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작가님 소설반 글쓰기 숙제 - 10 (계절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글)
캔맥주를 따는 소리가 유난히 청량하게 들리는 계절이었다. 짐을 챙기느라 바쁜 와중에도 한 손에는 맥주를 놓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맥주를 냉기가 가시기 전에 다 먹으려면 330ml가 딱이었다. 초록빛 캔에 빨간 별이 그려져 있는 시원한 하이네켄과 설렘에 취해 점점 상기되는 내 얼굴. 그렇게 호주에서의 성탄절이 시작되었다.
가방에는 짧은 청바지와 베이지색 얇은 리넨 카디건을 넣었다. 해변에 놀러 갈 때, 빠질 수 없는 비키니도 같이 챙겼다. 검은색이지만 자수로 꽃무늬가 들어가서 화려함이 돋보이는 수영복이었다. 어젯밤,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포즈 연습을 했는지. 볼록 튀어나온 아랫배를 가리기 위해 몸을 이쪽저쪽으로 꼬아댔다. 한국이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차림이었다.
문 밖에는 따가운 햇볕이 기다리고 있었다. 곧장 선글라스를 찾아 끼고 빛을 뿜어내는 태양을 바라봤다. 두껍게 코팅된 검정 안경알을 뚫고 그 이글거림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눈 속에서 금빛 해무리가 일렁거렸고, 내 마음도 따라 출렁거렸다. 이번 달이 벌써 20일도 넘게 흘렀지만, 12월의 뜨거움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됐다.
서큘러키(Circular Quay) 역은 이른 시간부터 빨간색을 입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페리의 탑승 시간도 잊은 채, 홀린 듯이 커다란 트리 앞으로 걸어갔다.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서 꼭대기에 달린 노란 별을 쳐다봤다. 귓가에는 캐럴 소리가 울려 퍼졌고, 주변은 형형색색의 전구들로 반짝였다. 삐죽한 나뭇잎 틈으로 건조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헤어드라이기를 켜놓은 것 같은 텁텁함이 옷 사이로 스며들었다. 지구 반대편에 와있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흥겨운 맨리비치(Manly Beach)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발끝에 닿는 모래의 감촉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맨발로 바다로 뛰어드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금방이라도 화상을 입을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렇게나 벗어두었던 신발을 재빨리 주워 신고, 조심스레 한 발짝씩 물가로 향했다. 강렬한 태양과 쨍한 하늘 밑에서 수줍게 밀려오는 하얀 파도가 내 다리를 간질였다. 따뜻한 감촉이 계속해서 발등을 쓰다듬었다. 더운 날씨 속에 섞인 묘한 따스함. 몽글거리는 거품이 조용히 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또다시 다가올 온기를 기다렸다.
저 멀리 깊은 파도가 몰아치는 곳에서는 몇몇이 서핑보드에 누워 팔을 휘젓고 있었다. 해변가에는 허벅지와 팔뚝을 훤히 드러낸 옷을 입고 산타 모자를 눌러쓴 사람들이 보였다. 잊고 있었던 머리띠가 생각나 서둘러 가방에서 꺼냈다. 앙증맞은 초록 트리와 갈색 루돌프가 양쪽에 하나씩 붙어있는 모양이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가 싶어 조금 창피했지만 기념사진을 남기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찰칵 소리와 함께 화면에 담긴 풍경과 부끄러운 표정의 내 얼굴, 오래도록 잊지 못할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