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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위의 그녀들, 시대를 말하다

이탈리아 국립 카포디몬테 19세기 컬렉션: 나폴리를 거닐다

by 이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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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를 보고 죽어라(Vedi Napoli e poi muori)!"


오래전부터 유럽의 예술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이 말의 의미를, 나는 나폴리의 해안을 직접 거닐었던 순간 어렴풋이 짐작했다. 수평선 너머로 부서지던 푸른 파도, 절벽을 따라 알록달록하게 늘어선 집들, 레몬 향기 가득한 골목과 그곳을 채우던 사람들의 여유로운 미소. 마치 영화 '맘마미아'의 한 장면처럼, 지중해의 낭만이 살아 숨 쉬는 동화 같은 곳이었다. 그 찬란했던 햇살과 생동감 넘치던 풍경을 다시금 회화로 마주할 수 있다니,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마음이 설레었던 것이다.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
이제야 이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것 같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탈리아 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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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성동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아시아 최초로 선보이는 <이탈리아 국립 카포디몬테 미술관 19세기 컬렉션: 나폴리를 거닐다>는 바로 그 나폴리의 정서와 풍경이 19세기 회화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조망하는 전시다. 괴테가 찬탄했던 19세기의 나폴리는 더 이상 그대로 존재하지 않지만, 이번 전시는 그 감흥의 한 조각을 다시금 마주하게 했다.


전시의 심장부에는 이탈리아 남부 최대 규모의 국립 미술관인 카포디몬테 미술관이 있다. 1734년, 카를로 디 부르봉 왕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방대한 미술 컬렉션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왕궁에서 유래한 이 미술관은 라파엘로부터 앤디 워홀에 이르기까지, 서양미술사를 아우르는 보고와도 같은 곳이다. 이번 전시는 그중에서도 특히 19세기 나폴리 미술 컬렉션에 집중하여, 유화, 파스텔, 수채화 등 총 74점의 명작을 통해 이탈리아 남부가 겪은 격동의 시대와 그 속의 삶을 펼쳐 보인다. 군주제에서 이탈리아 통일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예술가들은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를 거쳐 이탈리아 남부 특유의 정서를 담아낸 '베리즈모(Verismo)'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시대의 얼굴을 그려냈다.


전시는 크게 두 가지 줄기를 따라 흐른다. 하나는 회화 속 여성의 형상이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남부의 일상과 자연을 담은 풍경이다. 특히 여성을 중심으로 당대의 사회적 가치관과 감수성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구성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여인이여, 끝없이 아름다운 신비여!"

- 귀도 고차노 -


1부 'Female Images, 그녀들을 마주하다'는 19세기 여성상의 변화를 따라간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귀족과 서민으로 양분되던 사회에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계급을 탄생시켰고, 이는 '이상적 여성상'에 대한 새로운 주제를 만들어냈다. 가정의 수호자이자 자녀 교육의 주체, 그리고 사교계를 이끄는 살롱의 주역까지, 여성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다채롭게 조명되었다.


19세기 여성상의 변화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 기준점이 되는 '귀족 여성'을 먼저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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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볼디니의 <마르시코노보 공작부인의 초상>은 그 우아함의 정점을 보여준다. 특유의 빠른 선묘와 섬세한 관찰력으로 포착한, 친구의 부름에 살짝 고개를 돌린 듯한 젊은 여성의 모습. 정돈된 머리카락과 넓은 챙 모자에 둘러싸인 기품 있는 얼굴에서 상류층 여성의 안락하고 세련된 삶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림을 마주하는 순간, 교양과 품위가 공간을 압도하는 듯한 고급스러운 감각에 휩싸였다.


반면 '서민 여성'의 초상은 따스하고 친근한 온기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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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사실주의 화가 필리포 팔리치의 <목초지의 목동 소녀>는 풀을 뜯는 염소 곁에서 묵묵히 풀을 모으는 소녀의 모습을 다정하게 그렸다. 붉은 옷을 입은 소녀와 대지의 갈색, 녹색, 그리고 따스한 하늘빛의 강렬한 대비는 고된 노동의 현장마저 한 폭의 평화로운 풍경으로 바꾸어 놓았다. 귀족 여성의 그림과는 사뭇 다른, 삶의 온기가 캔버스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사실주의 화풍 덕분인지 소녀의 표정은 물론 염소들의 몸짓까지 생생하게 느껴져, 마치 그 시대 서민들의 삶을 바로 곁에서 들여다보는 듯했다.


