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지 않는 마음

정윤 작가님의 글쓰기 10강 숙제 - 계절감과 분위기 표현하기

by 나야

차문을 열자 냉기가 밀고 들어왔다. 유리창 안에서 햇살을 받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온도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해가 머리 위에 떠있었지만 주머니에서 손을 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볼을 에는 바람이 햇살을 이겨먹는 날씨였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남편에게 말했다.


여기도 없으면 어떡하지?


있을 거야, 설마.


우리는 '갓'을 사러 다니는 중이었다. 아삭하고 톡 쏘는 갓김치 특유의 맛에 반해 해마다 사 먹다가 이번에는 직접 담가보기로 했다. 엊그제 배추김치에 쓰고 남은 양념도 있겠다, 싱싱한 갓만 구하면 되니까. 한데 몇 주 전까지 그 많던 갓이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감추었다.


앞서 마트 세 곳을 둘러봤지만 갓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잎이 누렇게 시든 것뿐이었다. 오 마이 갓. 아무리 김장철이라도 갑자기 이렇게 인기 급등이라고? 막상 없다고 생각하니 괜한 오기가 발동했다. 반드시 갓김치를 만들어먹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찾은 곳이 바로 전통시장이었다.


노점을 지나쳐갈 때 물건보다 상인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장사하는 그들의 주름진 손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서너 명이 둘러앉아 늦은 점심을 먹는 모습도 보였다. 한 손에 도시락이나 비빔밥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밥을 뜨고 있었다. 불현듯 목 안이 선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식도를 타고 식은 밥 한 덩이가 미끄덩 내려가는 것처럼.


익숙한 점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비닐을 외벽 삼아 바람을 막은 간이점포였다. 출입문도, 간판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잘도 찾아왔다. 우리도 채소를 사러 몇 번 들른 적이 있었다. 노끈을 두른 비닐이 깃발처럼 펄럭이며 손님을 불러 모았다.


가판에는 빨간 대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시금치, 무, 대파 같은 채소들 사이에서 드디어 '갓'을 만났다. 한눈에 봐도 줄기가 튼실한 것이 싱싱하고 생기 있어 보였다. 역시 오길 잘했다며 계산을 하려는데, 주인이 없었다.


두리번거리다 휴대폰을 꺼냈다. 골판지 상자 겉면에 전화번호와 계좌번호가 적혀 있었다. 신호음이 울리자 코 앞에서 신나는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휴대폰도 두고 화장실이라도 가신 건가?


기다리는 사이 손님이 찾아왔다. 고구마 몇 개를 만져보더니 그냥 지나갔다. 주인이 있었다면 붙잡았을 텐데.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발목이 시렸다. 바짓단 아래로 파고드는 싸늘한 공기를 피할 수 없었다. 그때 골목 안쪽에서 돌돌돌... 바퀴 구르는 소리와 함께 허리가 구부정한 어르신이 나타났다. 손수레에 배추를 산처럼 싣고.


하이고, 춥지요. 뭐 드릴까요오~?


채소전의 사장님이었다. 가녀린 체구로 무거운 수레를 밀기도 힘들었을 텐데 목소리에 경쾌한 리듬이 실려 있었다. 갓을 사러 왔다고 하자, 콧노래를 부르며 한 단을 담아주셨다.


여수 돌산 가앗~ 한 단에 팔처언~ 원.


그녀가 팔천 원이라고 발음할 때 입가의 주름도 같이 펴지는 듯했다. 슬며시 따라 웃다가 그녀의 털모자에 시선이 갔다. 털모자 위에 앙증맞은 방울이 달려 있었다. 어쩌면 이른 아침 집을 나서는 그녀를 위해 가족 중 누군가가 골라준 게 아닐까. 폭신한 모자를 받아 든 그녀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크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털모자만 써도 이리 따습다고.


잔잔한 꽃송이가 가득한 누빔 조끼도 그녀의 일복이었다. 밑으로 드러난 옷소매가 불룩한 걸 보니 속에 여러 벌 겹쳐 입은 것 같았다. 통 넓은 바지 밑단을 장화 속에 야무지게 여미고, 씩씩하게 가판을 진두지휘하는 그녀에게서 남다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거친 세월에 맞서 굳건히 전장을 지켜낸 백전노장이 눈앞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삶의 무게에 눌리기보단 오히려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시린 바람 속에서도 알싸한 희망을 피워내는 강인한 생명력에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 없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더 살 게 없는지 둘러보다 검은 천이 덮인 시루를 발견했다. 콩나물이 노란 머리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직접 키우시는 거예요? 콩나물도 담아주세요.


이번에도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콩나물을 쑥쑥 뽑아 올렸다. 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검은 봉지가 금세 불룩해졌다.


자아, 한 봉지 이천워~언, 많이 가져가서 먹어!


만 원짜리 한 장을 내고 돌아서는데 양손이 묵직했다. 싱싱한 갓 한 단에 콩나물 한 봉지, 그리고 싱그러운 미소까지 덤으로 받아 나왔다. 찬바람에 또다시 머리가 헝클어졌지만 묵은 먼지가 씻긴 듯 마음이 상쾌했다. 말간 햇살이 바람을 다독이는 오후였다.


싱그러운 기운을 받아 맛있게 익어가는 갓김치




매거진의 이전글제10강, 날씨로 분위기 있는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