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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런콩 Apr 29. 2022

어느 월급쟁이가 모은 천만 원

통장에 모아둔 돈이 천만 원이 되었다. 딱 천만 원이 되는 순간 나는 너무 기뻐서 티브이를 보고 있던 엄마에게 은행 어플을 켜 놓은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엄마는 드라마에 방해된다며 대충 “어, 어.”하고 말았지만 나는 너무 기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이 돈을 모을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올해로 입사 6년 차가 된다.     


처음 회사에 들어와서 나는 약 세 달 동안 교육을 받았다. 첫 번째 달은 그룹사 교육이었고 다음 달은 회사 자체에서 하는 교육, 그다음 달은 직무교육이었다. 마지막 달에는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선배들이 강사가 되어 강의장으로 들어왔다. 선배들은 강의가 끝나갈 때 즈음에 “너희 꼭 재테크해라.” 한 마디씩 던지고 가곤 했다. 책을 추천해 준 선배도 있었다.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추천받은 책 중에는 절판된 책도 있었다. 나는 웃돈을 주고 중고로 그 책을 매입했다. 재테크에 관한 책을 읽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부자가 될 것만 같았다. 붕붕 들뜬 기분이었다.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집도 사고 주식도 하고 말 그대로 부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읽었던 책에 나오는 내용은 다 비슷비슷했다. 지출을 줄이고 공부해서 투자하라. 통장 쪼개기부터 시작하고 신용카드는 절대 만들지 말아라. 나는 책에서 본 대로 생활비 통장과 적금 통장을 나누었다. 신용카드는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그랬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상한 데 돈을 쓰기 시작했다. 가장 이상한 데는 다이어트였다. 입사하고 몸무게가 많이 불어났다. 거울을 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고, 이럴 바엔 차라리 돈을 써서라도 살을 빼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이어트로는 가장 유명한 J 업체에 찾아갔다. 업체에서는 이런저런 상담을 해주더니 18주에 천오백이 넘는 돈을 불렀다. 나는 금방 갚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덜컥 그 돈을 대출받았다. 그 18주가 지나고 물론 살이 빠지긴 했지만 그건 순전히 나와 내게 매 끼니 현미밥을 차려준 우리 엄마의 노력 덕택이었다. 10주가 넘어갈 즈음에는 환불받을까 생각도 했지만 돌려받을 수 있는 금액이 미미해 포기하고 말았다.

  

막상 그렇게 큰 빚이 생기자 ‘여기서 조금 더 쓴다고 별일 있겠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나는 또 몇백만 원을 들여 악기를 구입했다. 예산에 맞게 소비하는 생활은 이미 물 건너간 상태였다.      


사람들은 ‘부모님 집에 얹혀살 때 바짝 모아놔야 한다.’라고 말하곤 한다. 맞는 말이다. 어느 날 혼자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에 나는 땡전 한 푼 없이 보증금 1억에 월세 45만 원짜리 집을 계약했다. 전세 자금 대출을 받고 나머지 모자란 금액은 신용대출을 받았다. 나의 독립생활은 1년 동안 이어졌는데 그동안 천칠백으로 시작한 빚은 이천백으로 늘어났다. 맹세코 사치를 부린 건 아니었다. 월세에 대출금 이자, 관리비, 생활비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돈을 모으기는커녕 대출금조차 갚아나가지 못했다. 그 생활을 계속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나는 다시 본가로 들어와 버는 족족 빚 갚는 데 돈을 쓰기 시작했다.     


숨만 쉬고 빚을 갚는 생활이 이어졌다. 자산 0원이 되기까지는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렇게 해서 집은 언제 사지, 언제 부자가 되지. 아니, 부자가 되기는커녕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이 드는걸.’ 끊임없이 되뇌었다. 계속해서 과거의 나를 탓했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는 일도 멈출 수가 없었다. 후회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지만 생각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생각하는 것에도 지쳐버렸다. 그저 묵묵히 시간이 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빚을 다 갚자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부터는 순식간이었다. 또 언제 터널로 진입할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이 빛을 만끽하고 싶다.

  

다시금 과거로 돌아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라는 멋진 대답은 못 하겠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빚은 지지 않을 것이고 ‘내일의 내가, 다음 달의 내가 갚아주겠지.’라는 생각은 접어둘 것이다. 책장 맨 밑에 꽂아두었던 재테크 책을 다시 꺼내 보니 이거야말로 피로 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친구야, 제발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말거라, 제발 저축하고 공부하거라.”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건 분명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할 테다.      


입사 6년 차에 모은 돈이 겨우 천만 원이라니. 비웃음을 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천만 원은 내겐 너무 값진 돈이다. 모든 일은 깨달음을 동반한다. 다시는 허투루 돈을 쓰지 않을 테다. 적은 돈이라도 소중히 여길 것이다. 또 모르지 않는가. 지금 좀 늦은 내가 언젠가는 큰 부자가 되어있을지도. 미래는 언제나 장담할 수 없는 법이다.

  

아주 큰 값을 치렀다. 그래도 충분히 값어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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