전시는 문학 작품의 서사를 시각화하거나 시대상을 배경으로 문학적 정서를 담아낸 '이상과 문학의 여성상'으로 이어진다. 연인의 편지를 손에 쥔 채 밀라노 시내를 바라보는 여인을 그린 <편지>는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시대적 이상을, 서로를 껴안은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공포>는 연약함과 불안 이면에 담긴 시대의 비극을 드러냈다. 특히 이 시기 그림들은 개인의 고통을 넘어 목소리를 잃었던 여성들의 슬픔을 대변하며 깊은 울림을 주었다.


1부가 끝나면 잠시 숨을 고르는 '인터미션'이 마련되어 있다. 나폴리를 수도로 두었던 양시칠리아 왕국이 이탈리아 통일 운동 '리소르지멘토'를 거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과정, 그리고 바로크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신고전주의'나 동양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담은 '오리엔탈리즘' 같은 미술 사조에 대한 설명은 이후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이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나니, 왜 그토록 애국적인 주제가 여성상에 투영되었는지 비로소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어지는 '동방의 매력' 섹션은 오리엔탈리즘 화풍이 여성을 얼마나 대담하고 매혹적으로 표현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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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초 부시롤라노의 <가엾은 사포>는 절벽에서 생을 마감하기 직전,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그리스 시인 사포의 공허한 눈빛을 담았다. 아름답지만 아련하고, 슬프도록 낭만화된 여성의 모습은 오리엔탈리즘이 품고 있던 서구의 시선을 명확히 드러냈다.


그리고 마침내 '신흥 사회'의 주역, '중산층 여성'이 등장한다. 평온하고 여유로우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그들의 모습은 흥미로웠다. 상류층 여성의 옷차림과 태도를 따라 하면서도 그들과는 다른, 좀 더 자유롭고 당당한 분위기를 풍겼다. 상류 사회에 대한 동경과 욕망,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을 가꾸고 표정을 연출하는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겹쳐 보여 인간적인 친밀함마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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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이번 전시의 포스터와 대표 굿즈로 사용된 그림은 모두 화려한 귀족이 아닌, 우리와 닮은 서민이나 중산층 여성의 그림이었다. 이는 결국 대중의 마음을 끄는 것은 완벽한 이상이 아닌, 삶의 희로애락이 담긴 '사람다운' 모습이라는 방증일 것이다. 상류층의 그림보다 중산층의 그림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는 사실 자체가 이번 전시가 주는 특별한 인사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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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이야기를 지나면, 전시는 드디어 나폴리의 심장인 '지중해'로 관람객을 이끈다. 19세기 풍경화가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인간의 유산이 더해진 장소를 찾아 헤맸고, 나폴리만은 그들에게 최고의 영감을 선사했다. 포실리포 학파의 화가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힘, 아름다움과 위험이 공존하는 '숭고함'을 화폭에 담았다. 해변에서 밧줄을 만드는 노동자들의 고된 일상 뒤로 보이는 베수비오 화산과 아름다운 건물들의 조화는 단순한 풍경화를 넘어 당시 나폴리의 삶을 증언하는 생생한 기록으로 다가왔다.


전시의 마지막, 19세기 나폴리의 실제 모습이 담긴 흑백 영상과 사진 자료는 그림의 감동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화룡점정이었다. 해안가에서 일하는 밧줄공들, 폼페이 유적지를 거니는 사람들, 마카로니를 손으로 먹는 서민 가족의 모습. 지금은 유적지가 된 곳이 그들에게는 삶의 터전이었고, 그림 속 풍경이 실제 그들의 일상이었음을 확인하는 순간, 시대를 뛰어넘는 깊은 교감이 밀려왔다. 작년에 내가 보았던 이탈리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옷차림만 바뀌었을 뿐, 도시의 골격과 분위기는 100년이 넘는 시간을 관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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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를 거닐다>전은 단순한 미술 전시가 아니었다. 한 편의 거대한 역사서를 읽는 느낌이었다. 여성의 얼굴과 몸짓을 통해 한 시대의 이상과 욕망을 읽고, 풍경 속에서 그들의 삶과 숨결을 느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더 이상 캔버스에 갇힌 19세기의 유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하고, 고뇌하고, 꿈꾸었던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아름다운 그림을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대를 목격하고 그들의 삶을 애도하며 현재 우리의 삶을 되비춰 본 것이다. 예술이란 이렇듯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공유하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매개체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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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떠납니다.
톨레도 거리와 도시 전역을 내려다보는 그 장관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내 눈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폴리는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 스탕달, <로마, 나폴리 그리고 피렌체>, 1817


스탕달의 고백처럼, 나폴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였다. 그 찬란한 우주를 잠시나마 거닐고 싶다면, 이 전시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풍경이 바로 이곳에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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