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으로 300을 받는다면 / 매달 300씩 생활비가 생긴다면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그 도구는 식당이다. 이미 줄 서는 식당을 가진 부자들은 나를 찾지 않는다. 월매출 7~8천이 넘는 식당들은 사실 나와 비즈니스 할 것도 없다. 그 정도면 충분히 그 골목, 거리에선 부자인 탓이다. 부자는 인맥이 더 중요하다. 인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높은 목표에 서로가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 그런 점에서 나는 별 가치가 없다. 내 스스로가 부자에 목표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부자보다 급했던 것이 가난을 면하는 일이었다. 30대의 10년이 통째로 가난했기에 그것만 면하는 것이 꿈이었다. 다행히 나의 그 꿈은 나이 50이 되어서 달성했기에, 내가 가난과 악수를 하게 된 장사의 기술을 가감 없이 담아볼 생각이다.
좋은 자리에서 가게를 시작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음식이라곤 만들어본 적도 없는 가장의 식당을 위하여
대출까지 해서 만든 7~8천 돈으로 창업할 분을 위해
하루에 100만원 매출이 일류대만큼 간절한 분을 위해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그 도구는 식당이었다. 이미 줄 서는 손님을 가진 식당들은 나를 찾지 않는다. 월매출 7~8천이 넘는 식당들은 사실 나와 비즈니스 할 것도 없다. 그 정도면 충분히 그 골목, 거리에선 부자인 탓이다. 부자는 인맥이 더 중요하다. 인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높은 목표에 서로가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 그런 점에서 나는 별 가치가 없다. 내 스스로가 부자에 목표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부자보다 급했던 것이 가난을 면하는 일이었다. 30대의 10년이 통째로 가난했기에 그것만 면하는 것이 내 평생의 꿈이었다. 다행히 나의 그 꿈은 나이 50이 되어서 달성했고, 이제 나도 노후를 목전에 둔 55살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다.
은퇴하고 퇴직금을 아껴 까먹어봐야 10년쯤이다. 통장 돈을 곶감처럼 빼 쓰면서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도 점점 두려움이 앞선다. 급기야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몸도 정신도 피폐해진다. 그러다 급기야는 투자나, 창업이라는 사고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경비에 채용되어도 감정노동에 지친다. 택배는 언제 다쳐서 병원신세를 질지도 모를 일이다. 대리기사도 해가 갈수록 무섭고 위험해진다. 그런 일자리라도 감사히 하고 싶지만, 그런 일조차 써주지 않을 땐 자괴감을 노후에 달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
가정을 꾸려야 하는 4~50대에는 최소한의 벌이가 5백쯤이었다면, 부양할 부모나 자녀가 없는 60대는 경비일자리만큼의 벌이면 행복할 수 있다. 물론 그정도 돈이야 건강한 아내가 식당에 취업을 해서 벌어낼 수 있다. 하지만 내 사랑스러운 아내가 남의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어쩌면 감정노동에 눈물을 감추면서 벌어오는 돈일 수도 있다. 바로 그런 때. 그때!! 하루 10만원 버는 식당을 만드는 거다. 테이블 단가 4~5만원짜를 하루에 10개도 팔지 않아도 된다. 5~6개만 팔고 문 닫으면 그만이다. 그 정도면 부부가 하루 10만원, 한달이면 200만원을 넘게 버는 셈이다. 내 가게라 남에게 감정을 다칠 게 없다. 5~6개를 팔려고 하루종일 일하지 않아도 된다. 식당근육이 없는 쌩초보여도 그정도의 식당 운영은 가능하다. 만일 당신이 수도권에 집 한 채를 가지고 있거나, 퇴직금으로 억대의 목돈을 가지고 있다면, 더 나아가 개인적으로 준비한 연금이 매달 100만원 이상이 나올거라면 더더욱 마음 먹음으로 실현이 가능해진다.
웃기는 소리다. 가난은 우울하다. 기가 죽는다. 의욕도 생기지 않고, 꿈도 꿀 수 없다. 불편을 떠나 솔직히 나는 부끄러웠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중도에 사라지는 습관도 20대 였다. 돈을 내지 않고 중간에 도망가는 게 그나마 나았다. 계산하지 못하는 내 초라함을 모두와 구경하기 보다는, 내가 사라져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내 뒷담화를 하겠거니 하는 게 차라리 편했다. 그게 반복이 되면서 술친구들은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았다. 이를 앙다물었지만 답이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뭔 일을 해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무리 궁리를 해도 그저 벽 뿐 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결혼을 했다. 결혼과 함께 찾아온 IMF는 우리 부부를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번듯한 직장이었지만 권고사직 후 나는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퇴직금과 위로금을 다 까먹어갈 때 쯤, 300만원의 가맹비를 내고, 100만원짜리 레이저프린터를 산 투자가 처음이자 마지막 투자였다. 그게 당시의 내 미래를 건 시드머니였다. 그렇게 스티커명함 사업을 했다. 열몇장의 스티커 명함을 만들어주고 받는 돈은 5천원이고 그 사업을 그래도 6개월은 했던 거 같다. 가맹비에 포함된 스티커 재료가 얼마였는지는 몰라도 20%도 사용하지 못하고 그 사업은 접어야 했다. 6개월의 희망고문으로 날린 생활비까지 합치면 1,000만원은 날렸다.(당시 마지막으로 퇴직한 회사의 월급이 100만원이었다) 그리고 더 가난해,졌다.
나는 아내 한명도 건사할 돈을 벌지 못했다. 철저히 무능했고 유약했다. 매달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가며 근근히 연명을 할 뿐이었다. 그러다 급기야 신혼집 전세보증금 3천을 깨기 위하여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하는 묘수?를 짜내기도 했다. 보증금 천에 월 30만원짜리 투룸은 학원으로 쓰던 걸 주택으로 개조해서 난방에 취약했다. 그러나 나는 전세보증금에서 얻은 2천으로 든든했다. 그 정도의 돈이면 1년은 거뜬히 견디고 그 안에 무슨 묘수가 생길 거라 자신했다. 착각이었다.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시간의 요행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실낱같은 희망도 잡히지 않았고, 나는 더 절망해져 갔었다. 오죽하면 나이 40에 내 전재산이 겨우 300만원이었을까. 나는 가난이 싫다. 징글징글하다. 그래서 빈자들에게 독하게 군다. 측은지심으로 사정을 들어주거나, 이해를 해주는 순간 그 가난은 뿌리가 깊어진다. 차라리 내가 악당이 되는 게 낫다. 나는 맞고 옳고, 당신의 답은 무조건 틀렸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가난을 벗어나는데 그정도 억울함이야 잠깐 견뎌야 한다. 그게 50의 걱정, 60의 꺼질듯한 한숨보다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