEG?type=w966




나우시카와 크샤나


나우시카


이 극의 주인공 소녀 나우시카는 호메로스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등장하여, 편견 없는 인류애를 보여주었던 나우시카라는 인물과 그 이름과 같다.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 이후 여러 고초를 겪고 본국으로 돌아오는 여정의 후반, 표류 끝에 만신창이의 모습으로 어느 섬나라에 도착하게 된다. 그 섬나라의 사람들은 만신창이의 오디세우스 미친 사람 취급하며 멀리하지만, 아름다운 공주 나우시카는 그에게 옷과 음식을 제공하고 돌보아준 뒤,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도와준다. 이후 그녀는 오디세우스의 아들과 결혼했다고도 전해진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나우시카가 오디세우스를 조우한 것 처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나우시카도 끊임없이 다양한 인물과 상황을 조우한다. 겁에 질린 여우다람쥐부터, 트로메키아인들, 페지테인들, 거대한 곤충과 오무에 이르기까지 나우시카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계속이 급박한 상황과, 극한 감정에 달해있는 인물, 존재들을 끊임없이 만나게 된다. 나우시카와 조우한 이들은 대부분 공포와 분노, 증오에 휩싸여있다. 하지만 나우시카는 이처럼 혼란스러운 조우에서 외모나 환경, 배경에 휩쓸리지 않고, 공감을 설득을 이끌어 내는 놀라운 힘을 가진 인물이다.

극의 초반 유파의 대사로 강조하듯 이 공감 능력은 나우시카를 현실에 존재할 리 없는 사기적인 캐릭터로 만든다. 이 소녀는 여러 거대 곤충과 여우다람쥐와 공포어린 공격을 이해하며 능숙하게 그들을 진정시킨다.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과 바람 계곡 터전을 파멸을 이끈 제국군을 증오하지 않으며, 참사를 야기한 제국과 페지테의 잔혹한 전쟁으로 목도하고도 그 만행을 인류애로 덮어버린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에 그녀를 만난 모든 인물, 생명체들을 결국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를 위해 행동하게 된다. 심지어 극 중 가장 위협적인 거대 곤충 무리의 돌진마저 그녀의 중재에 그 분노를 멈추고 그녀를 축복하게 된다.

이처럼 극 중 나우시카는 호메로스의 나우시카 처럼 어떤 갑작스런상황과 환경에도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는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다. 극에서 눈 먼 노파는 푸른 옷을 입고 황금 들판에 내려와 잃어버린 대지와의 끈을 잇고 사람들을 푸른 땅으로 인도할 전설 속 인물(샤먼)을 묘사한다. 극 후반 사기적인 공감능력을 가진 나우시카는 전설에서처럼 자기희생을 통해 온 몸이 푸른 피에 젖고 부활해 공존과 평화를 위한 공감의 매개자(샤먼)의 모습으로 거듭난다.


크샤나


크샤나는 지브리 전체에 등장하는 성인 여성 캐릭터 중에서 단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다. 악역이 없이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가득한 지브리의 작품 중에서도 크샤나보다 매력적인 주인공의 카운터 파트는 없었던 것 같다.

낭만, 명왕 등과 같은 번역부터, 관음보살을 일본식으로 음차한 단어(콰논)를 기업의 이름으로 한 카메라 브랜드 캐논(Canon)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문화에는 티벳 불교 및 불교의 개념들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영화에서 나우시카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인 크샤나는 불교의 찰나로 번역되는 불교(산트크리스트어) 단어이다. 짧은 순간인 찰나. 찰나일 뿐인 크샤나는 근시안적이어서 어리석고, 폭력적이며, 쉽게 부정적인 인물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감독은 크샤나(찰나)를 그런 단순한 인물로 설정하지 않았다.

