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기념일인가요

by sogongnyeon

2019년 순례길을 걸으며 작성한 일기장을 열어보았어요. 액기스 기록만 가득한 일기장을 보며 그때의 기억을 덧붙여봅니다. 3년만에 만난 또 다른 나



제목_없는_아트워크 14.png

어제 신나게 맥주를 퍼마시고 신나버렸다. 자리를 옮겨 또 맥주를 마셨고, 다음날 파울로는 걷지않겠다고 말했다. 스티브와 나만 서로 경쟁하듯 술빨 세워가며 맥주 마셨는데 무슨일인가. 걸음이 느린 파울로와 나, 발에 물집이 많은 그와 나. 파울로는 발이 안좋아서 잠시 쉬어주는게 좋을 것 같다며 나중에 만나자며 작별인사했다. 그때 나도 쉬어야했을까. 역시 순례길 여러번 와 본 선배님따라 몸이 힘들다고 울어댈때는 어르고 달래줬어야 했을까.


파울로와 인사하고 스티브, 피트와 나는 출발했다. 그들은 아침 커피를 먹고 가자했고, 나는 딱히 필요없는 지출인데다 걸음이 느린 편이니 먼저 걷고 있겠다고 답했다. 어차피 그들은 걸음이 빨라 머지않아 10분안에 만나지 않을까. 혼자 걸어가는데 오늘따라 고요한 산 길이다. 귀신, 사람, 짐승 무엇이 나와도 다 무서울 고요한 산 길. 내가 무슨일이 생겨도 아무도 모를 것 갈은 그런 길. 무서운 상상을 가득채워 걷다보니 갈림길이 나온다. 오잉 화살표가 없잖아? 어디로 가야하지. 혹시 내가 놓쳤나? 휴대폰을 꺼내 맵스미로 방향을 본다. 온라인 지도로도 어느길인지 제대로 알 수 없다.

스크린샷 2023-04-30 오후 1.22.24.png 솔직히 무섭지않나
스크린샷 2023-04-30 오후 1.23.13.png 평온 vs 무서움 / 극 과 극 / 생각하기 나름
스크린샷 2023-04-30 오후 1.22.53.png 덤불 속 길

에라이 모르겠다. 이 쪽이겠지 뭐. 아무 방향이나 선택해 지나려다 아차차 우리 아재들도 못찾겠구나 싶어서 주변에 큰 나뭇가지를 찾아나섰다. 주우며 이리저리 다니다보니 눈에 들어온 노란 화살표. 오 내가 고른 방향이 맞잖아. 오예- 신난 마음으로 나뭇가지를 하나 둘 주워 방향을 표시했다. 같이 걸었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그 길이 끝났다. 뭐가 나올까봐 그러다 정말 아무도 없을까봐 두려워하던 길을 지나니 태양과 오르막으로 중무장한 돌길이 나타났다. 주변에 나무가 많은데다 나는 땀이 주륵주륵 나니 모기가 신나서 달려든다. 넌 반갑겠지만 난 아니라고. 제발 그만 가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앵앵- 너무 좋다고 앵앵- 떠나지않을거라고 앵앵- 모기의 지독한 팬심을 응원삼아 끝없이 올라갔다. 아 오늘은 산 하나를 넘는 날이구나. 여기까지만 걷고 아재들 기다리면서 쉴까? 싶다가도 이 산을 다 올라가고 보상으로 쉬는게 낫지않을깦 다시 고독한 싸움이 시작됐다. 그럼 나는 늘 후자였다. 고진감래를 지독하게 즐기는 자. 보상 없이 움직이지 않는 자. 과정이 중요하다고 스스로 세뇌시키면서도 내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고, 그걸로 모든걸 평가해버리는 엄격한 자. 태양과 모기 그리고 나와 싸우며 걷다보니 드디어 산이 끝난듯한 다른 길이 나온다. 그곳에서 철퍼덕 앉아 배낭을 벗어던졌다. 신발끈을 빠르게 풀고, 양말을 벗어 화난 발을 식혀줬다. 다행히 그늘이였으니까 땀으로 샤워한 상의도 식히기 좋았다. 십분 정도 지났을까. 왜 아재들이 안 보일까. 더 쉬면 나 퍼질러져서 못갈텐데. 사과나 먹자. 사과 하나 꺼내 대충 슥슥 닦아 먹는다.


스크린샷 2023-04-30 오후 1.24.39.png 돌길아 나 좀 놔줘


스크린샷 2023-04-30 오후 1.24.17.png 화살표 숨은 그림 찾기 (지금 알았는데 저 풀숲 속에 화살표 있었네...)


