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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무덤

#미야의 브런치 글빵연구소 과제_ 성찰을 담은 아픈 글쓰기

by 빛나는

‘오랜만에 뭉쳐 신난 우리들’

친구의 싸이월드에 게시된 사진 아래 쓰여 있는 한 줄이었다. 핸드폰 화면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어두운 정장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 앞에는 빈 술병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카메라를 보고 웃는 얼굴들은 모두 내 어깨를 부여잡고 울었다. 47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빠를 애도하며 함께 눈물을 쏟았다. 집에 자주 놀러 와 식구들과 가깝게 지냈던 이들도 여럿 있었다. 순간 멍해졌다.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핸드폰을 뒤집어 바닥에 내려놓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십 분 정도 흘렀을까. 무릎을 펴고 일어나 검은 치마를 툭툭 털었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고 주머니에 있던 흰 리본 핀을 다시 머리에 꽂았다. 대충 세수를 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침 조문객이 들어와 글썽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여기까지 와줘서 감사하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문을 나가는 순간 아빠의 죽음은 잊어버리겠지. 내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한 사람의 죽음은 영화같이 흘러가지 않았다. 내 앞에 놓인 현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차가웠다.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 터질듯한 눈물을 멈추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서류 더미였다. 병실에 심장이 멎었음을 알리는 강렬한 기계음이 퍼지자, 간호사는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손으로 얼굴을 슥슥 문대고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복도 중간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종이 여러 장을 꺼냈다. 나는 엉겁결에 볼펜을 쥐고 가리키는 곳에 서명했다. 쏟아지는 설명을 들으며 네모난 칸에 내 이름 석 자를 몇 번이나 적었다.


“다 됐습니다.”

이제 다시 슬퍼하면 되는 건가. 여전히 흐느끼고 있는 엄마와 동생의 뒷모습이 어색했다. 울음은 이미 말라버렸다. 그저 주위를 감도는 묵직한 기운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머릿속이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로 가득했다. 나는 핸드폰을 켜서 삼촌에게 연락했다. 장례식장을 알아보는 일부터가 난관이었다. 아빠가 숨을 거둔 곳은 서울 외곽에 있는 병원이었다. 최대한 손님들이 오기 편한 곳으로 정해야 했다.


형을 잃었다는 소식을 접한 지 몇 분 되지 않아 교통편이 좋은 장례식장을 예약하느라 고심하고 있을 삼촌을 떠올리니 왠지 서글펐다. 한두 시간정도 지나고, 아직 온기가 맴도는 아빠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힘들게 구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희미한 가로등이 켜진 거리를 보며 생각했다. 과연 죽은 자는 무덤에만 묻히는 걸까.


그 짧았던 사흘은 오래도록 내 속에 남아 있다. 16년이나 지났음에도 잊기 어려운 기억이었다. 이후 여러 죽음을 목도하며 그때의 감정은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당시 냉담하게 느껴졌던 타인의 반응이 이해되기도 했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얼마 전, 문자를 한 통 받았다. 대학교 동기의 부친상을 안내하는 전체 메시지였다. 졸업 후 자주 연락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투병 중이라 힘들어한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었다. 장례식장이 군산이라 차로 4시간은 가야 했다. 일정을 조율하는 것도 만만치 않아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가는 김에 바람을 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는 뻔한 답장을 보내고, 인터넷 검색창에 ‘군산’을 입력했다.


조문을 마치고 오래간만에 만난 동기들과 웃고 떠들며 종일을 돌아다녔다. 옛날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어두운 정장은 자연스럽게 묻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즐거웠던 하루를 자랑하며 이야기했다. 갑자기 줄곧 떠들던 입이 다물어졌다. 어떤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내가 이 사진을 올릴 인스타 계정이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날 밤은 제대로 잠에 들지 못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가볍게 지나친 내 태도에 자책감이 밀려왔다. 그러다 문득, 아빠를 향한 마음마저 건조하게 바뀌어 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빠의 기일이 있는 12월이 되면 온 가족이 모여 위령미사를 드리곤 했다. 나는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장녀로서 효를 다하기 위해 매번 미사에 참석했다. 처음엔 감동이었다. 사람들이 아빠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해주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점점 지루해졌다. 1년에 한 번인데도 날짜가 다가오면 귀찮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수시로 확인했고, 어떤 해는 대놓고 핸드폰을 열어 딴짓하기도 했다. 결국 제 작년에는 임신을 핑계로 30분이나 지각을 했고, 작년에는 태어난 아기를 내세워 아예 가지도 않았다. 나는 아빠를 잊어가고 있었다.


나의 학창 시절에는 핸드폰이나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다. 특별한 날이 되면 희뿌연 사진을 찍어 싸이월드에 올리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홈페이지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 쥔 아빠 사진이 거의 없었다. 소리가 들리는 영상은 전무했다. 엄마가 저장해 둔 몇 개, 동생이 싸이월드 복구 이벤트에서 건진 몇 개가 전부였다. 내가 살아갈 수많은 날 동안 고작 이것들로만 아빠를 추억해야 했다.


“아빠가 병원에 입원한 날짜는 왜 물어봐?”

엄마는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의아해하며 나를 쳐다봤다. 이내 방에 들어가더니 노란 플라스틱 상자를 가져왔다. 커다란 뚜껑을 열어보니 수첩이 가득 들어있었다. 엄마가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장이었다. 쉬지 않고 훑어보기만 해도 족히 일주일은 걸릴 것 같은 양이었다. 작은 방에 이런 상자가 더 있다고 말했다. 엄마는 손을 넣어 안을 뒤적거리며 2008년이 새겨진 수첩을 꺼냈다. 먼지 냄새를 풍기며 펼쳐진 수첩에는 그 해의 아픔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엄마는 나의 물음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은 채, 주름진 손으로 얇은 종이를 넘겼다. 마치 아빠와 둘만의 시간을 속삭이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질문을 잠시 넣어두고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다. 모처럼 느끼는 애틋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오늘도 컴퓨터를 켠다. 어제 작업하던 파일을 열어두고 앞에 노트도 편다. 가족 모임 때마다 우리의 입을 통해 되살아나는 아빠를 옮겨 둔 공책이다. 간략하게 적어두었던 단어들을 참고해서 몇 개의 문장을 만든다. 완성된 단락을 재차 살펴보며 어색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고 출력도 한다. 빨간 볼펜을 들고 침대에 누워 내가 쓴 글을 소리 내서 읽고 점검을 거듭한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혼자 울컥하기도 하면서. 이렇게 매일 아빠를 기록한다. 빈자리를 되새기고 그곳에 나만의 문장을 채워 넣는다.


아빠의 부재를 언급하길 피하고, 어떤 때는 무관심한 척하기도 했던 지난날. 이제는 혼자 가슴에 묻어둔 아빠를 꺼내 보려 한다.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 있고, 오래도록 추모할 수 있도록. 함께했던 시간의 조각들을 묶어내는 일, 나는 지금도 아빠의 두 번째 무덤을 써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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