지금(찰나에) 집중하는 그녀는 현실파악 능력이 뛰어나고, 중화기와 장정이 가득한 대군을 이끌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다. 극악한 자연 환경인 부해로 인해 신체가 온전하지 않지만, 그녀는 그것을 ‘극복’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안전하게 안녕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녀는 극히 '현실지향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황권에 관련된 피말리는 정치전쟁과, 반 제국군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아 만인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제국을 꿈꾼다. 이러한 그녀의 이상은 자연과의 공존을 중시하며, 불과 폭력을 멀리하고 그것을 통한 평화를 추구하는 주인공의 세계와 충돌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으로서 이 설득력 있는 카리스마 가득한 공주를 마냥 미워하기는 쉽지 않다. 감독은 이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천천히 크샤나가 나우시카에게 공감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극의 종국에 크샤나는 나우시카와 바람계곡 사람들의 유대를 공감하고 존중하게에 이른다. 그리고 명분이 없어진 그녀와 그녀의 군대는 조용히 바람계곡을 떠난다.(만화에서 그녀가 황제가 되어 제국의 부흥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 극은 나우시카의 관점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내겐 그 대척점의 크샤나 또한 작품이 초점을 맞춰 주인공으로 다뤘어도 손색없었을 캐릭터로 보였다. 감상컨데, 이 작품을 서구적 관점에서 크샤나에게 초점을 맞추어 서술해도 환경에 처절하게 맞서 비루하지만 분명한 인간적 성취를 이루고 마는 남미소설 계열의 냄새가 나는 수작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image.JPEG?type=w966


유파


많이 사용되는 영화적 문법 안에서 가장 주인공에 가까운 인물이다. 이 영화는 유파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극의 초반, 바람계곡의 왕은 바람계곡을 유파에게 맡기고자 하는 것 같고(아마 나우시카와 결혼시키고 싶었지 않나 싶다) 눈먼 노파가 전하는 예언 속 인물도 유파를 예견하는 것 같다. 많은 극에서 흔히 주인공으로 택할 외모에 인품과 통찰력, 세계 최강이라 소문난 무력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재밌게 이 영화는 그에게 나우시카를 조금 조력하는 이상의 중요한 역할은 전혀 맡기지 않는다. 이후 모노노케 히메서와 같이 이 영화에서도 개연성에 전혀 어긋나지 않으면서 완벽한 남성 캐릭터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지 않는 기막힌 연출이 도드라진다.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페미니즘 영화를 구성하면서 이정도로 깊이있는 캐릭터 구성을 고민하고 영화로 만들어 내어줄, 이정도 패미니즘 영화 이어줄 다음 이야기 꾼을 나는 계속 기대하고 있다.



ps1. 음악


내가 일본어에 능하지 못한 까닭에, 지브리 애니메이션 ost 중 내가 가장 좋아하고 또 자주 따라부르는 음악은 가사 없는 이 영화의 ost인 나우시카의 레퀴엠 뿐이다. 레퀴엠은 진혼곡이다. 죽은 영혼을 달래는 노래다. 그런데 이 영화의 진혼곡은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로 불리는 전형적인 진혼곡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로, 가사 없이 불린다.

나우시카의 진혼곡(레퀴엠)은 극 중에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죽음과 장애, 오염이 가득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종말론적 세계관에서 암울한 진혼곡으로 불리기도하고, 나우시카의 어린시절 기억을 통해 나우시카와 오무를 매개하는 기억의 매개체로 불리기도 하며, 만인 위에서 부활한 나우시카를 축하하는 축하곡으로 불리기도 하다. 한 테마의 곡을 이처럼 주제의식에 맞게 자유로이 변주해내는 히사이시 조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콜라보는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적 없다.



ps2. 희망(한恨)


KakaoTalk_20260101_223609096.jpg
KakaoTalk_20260101_223554713.jpg

극장에서 지브리 작품을 보지 못한 나는 스크린에서 지브리 작품을 못봤다는 오랜 한(恨)이 있었다. 하늘이 감격하셨는지, 2025년 지브리 작품의 연속 극장 재개봉이 시작됐다. 그 첫번째 작품은 무려 이 작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였다. 누가 이 프로젝트를 기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우시카를 첫 개봉작으로 꼽은걸 보면 진짜 뭔가 좀 아는 사람이다. 혹시라도 근방 내려버리면 못본다는 마음에 개봉한 주에 바로 극장을 찾았다. 세 명정도 있던 넓은 극장에서 이 감명 깊은 작품을 다시 접했다. 수없이 본 작품이지만, 극장에서 보니 또 세 번정도 울컥하는 포인트가 있었다. 두번째 울컥 포인트 정도에서 티켓 값을 아득시 상회하는 효용을 누렸다고 자족했고 심지어 포스터까지 받았다. 어린 시절 작은 한을, 나이들어 이렇게 조금씩 풀아가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말랑말랑] 지브리 애니메이션 인트로-미야자키 하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