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은이 부릅니다
오늘은 쉼표, 내일은 도돌이표 1
2019년 순례길을 걸으며 작성한 일기장을 열어보았어요. 액기스 기록만 가득한 일기장을 보며 그때의 기억을 덧붙여봅니다. 3년만에 만난 또 다른 나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문앞에 모였고, 같이 발 맞춰 걷게 됐다. 오늘은 혼잣말이 아닌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걷기 시작했다. 해 뜨기 전 새벽이 아닌 해가 뜬 아침에 출발한다. 그 전에는 몰랐는데 참 죽기살기로 일어나서 걸었다 싶다. 물론, 그 덕분에 일출보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빨리 도착해야하니까 빨리 걸어야 돼!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보니 그랬구나 싶다.
처음에 걸은지 몇 분 안 되었을 때 안개가 자욱하게 온 도로에 깔려있었는데 아마 혼자였다면 스산하고 무서웠을 것 같다. 쫄보 본능 튀어나와서 어떻게든 그 구간을 빨리 지나가려고 했을텐데, 함께 걸으면서 가니 그런 무서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같이 걸으면서 제일 다른 점은 내가 고통에 덜 집중할 수 있고, 그러다보니 언제 도착할지 덜 집착할 수 있어서 조금 더 시야가 넓어지고 재밌는 일들이 많이 보인다. 물론 힘들었다. 산행이 예약된 루트라서 돌길과 오르막길을 올라갈 때 역시나 힘들어 헥헥거렸다. 무의식적으로 물집이 생긴 부분을 피해서 걸으려 하다보니 자세가 흐트러지고 온 몸 전체에 부담이 가서 더욱 힘들어지는 악순환을 오늘도 겪었다.
그렇지만 가는길에 식물이나 열매를 잘 아는 스티브가 이거 먹어도 돼. 이건 무화과야. 아니 그거말고 이렇게 잘 익은거 한 번 먹어봐. 여기 감있어. 먹어볼래? 조금 걸어가다 열매 보상, 조금 더더 걷다 다른 달콤한 보상을 계속 만나는 도보여행의 단 맛을 느꼈다. 한 번은 감을 따먹고 있는데 어디서 노 프레스코. 를 외치며 나타난 중년의 현지인을 만났다. 몰래 따먹어서 혼나는건가 쫄고있는 나에게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따라오라 했다. 따라가니 잘익은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나무가 여러개 있었다. 여기있는거 다 따가도 된다면서 열심히 따서 내 손에 한가득 줬다. 혼자라면 감을 따먹을 생각도 못했을거고, 이런 일도 없었을텐데. 역시 파티원이 생기니 에피소드가 늘어나서 재밌다 싶었다.
홍시같은 감을 마구마구 먹으면서 한참 걸어가다 걸음이 느린 나는 자연스럽게 조금씩 뒤쳐졌다. 다행인건 파울루도 걸음이 느린 편이라 나와 발 맞춰 잘 걸었다. 스티브와 피트는 걸음이 빠른 편인데 중간중간에 내가 잘 오고 있나 뒤를 돌아 체크해줬다. 에브리띵 이즈 오케이? 얼 유 오케이? 물어보기도 하고 나를 보며 미소 지으면서 응원을 대신하기도 했다. 화살표 방향이 반대쪽으로 각자 나있을 때는 여러 의견을 듣고 움직였고, 그 의견이 결과적으로 잘못된 방향이라 하더라도 같이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놀 수 있었다.
맵스미냐 순례길 노란 화살표냐, 도대체 노란 화살표가 어딨냐, 이 길이 잘 못 되었을 때 알게모르게 나를 자꾸 자책하고 채찍질해서 나 자신을 작게 만드는 그런 짓을 그만할 수 있었다. 나는 책임을 진다는게 너무나 어려운지 화살표 하나 잘못봐도 나를 죽도록 패고 채찍질하는 사람이었다. 이거 하나도 제대로 못 봐? 난 왜 이렇게 겁이 많지? 이거 걷는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이런식으로 나를 자꾸만 목 졸랐다. 내 목을 졸라오는 다른 환경에서 도망쳐 이 곳으로 온건데, 여기서는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갑갑하게 만들었다. 마치 목 조르는 넥타이를 매는게 절대 벗을 수 없는 옷인 것 처럼 굴었다. 마치 피부라도 되는듯이. 같이 걸을 때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걷다보니 나의 발, 고통, 남은 거리를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카페에 들려 각자 취향대로 스티브는 커피,파울루는 탄산수를 2병, 피트와 난 사이다를 시켰다. 편하게 쉬고서 방명록을 쓰는데 내가 길게 쓰니까 파울루가 한국 라면 레시피 쓰냐고 놀렸다. 이런 이야기로 히히덕거리면서 걸을 수 있게되니 다른 생각들을 뒤로 미룰 수 있다.
드디어 호스텔에 도착해서 우린 패밀리룸을 빌렸다. 사람이 넷이니 각자 침대를 쓰면서도 우리끼리 편하게 쓸 수 있고 도미토리랑 금액이 같거나 큰 차이가 없었다. 도미토리에서 웃도리고 아랫도리고 훌렁훌렁 벗어대는 20대 외국 사내들보다 화장실에서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오는 60대 아재들이 훨씬 편했다. 얘가 나한테 관심있어서 이러는건가. 그냥 뭐 한번 뭐 즐겨보자고 댐비는건가. 그냥 무한 스몰토크 하는건가. 조금의 가능성으로 귀찮은 생각들을 하게 만드는 20대 사내보다 그럴리 없는 60대 아재가 편했다. 첫 동행이라서 유독 마음이 많이 갔을지도 모르지만 여러모로 편했던 내 아재들, 지금 다 잘 살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