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혼자가 아닌 나

서영은이 부릅니다

by sogongnyeon

오늘은 쉼표, 내일은 도돌이표 1

2019년 순례길을 걸으며 작성한 일기장을 열어보았어요. 액기스 기록만 가득한 일기장을 보며 그때의 기억을 덧붙여봅니다. 3년만에 만난 또 다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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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문앞에 모였고, 같이 발 맞춰 걷게 됐다. 오늘은 혼잣말이 아닌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걷기 시작했다. 해 뜨기 전 새벽이 아닌 해가 뜬 아침에 출발한다. 그 전에는 몰랐는데 참 죽기살기로 일어나서 걸었다 싶다. 물론, 그 덕분에 일출보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빨리 도착해야하니까 빨리 걸어야 돼!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보니 그랬구나 싶다.


처음에 걸은지 몇 분 안 되었을 때 안개가 자욱하게 온 도로에 깔려있었는데 아마 혼자였다면 스산하고 무서웠을 것 같다. 쫄보 본능 튀어나와서 어떻게든 그 구간을 빨리 지나가려고 했을텐데, 함께 걸으면서 가니 그런 무서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같이 걸으면서 제일 다른 점은 내가 고통에 덜 집중할 수 있고, 그러다보니 언제 도착할지 덜 집착할 수 있어서 조금 더 시야가 넓어지고 재밌는 일들이 많이 보인다. 물론 힘들었다. 산행이 예약된 루트라서 돌길과 오르막길을 올라갈 때 역시나 힘들어 헥헥거렸다. 무의식적으로 물집이 생긴 부분을 피해서 걸으려 하다보니 자세가 흐트러지고 온 몸 전체에 부담이 가서 더욱 힘들어지는 악순환을 오늘도 겪었다.

KakaoTalk_Photo_2023-04-08-09-47-43 002.png 잘 오고 있는지 체크해주는 스티브

그렇지만 가는길에 식물이나 열매를 잘 아는 스티브가 이거 먹어도 돼. 이건 무화과야. 아니 그거말고 이렇게 잘 익은거 한 번 먹어봐. 여기 감있어. 먹어볼래? 조금 걸어가다 열매 보상, 조금 더더 걷다 다른 달콤한 보상을 계속 만나는 도보여행의 단 맛을 느꼈다. 한 번은 감을 따먹고 있는데 어디서 노 프레스코. 를 외치며 나타난 중년의 현지인을 만났다. 몰래 따먹어서 혼나는건가 쫄고있는 나에게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따라오라 했다. 따라가니 잘익은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나무가 여러개 있었다. 여기있는거 다 따가도 된다면서 열심히 따서 내 손에 한가득 줬다. 혼자라면 감을 따먹을 생각도 못했을거고, 이런 일도 없었을텐데. 역시 파티원이 생기니 에피소드가 늘어나서 재밌다 싶었다.

KakaoTalk_Photo_2023-04-08-09-47-43 004.png 걸음이 느린 나와 파울루는 걷기 메이트

홍시같은 감을 마구마구 먹으면서 한참 걸어가다 걸음이 느린 나는 자연스럽게 조금씩 뒤쳐졌다. 다행인건 파울루도 걸음이 느린 편이라 나와 발 맞춰 잘 걸었다. 스티브와 피트는 걸음이 빠른 편인데 중간중간에 내가 잘 오고 있나 뒤를 돌아 체크해줬다. 에브리띵 이즈 오케이? 얼 유 오케이? 물어보기도 하고 나를 보며 미소 지으면서 응원을 대신하기도 했다. 화살표 방향이 반대쪽으로 각자 나있을 때는 여러 의견을 듣고 움직였고, 그 의견이 결과적으로 잘못된 방향이라 하더라도 같이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놀 수 있었다.

KakaoTalk_Photo_2023-04-08-09-47-43 007.png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하였사오나

맵스미냐 순례길 노란 화살표냐, 도대체 노란 화살표가 어딨냐, 이 길이 잘 못 되었을 때 알게모르게 나를 자꾸 자책하고 채찍질해서 나 자신을 작게 만드는 그런 짓을 그만할 수 있었다. 나는 책임을 진다는게 너무나 어려운지 화살표 하나 잘못봐도 나를 죽도록 패고 채찍질하는 사람이었다. 이거 하나도 제대로 못 봐? 난 왜 이렇게 겁이 많지? 이거 걷는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이런식으로 나를 자꾸만 목 졸랐다. 내 목을 졸라오는 다른 환경에서 도망쳐 이 곳으로 온건데, 여기서는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갑갑하게 만들었다. 마치 목 조르는 넥타이를 매는게 절대 벗을 수 없는 옷인 것 처럼 굴었다. 마치 피부라도 되는듯이. 같이 걸을 때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걷다보니 나의 발, 고통, 남은 거리를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카페에 들려 각자 취향대로 스티브는 커피,파울루는 탄산수를 2병, 피트와 난 사이다를 시켰다. 편하게 쉬고서 방명록을 쓰는데 내가 길게 쓰니까 파울루가 한국 라면 레시피 쓰냐고 놀렸다. 이런 이야기로 히히덕거리면서 걸을 수 있게되니 다른 생각들을 뒤로 미룰 수 있다.

KakaoTalk_Photo_2023-04-08-09-47-43 005.png 각자의 취향대로 드링킹
KakaoTalk_Photo_2023-04-08-09-47-43 006.png 라면 레시피 쓰냐고 놀렸던 그 방명록ㅋㅋㅋ

드디어 호스텔에 도착해서 우린 패밀리룸을 빌렸다. 사람이 넷이니 각자 침대를 쓰면서도 우리끼리 편하게 쓸 수 있고 도미토리랑 금액이 같거나 큰 차이가 없었다. 도미토리에서 웃도리고 아랫도리고 훌렁훌렁 벗어대는 20대 외국 사내들보다 화장실에서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오는 60대 아재들이 훨씬 편했다. 얘가 나한테 관심있어서 이러는건가. 그냥 뭐 한번 뭐 즐겨보자고 댐비는건가. 그냥 무한 스몰토크 하는건가. 조금의 가능성으로 귀찮은 생각들을 하게 만드는 20대 사내보다 그럴리 없는 60대 아재가 편했다. 첫 동행이라서 유독 마음이 많이 갔을지도 모르지만 여러모로 편했던 내 아재들, 지금 다 잘 살고 있나?

KakaoTalk_Photo_2023-04-08-09-47-43 009.png 그래서 안 힘들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 도착할 때 땀범벅
KakaoTalk_Photo_2023-04-08-09-47-43 008.png 씻고나서 시원한 맥주한잔
KakaoTalk_Photo_2023-04-08-09-47-43 003.png 맨날 고프로 찍는다고 꼽주던 피트지만 밝게 웃어준다 ㅋㅋㅋㅋ
KakaoTalk_Photo_2023-04-08-09-47-42 001.png 다들 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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