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는

초대장 - 나에게로의 초대

나는, 오현주

by 에이포

꽃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흙길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나는 씨를 뿌리면서 갈 거니까

흙길을 꽃길로 만들면서 말이야.

나중에 지나갈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누가 이렇게 예쁜 길을 만들었나 하면서.

-흙길, 김연경, 『나도 나를 안아줄 수 있다면』


작년 여름, 수능을 앞두고 누구보다 뾰족한 사람이 되어 있을 때, 저는 '데이브레이크'라는 밴드의 팬이 되었습니다. 노랫말 "꽃길만 걷게 해줄게". 그리고, 꽃길을 걷게 해주겠다는 다짐만으로도 너무 행복해 미치겠다는 듯한 가수의 행복한 표정. 이 두 가지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길지 않은 살아온 시간 중 가장 지쳤을 때 다가와준 한 마디의 위로였습니다. 수능이 끝나고 뾰족함이 무뎌졌을 때, 이 노래는 제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내 삶의 방향성을 고민하던 시기, 귀에 꽂히듯 들어온 이 곡은 제 삶의 목표를 결정해주었습니다. "내 주위의 소중한 이들이 꽃길을 걸을 수 있도록 흙길을 자처해 걷는 사람이 되겠다"는 작은 다짐입니다. 힘든 날 저에게 위로가 되어준 그 "꽃길만 걷게 해줄게"라는 한 마디처럼, 저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 다짐에 관하여 고민하다가 같은 시집 속의 <찻잎>이라는 시를 떠올렸습니다.


따뜻함에 몸을 담그면

은은한 색과 향을 퍼뜨리는

찻잎 같은 삶이었으면 좋겠다.

말려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도

모든 걸 내어 주면 끝나는 삶이지만

누군가에게 행복한 시간을 안기고 떠날 수 있어

그토록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삶이고 싶다.

찻잎, 김연경, 『나도 나를 안아줄 수 있다면』


누구나 각자의 찻잔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저의 찻잔은 꽤나 혼란스럽습니다. 해야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저의 미래를 그리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찻잔은 각자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많은 찻잔에 가족, 친구, 연인이라는 찻잎으로 스며듭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파편들을 모아 찻잎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너무나 쓴 차에는 단맛을 더해줄 찻잎, 너무 밍밍한 차에는 상큼함을 더해줄 수 있는 찻잎, 투명한 물에 부담되지 않을 정도로 은은한 찻잎. 수많은 찻잎을 모아, 제가 만날 수많은 찻잔에 알맞은 찻잎으로 다가갈 수 있길 소원합니다.


