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모순과 역설의 세계에 내 던져진 소년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어는 영혼이 깃든다는 뜻의 라틴어 애니마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영혼이 주입된 것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다.
애니메이션은 눈에서 일어나는 착각, 즉 잔상을 이용한 그림영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상을 구성한다. 만화에도 있는 특성이지만, 특히나 애니메이션에서 더 강하게 강조되는 특성은 말 그대로 창조적인 세계의 구현이다.
만화와 에니매이션이 그려내는 세계는 영화와 연극 등 보다 작가와 제작자에 의도를 더 '엄밀'하게 반영한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세계'에 나오는 구름하나, 빛 한줄기, 작은 손동작 에 이르는 작은 요소 하나하나도 우연이나 상황에 구애받은 것이 아니다. 배우의 즉흥적인 애드리브가 끼어들 여지도 없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구성하는 요소는 온전히 창작자의 치밀한 의도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또한 이 콘텐츠를 향유하는 서브컬처 문화에선 유난히 '세계관'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서브컬쳐 시장의 팽창 덕에 적어도 한국의 젊은 사람들에게 세계관이라는 단어는 낯설고 어려운 단어가 아니게 됐다.
세계관(Wéltanschauung=world view)이라는 단어는 근대철학의 거장 칸트가 사용한 개념으로서 크게 주목받았고, 현대 종교학자 니니안 스마트로 대두되어 종교학에서도 주요하게 사용되는 단어이다.
세상에 대한 지식 덩어리 세계관은 세상이 어떠한지에 대해 인지하고, 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또한 그 세계에 대한 정서적 감응까지 파악해보기에 이른다.
그런데 한국 기준으론 기독교 문화 안에서나 접할 수 있는, 복잡하고 어려운 학술 용어는 사실 젊은 현대인에게 익숙한 단어가 됐다. 특히나 서브컬처 만화와 애니메이션, 소설, 영화에 익숙한 젊은 현대인들에게 말이다. 본래의 뜻과 달리 오용되는 경우가 많은 타 철학 용어들과 달리, 세계관이라는 단어 사용 용례에서의 의미는 그 학술적 뜻(세계에 대한 인식론적, 실천론적, 미학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를 살아가며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누리는 현대인들은 아마 지구 역사상 어느 시대의 인류보다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이해하는 과정에 익숙한 것 같다.
적어도 이제 주류 인류는 다양한 세계를 접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하게 됐다. 그리고 과정에서 다양한 세계관이 범람하는 영화, 만화와 애니메이션, 소설들이 큰 역할을 해왔다. 말해 입아프지만 지금은 역사책 속 헬레니즘, 르네상스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또 전방위적인 규모로 교류가 오가고 있는 시대다.
인류가 근대로 접어든 시기에 지구 어느 곳보다 활발하게 다양한 세계관을 연구하고, 다양한 세계관을 삼키고 소화하면서 발전시켜온 나라 중 하나로 일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현대인들, 영어권의 서구인들마저 애니메이션을 지칭할 때, Animation이라는 단어 대신 아니메(Anime)라는 일본식 표현을 즐겨 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인을 매료시켰기 때문이다. 서구의 동양에 대한 왜곡된 동경인 오리엔탈리즘의 영향도 크겠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이 인기 있는 이유는 당연히 그곳의 애니메이션이 다루는 세계가 다양하고 폭넓기 때문이며, 그 안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흥미있기 때문이다.
근현대 일본의 사상사를 반추보면 일본에서 다양한 세계관 대한 문화 콘텐츠들이 등장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 같다. 아주 일찍 번역 문화가 발달했고, 특히나 제국주의 시기 독일과 영국으로 대표되는 제국들의 문화, 사상, 학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하는데, 동양에서 사용하는 학술 용어 대부분은 일본에서 인고의 과정을 거쳐 번역된 용어들이다. 세계관들이 요동치며 삼켜지고 게워지는 환경이었던 일본. 그곳에서 나고 자란 만화,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영혼을 불어 넣은 세계는 눈에 띄게 독특했을 것 같다. 그 본류인 서구에서조차 매료될 정도로. 부모, 가정환경에 대한 호불호와 상관 없이 우리 모두가 성장에 그것의 영향을 많이 받았듯이 그리고 좋든 싫든 미야자키 하야오와 그의 지브리 스튜디오 또한 이 토양에서 발아하고 자란 나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간단하게 정리하기 힘든, 아주 복잡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현대(Morden이니 근대라 하여도 좋다)의 모순과 역설이 응집된 사람이라 어물쩡 정리하려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시아 최초의 근대국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으로, 군국주의 일본의 힘과 패방한 일본을 모두 경험했다.
전쟁을 이겨내고 세계 최고 수준의 강대국이 된 일본을 지나서, 그 유명한 일본의 경제 버블 붕괴도 경험했다.
일본의 전체주의적 근대성에 지쳤기 때문일까?
일본의 황금시기를 살아온 그지만 그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목가적인 것에 대한 강한 향수가 스며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작품엔 70~80년대의 유행했던 에코페미니즘의 분위기가 품어나오며 의식적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근대를 거부해온 것 같은 그는, 그럼에도 그럼에도 하늘을 동경하는 소년이다.
날개 없는 인간이 하늘을 자유로이 누비는 것은 반역이고 모순임에도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기계문명에 대한 동경을 작품에서 도저히 거두지 못한다. 스팀펑크로 애둘러 표현하지만 지브리 작품은 전차와 전투기, 캘버린, 전함을 비롯한 기계들에 대한 순간순간 치밀한 묘사로 우리 눈을 집중하게 한다. 나는 그 기계문명에 대한 낭만적인 동경이 작품에 반영 될 수밖에 없었다고 믿는다. 감독이 기계 문명 안에서 그 기계들이 얼마나 많은 폭력을 낳았고, 얼마나 많은 파괴를 일삼았는지를 작품을 통해 절실히 말하는 것을 열열히 보면서도 말이다.
따뜻하고 풍만한 이미지가 생각나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지브리라는 단어조차도 어찌나 모순적인 단어인지 모른다.
사하라 사막의 열풍에서 따온 이름인 기블리(자동차 마세라티의 기블리라는 차가 아직 있다)는 2차 세계대전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의 비행기를 일본식으로 부른 이름이다. 비행기 마니아인 미야지키 하야오 감독이 유난히 좋아했던 비행기였나보다.
소녀와 자연에 대해 말하며, 인간과 자연과 공존하는 목가적 풍경에 대한 향수를 그리는 지브리, 기계문명과 욕망, 폭력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자주 다루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름이 추축국 비행기의 이름이다.... 지브리가 구축해온 꿈과 희망, 공존과 평화의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독일 신화 속)트롤 캐릭터 토토로 앞에 등장하는 이름이 잔인한 사망의 열풍을 입은 비행기의 이름임은 참 기괴한 모순이다.
미야자키 감독은 몇 차례의 은퇴 선언과 신작발표를 반복한 소심쟁이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재와 먼지, 선명한 불꽃과 유혈이 낭자하기도 하는 연출에 풍성하고 따뜻한 그림체와 메시지를 끈질기게 녹여내는 고집도 가지고 있다.
유난히 소녀들의 이야기를 고집하는, 그러면서 전투기와 하늘을 사랑하는 소년.
이 모순 덩어리 늙은이가 내가 사랑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이다.
다양한 세계관이 엮이며 벌어지는 모순과 역설의 드라마. 이제 이 기괴한 뒤틀림의 물결을 따라 지브리 작품들을 헤엄쳐보려 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 일본에서 피어난 포스트모던의 꽃' 편으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