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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난 수필

#미야의 브런치 글빵연구소 과제_ 졸업작품_도입수정

by 빛나는

몇 달 전, 수필반 합평 시간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작가님은 내 글에 연필로 쫙쫙 엑스 표시를 그었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문학에 대한 지식 없이 써내려 간 첫 수필이라 모난 곳이 많았을 테지만 당황한 표정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초보자인 티를 내비치고 싶지 않아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작가님이 말을 이어갈 때마다 가슴이 요동쳤다. 숨을 죽이고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이 표현은 참신해서 좋으니 살려야 한다는 말이 들렸다. 그 문장에는 기다란 동그라미가 그려졌고 위에는 작은 별도 하나 달렸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불안한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집에 돌아와 너덜너덜해진 종이를 펼쳐 보았다. 합평에서 들었던 여러 의견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혼자 읽었을 때는 분명 잘 쓴 것 같았는데 다른 시선으로 보니 어색한 표현이 많았다. 우선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서 빈 화면에 깜박이는 막대기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뱉고, 배운 내용을 곱씹어 보았다.


수필에는 내 기분을 그대로 적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은근하게 돌려서 말하되, 핵심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한다고. 이렇게 어려운 말이 또 있을까 싶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정성껏 평을 해 주셨으니 어떻게든 고쳐야 했다. ‘확 짜증이 났다.’ 같은 내용은 지우고 그때의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되짚으며 하얀 공간을 채워 나갔다. 각진 모서리를 하나씩 다듬으니 어렴풋이 수필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듯했다.


두 번째 작품을 쓸 때는 직접적인 감정을 전부 덜어내고 구체적인 장면을 그려보고자 노력했다. 혹여라도 읽는 사람이 이해를 못 할까 싶어 앞뒤 전후 사정을 다 적었다. 글은 친절해야 한다는 소리에 힘을 받아 계속 살을 덧붙였다. 당연히 내용은 점점 장황해졌다. 불필요한 문단이라는 게 느껴졌지만, 삭제해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일단 최종본을 만들어 합평 자리에 나갔다.


내 글에 적힌 ‘알았다, 깨달았다.’라는 문장에 네모 박스가 쳐졌다. 옆에는 빨간 체크 표시와 함께 빼기 부호가 달렸다. 글쓴이가 느낀 점을 강요하는 듯하고 설명이 많아 독자가 느낄 틈이 없다는 말이 나왔다. 구구절절한 부분은 전부 덜어내고 여운을 남기는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어떤 작가님은 초고는 다 쓰레기니 괜찮다는 위로를 건넸다. 초안이지만 열심히 썼는데. 제대로 알려준 사람이 없었다는 부끄러운 변명만 튀어나왔다. 그 작가님은 글을 쓸 때 참고하라며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과 오정희의 「소음공해」를 권해주었다.


새벽까지 두 소설을 번갈아 읽었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고 장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다가오는 울림이 컸다. 이렇게 쓰는 거구나. 짧지만 깊은 작품을 몇 번 읽고 나니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사건을 눈앞에서 보듯 느낄 수 있도록 감각적인 언어를 사용해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것. ‘묘사’에 꽂혀 세 번째 작품을 써 내려갔다. 내가 겪었던 장면을 최대한 생생하게 녹여낼 수 있도록 애를 썼다. 여운이 가득한 글을 썼다고 기뻐하며 합평 시간만 기다렸다. 하지만 예리한 평가가 날아왔다.


뭔가 잘 쓴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소설인지 수필인지 장르부터가 애매하다고 했다. 묘사는 모든 문학의 기본이라고 했는데. 날카로운 말에 나는 또 작아졌다. 내가 의도했던 주제가 사람들에게 전혀 다가가질 못했다. 내 안에서는 선명했던 그림이 다른 이의 스케치북에서는 엉성한 작품이 되었다.


여러 의견이 빼곡히 적힌 무거운 종이를 보며 상념에 빠졌다. 이름난 예술가처럼 세상이 내 뜻을 모른다며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막 연필을 잡은 사람 아닌가. 서투른 건 당연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다시 책상에 앉았다. 기필코 모두에게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해 보이리라.


열정적인 다짐을 했지만, 며칠을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봤다. 방 안에서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다가 침대에 눕기를 반복했다. 답답함에 유명한 작법서를 뒤져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결같이 꾸준히 써봐야 한다는 말뿐이었다. 나의 글은 오로지 내 손끝에서만 다듬어질 수 있었다. 각오를 다지고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내가 쓴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붙잡고 오래도록 살폈다. 화면 안에서 봤을 때는 괜찮은가 싶다가도 출력해서 보면 걸리는 곳이 많았다. 빨간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글을 매만졌다. 다 됐나 싶어 소리를 내서 읽어보면 또 깎아낼 부분이 보였다. 다음엔 파란 볼펜을 들어 고치고 또 고쳤다. 큰 조각을 떼어내듯 문단 전체를 도려내고 세밀한 작업을 하듯 조사 하나까지 확인했다. 완성이라 여겨져도 다음날 보면 또 삐죽 모난 곳이 튀어나왔다. 수정해야 하는 부분이 끊임없이 나왔지만, 점차 매끄러워져 감을 느꼈다. 파일명 뒤에 붙은 최종이라는 단어가 최최종, 최최최종으로 늘어갔다. 더 이상 ‘최’를 이어갈 수가 없어 숫자로 바꿨다.


가장 많은 퇴고를 거친 작품을 합평 자리에 내보였을 때, 이제야 수필다운 글을 쓴다는 말을 들었다. 여전히 고쳐 써야 할 게 있었지만,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깎아낸 흔적이 가득한 종이를 보며 벅찬 감동저 밀려왔다. 드디어, 내 글이 누군가에게 또르르 굴러가고 있구나. 파일 이름에 붙은 숫자를 올려 적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어느 작가님은 한 편의 수필을 완성하기 위해 몇 달을 고심한다고 했다. 어떤 건 1년이 걸리기도 하고 평생 미완으로 남는 것도 수두룩 하다고. 미련하다고 여겼던 그 말이 비로소 내 안에 들어왔다. 내 작품이 더 많은 이에게 닿는 날이 올 때까지, 함께 다듬어지는 나의 시간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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