사과를 다 먹었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안 들린다. 이렇게 가만히 기다린다고 될 일인가. 혹시 다른 길이 있나. 이상하다 산 길 이거 하나일텐데. 혹시 내가 만든 나뭇가지를 못 본 걸까. 그래서 아예 다른 길로 가버린걸까. 번호를 주고받지 않았으니 연락할 수가 없다. 물론 와이파이로만 휴대폰을 써서 길바닥에서 연락할 방법도 없지만.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니겠지? 걱정이 되다가도 둘이니까 괜찮을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조금 더 기다렸다. 기다린지 30분이 넘어가자 이렇게는 답이 없다란걸 깨닫고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산 쪽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목소리가 두개다. 어! 스티브! 피트! 외쳤는데 반응이없다. 귀를 더 기울여보니 여자와 남자 목소리다. 오잉 익숙한 언어다. 뭐야! 훈이랑 림이였다. 첫 알베르게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들을 삼일만에 뜬금없이 산길에서 만났다. 아니 이거 뭐 동네 뒷산도 아니고. 뭔일이고. 꽤나 떨어져있었는데 조용한 산 중이라 멀리서도 대화가 가능했다. 첫 알베르게에서 다른 순례자들이 한 마을을 걸을 때 나는 호기롭게 받고 한 마을을 더 걷겠다고 떠난 자였으니 훈이와 림은 나를 못 만날줄 알았다고.



“ 뭐야 왜 여깄어. 이미 산티아고 가있는 줄.”


- 아니 뭐 가려다 말았지~


“ 헉 언니 발 왜이래.”

“ 야 너 발 왜이래 괜찮아?”


- 어 뭐.. 보기보다 괜찮아. 내 동행이야...ㅎ...


훈림이는(훈과 림) 반가운 마음에 놀리며 낄낄거리다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물집이 생긴 내 발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재들은 어떻게 된지 알 수 없고, 충분히 쉬었다는 생각에 훈림이와 같이 걸어갔다. 삼일간 따로 걸었던 우리에게는 다른 추억이 쌓여있었다. 이 친구들은 순례길 자체를 여행으로 바라봐서 다양한 숙소에서 자고, 그 날 본인들의 컨디션에 맞춰 걸었다. 그래서 대부분 10키로 내외로 걸었다. 소방서, 기부제로 운영되는 캠핑장, 에어비앤비 다양하게 숙소를 골랐다. 어제는 뭔가를 두고왔는데 에어비앤비 주인이 연락해준 덕에 기차타고 찾아왔다고 했다.

스크린샷 2023-04-30 오후 1.25.29.png 카페 물어보는 중


림이와 나는 무서운 산길에서 곡성 생각, 사람이 없어도 문제, 있어도 공포라며 느꼈던 두려운 감정을 공감했다. 특히 곡성 얘기를 하면서 “와따시 아쿠마 데시다” 대사를 치자 근처 교회에서 엄청 큰 종소리를 냈다. 그 땐 정각도, 30분 단위도 아니라서 도대체 왜 갑자기 종이 울린건지 무서워했던 우리들이였다. 다급하게 주제를 바꿔 오늘 어디서 잘건지 얘기했다. 훈림이는 멀지 않은 거리에 기부제로 운영하는 숙소가 있다며 거기 가자고 했다. 몇키로만 더 걸으면 숙소라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인데다 멀지않다고 하니 괜히 마음이 두근두근. 일단 가서 생각하자며 같이 걸어갔다.

IMG_8057.jpg 함께라면 두..두..렵지않...ㅇ...ㅏ..


다시 찾아온 오르막 산길에 나는 빠르게 지쳐갔다. 훈림이가 산에서 주운 나무 스틱을 체험해도 좀 나을뿐 힘겨웠다. 훈림이를 먼저 보내고 나는 다시 산중턱에서 혼자가 되었다. 조금 쉬다가 지친 마음으로 다시 땅만 보고 걸어가는데 갑자기 화살표가 나타났다. 매일 보던 노란화살표가 아니라 땅에 뜬금없이 나타난 나무로 만든 화살표였다. 방향 끝에는 큰 나무 스틱이 떡하니 박혀있었다.

아, 설마? 아까 훈림이랑 걸을 때 나무 스틱을 엄청 부러워하며 나도 이번 산길에서 주워야겠다며 큰소리 쳤다. 그 소리를 그냥 흘려보내지 못했던 착하디 착한 훈림이…가 준비한 나무 스틱 맞겠지? 누가봐도 내건데. 아닐리가 없는데. 합리화하며 스틱빨로 열심히 올라갔다. 그렇게 또 산 하나를 넘고나니 나무 아래 옹기종기 몇몇이 모여있다. 더이상 못 가겠다며 퍼질러 앉아버린 독일소녀 리아와 훈림이였다. 다행스럽게도 이 친구들의 선물이 맞았다. 휴. 리아가 준 과일을 오물오물 나눠먹으며 얘기를 좀 하다가 훈림이와 같이 걸었다. 걷다보니 뒤에서 융!!!! 소리친다. 왁 아재들이다! 우리 왜 이렇게 오래 못 만났냐며. 내가 나무로 화살표 방향 뒀는데 못 봤냐니까 그런거 없었단다. 아마 얘기하면 오느라 갈림길이라고 생각 조차 안했을지도 모르겠다.

IMG_8059.jpg 떡하니 나뭇가지가
IMG_8060.jpg 나도 드디어 생겼다
IMG_8058.jpg 귀하디 귀한 내 사진



매거진의 이전글더이상 혼자가 아닌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