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순례길을 걸으며 작성한 일기장을 열어보았어요. 액기스 기록만 가득한 일기장을 보며 그때의 기억을 덧붙여봅니다. 3년만에 만난 또 다른 나
발리에서 한달 여행을 하고 유럽으로 넘어왔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걸어보고 싶은 순례길이였고, 딱히 가고싶은 곳은 없고 돈도 없으니까 단순하게 지금이 적기구나 싶었다. 자아를 찾고 어쩌고가 아니라 그냥 딱히 이유없이 선택한거라 사서 고생하고 싶진 않았다. 2주 코스인 포르투갈에서 뻗어진 순례길을 걷기로 했다. 그 소식을 들은 가까운 친구가 2주뒤에 휴가를 내고 오겠다 했다. 고독함에 적당히 쩔여져있을 때 친구가 와서 짜잔 외로웠지? 하고 같이 하하호호 노는 여행 너무 완벽했다. 역시 계획이 없어야 일이 술술 풀린다 싶었다. 그렇게 리스본으로 갔다.
진짜 될놈될안될안(될놈은뭘해도되고안될놈은안되는거) 아니냐며 아무 생각 없이 선택한 순례길에 친구 휴가 잘 맞췄다고 깔깔 거리더니 아니 4주 코스 무슨소리냐며 혼자 이랬다 저랬다 그 날 하루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배고파서 헛것이 보이나 싶어 괜히 나가서 밥도 거하게 먹고와서 다시 책자를 폈는데 정말 4주코스였다. 그럼 뭐 어떡해. 뭐 내가 코스에 맞춰야지. 2주 걷고 포르투에서 만나서 재밌게 놀고 다시 리스본으로 와서 놀고.. 다시 걷거나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는게 맞겠다. 내 건강에 그게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사고 회로를 껐던 것 같다. 외국인 친구가 수퍼나이스 걸이라고 한마디 건네준게 어찌나 고마웠는지 내 뇌리에 박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뭐가됐든 내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걸을거라며 알람을 야무지게 맞추고 잤다.
처음에 순례길을 걷는데 노란 화살표랑 아직 친해지지 않아서인지 애초에 사전 지식이 하나도 없던 탓인지 화살표 보다는 맵스미 어플로 가는 길을 찾아보고 다녔다. 그러면서 길을 자주 잃어버렸다. 가고자 하는 알베르게를 구글맵에 쳤을 때 닫혀있다는 정보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9시가 되니 해가 쨍쨍하게 뜨기 시작해 점점 걷기가 어려워졌다. 걸은지 4시간 지났을까 배는 고픈지 한참 됐는데 점점 해가 뜨거워져서 밥 먹을겸 쉬는게 좋을지 먹고 나면 퍼져버려서 걷기가 어려워질런지 도저히 감이 안왔다. 일단 뜨거운 해는 피해야겠다 싶어서 어느 식당으로 갔고 햄버거를 주문했는데 뜨거운 국물이 나와 아주 실망했다. 뜨거운 국물은 내 온몸에 기운을 전해줘서 실망과 달리 든든했다.
순례길에서 맞이하는 첫 식당이니까 직원에게 스탬프를 찍어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어떤 계단으로 올라가 사무실 같은 공간에서 스탬프도 받고 순례길 관련 지도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직원은 한 쪽 다리가 불편해서 다른 다리로 의지해서 계단에 올라가고 스탬프를 찍어 다시 1층으로 함께 내려왔다. 아 이렇게까지 받고 싶은건 아니였는데.. 뒤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가 바보같았다. 그 때는 참 어쩔줄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고 상대방이 필요하다고 말해주면 도움을 드렸으면 되는 부분인데 동정과 미안함과 어쩔줄 몰라하는 눈빛만 가득채우고 아무 손도 내밀지 않는 내가 얼마나 차갑고 못 배운 사람 같았을까. 미안함 마음을 가득 담아 무또 오브리가도(감사합니다!)를 만세삼창 하고나서야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예상한대로 먹고 나오니 조금 잠이 왔다. 너무 든든하게 먹었나. 앞으로는 조금 덜 먹어야지 생각하며 출발했다. 아직 절반도 못 왔는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고,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또 화살표를 놓쳐 제대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사람도 보이지 않고 두려움이 가득찰 때 쯤 한번씩 화살표가 보였다. 처음부터 화살표대로만 가면 아무일 없을텐데 맵스미 빠른길과 노란 화살표를 재느라 의도치않게 밀당하는 순례길이 되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아주 크게 틀어놓고 목청 터져라 노래 부르고 그러다 지치면 춤추면서 걷기도 했다. 이 길에 나 혼자라는 해방감. 내가 마음껏 소리치고 이상한 막춤을 춰도 상관없었다. 다 내 세상이라는 즐거움에 만끽하다 갑자기 지나가는 비행기 굉음에 쫄았다. 쫄보의 모먼트를 건드린 비행기는 사라졌지만 돌아갈 수 없는 쫄보는 그제서야 사람이 아무도 없고 개 조심하라는 표지판에 곳곳에 있다는걸 알게됐다. 아 맞다.. 오기 직전에 커뮤니티에서 포르투갈길 특히 들개 조심하라며 어떤 사람들은 들개 때문에 순례길을 포기했다는글도 봤었지.. 머릿속에 이런 저런 무서운 상상들이 떠돌아다녔다. 쫄지 않은 척 할려고 다나와! 괜히 큰 소리를 내봤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샤샤샥- 노래에 놀래서 앞만 보고 뛰었다. 그 이후에도 샤샥- 누군가가 나올 것 같은, 내 뒤에 누군가가 있을 것만 같은, 귀신이든 사람이든 개든 뭐가 됐든 무서운 소리에 앞만 보고 자주 도망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소리였다. 간만에 복근운동 제대로 했다. 깔깔 거리면서 웃어대도 또 아무도 없다.
지치고 힘들고 웃기고 슬프고 비가와서 무섭고 들개가 나올까봐 두렵고 심리상태가 A부터 Z까지 가느라 바빠도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가장 무서웠다.
깨알정보
- 순례길을 걸을 때는 크레덴셜(순례자증서)이 있어야 알베르게에서 잘 수 있다.
- 리스본에서 걷는다면 대성당에서 크레덴셜 발급받고, 작은 책(루트랑 숙박정보가 나와있는)을 구매할 수 있다.
- 순례길에 있는 대부분 음식점, 카페, 심지어 과일가게에서도 스탬프 부탁드려요(쎄요, 뽀르빠뽀르)라고 말하면 주인장들이 찍어준다. 스탬프 컬렉션 하시는 분들도 많았다!(나도 그럴걸!)
관련 영상 : https://youtu.be/1NSj9PGF2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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