나의 마음 녹슬지 않게 찾아오는 아픔이기에

다시 이렇게 나는 또 부딪혀 살아감을 돌아보게 되겠지

내 모습은 안개꽃처럼 흐릿하지만 아름다운 결실

너라는 꽃 위에 뿌려 놓으면

그제서야 빛이 날지 모르지

안개꽃, 김진호


이번엔 시가 아닌 노랫말입니다. 방금 소개한 <찻잎>과도 이어집니다. 내 삶이 한 편의 영화라면, 분명 제가 주인공일 것입니다. '저'의 삶이니까요. 그러니까, 각자가 조형하는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은 각자 다르겠죠. 제가 꿈꾸는 저의 모습은 빛나는 주인공은 아닙니다. 붉은 장미 옆에 그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는 작고 하얀 안개꽃들. 그 중에 하나라면 족합니다. <찻잎>에서 말하듯, 누군가에게 행복을 안길 수만 있다면 제 삶을 충분히 아름답고, 그것만으로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돋보이는 붉은 장미보다, 하얀 안개꽃 무리 속에서 조화롭게 어울리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 또한 흐릿하지만, 아름다운 결실이겠지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제 세계의 한켠에는 '우울'이라는 감옥이 하나 있습니다. 그 감옥 속에 저는 자주 갇히곤 했습니다. 감옥 속에 앉아 어두운 바깥을 내다보며 스스로를 파괴하곤 했습니다. 저를 '우울'이라는 감옥에 갇히게 한 것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몇 번 흔들면 아무렇지 않게 열릴 허술한 창살임에도 손댈 생각조차 못하고 무릎을 감싸고 앉아 고개를 처박곤 했습니다. 밖에서 누군가 날 꺼내주길 기다리면서. 울고, 울고, 또 울어서 지쳐 쓰러졌는데, 쓰러진 몸이 맞닿은 창살은 너무나 쉽게 꺾였습니다. 꺾인 창살 사이로, 저를 기다려준 소중한 사람들이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나와보라는 듯이.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제가 만든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은 나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밖의 누군가가 제게 손을 내밀어줄 순 있겠지만, 그것은 온전히 제가 창살을 흔들어 부술 의지를 만들어주는 것이지 창살을 부수어 주는 건 아니었습니다. 몇 번의 감옥 탈출을 거치며 우울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우울은 저를 괴롭히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라고. 내 앞의 벽을 부술 수 있는 그런 무기를 만들어주는 그런 아픔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옥을 부수는 나만의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기를 만드는 첫 번째 단계로, 저는 타인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타인을 사랑한다면, '나' 또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 아래였습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곧 믿음이었습니다. 물론, 타인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실망을 겪었습니다. 허물마저 덮어주며 믿음을 주었던 친구가 제 물건을 훔쳤고,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제게 사이비 종교를 전도하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믿지 않으면 실망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꾸준히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불신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기 때문입니다. 살아오며 만난 사람들 중 관계를 단절할 정도의 실망을 준 사람은 겨우 두 명 뿐이니까, 그 두 명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가오는 사람들을 '믿음'으로 마주하니 타인을 쉽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설령 저를 미워하는 사람들이제게 이유 없이 날선 행동을 하더라도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타인을 미워하는 데 시간을 쓰는 것보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가치있기 때문입니다.


‘실망’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마음 상태를 몇 번 거치며 거듭날수록, 불에 달궈진 연장처럼 단단해진다. 대개의 다른 호감들이 추상적이고 희미한 상태에서 진행되어 초점이 잡히고 구체적이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면, 신뢰는 그것을 역행한다. 구체적인 이유들이 점철된 후에야 비로소 막연하고 추상적인 신뢰를 낳는다. 그 순서를 밟는 한, 신뢰는 최적의 강도를 갖게 되고 알맞은 온도와 거리를 찾아 뿌리를 내린다.

신뢰, 김소연, 『마음사전』


타인을 미워하는 게 무용(無用)하다면, 나 스스로를 미워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무용합니다. 나에게 실망했다면, 그 실망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실망을 변화의 동력으로 치환하는 게 훨씬 중요했습니다. 나에 관하여 실망하는 건 오히려 다행인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잘못된 나의 모습을 깨닫고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니까요. 고등학교 3학년 3월 모의고사 수학에서 52점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비난하기만 하고 달라지지 않던 과거와 달리 열 아홉살의 저는 실망을 성장을 위한 에너지로 변환했습니다. 수학에 미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그 결과 수능날에는 84점이라는 성적표를 받았죠. 혹자는 겨우 84점이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제겐 그 무엇보다 값진 성적이었습니다. '나'에 관한 실망을 동력으로 치환하여 담금질해 최선의 결과를 얻어낸 단 한번의 경험만으로 저는 제게 신뢰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를 신뢰하니 자연스레 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수많은 실패와 아픔을 겪을 것이고, 전보다 더 깊고 고통스러운 실망과 우울이 제게 찾아올 것입니다. 다만 저는, 저를 믿습니다.어떤 실패라도 어떻게든 딛고 일어서 더 나은 길을 걸을 것이라는 믿음이 제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글이 자기소개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로 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추상적인 파편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쓴 것은 이 글이 초대장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찻잔을 소개하는, 그래서 저의 세계로 초대하는 그런 초대장이죠. 나는 그대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니 나의 세계로 부담 없이 들어오라는, 그런 초대장.


앞으로 우리는 글로 소통할 것이고, 때론 술과 음식을 곁들여 진지한 대화를 나눌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앞엔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나의 꿈과 계획, 살아온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쌓여있다는 말입니다. 그 시간의 출발점에서 저를 소개하는 세 페이지 남짓한 짧은 글에 제 삶의 방향을 담고, 제가 살아오며 배운 점을 담았고, 마지막으로 제 세계로의 초대장을 담았습니다. 아직 많이 서툴지만, 사랑과 행복으로 삶을 채우려는 저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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