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 도바 위에 뜬 별 2부 제6화
저녁의 국제시장은 낮과는 달랐다.
골목 위에 걸린 전구들이 희미하게 깜박였고, 젖은 아스팔트 위로 네온사인의 불빛이 번져 흘렀다.
도바위를 스치는 겨울 끝자락의 바람은 차갑게 뺨을 때리고 지나갔다. 연인들이 속삭이며 내뱉은 숨결은 하얀 솜사탕처럼 떠다니다 밤의 골목 저편 어딘가로 사라졌다.
노점상들의 좌판 위에는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듯한 낡은 청바지, 시곗줄이 헐거운 전자시계, 바랜 전축과 중고 라디오, 출처가 불분명한 복사테이프, 이미테이션 목걸이, 액세서리, 털모자, 목도리, 가죽가방, 벨트까지.
“없는 게 없는 시장”이라 불리던 풍경은 겉으론 풍요로워 보였으나 속으로는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골목 어귀 전파상 스피커에서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왔다.
〈○○ 시장 권한대행은 도심 환경정비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도심 재개발과 중구권 발전을 위해 전 시장의 정책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새해 시정방침을 발표했습니다.〉
라디오 소리가 끝나자, 커피 한 잔으로 하루 피로를 풀던 상인들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또 시작이구마.”
“언제는 우리 편이라카더니, 시청이든 구청이든 그순간 지나고 돌아서면 끝이지.”
겉으로는 흥정을 이어갔지만, 상인들의 눈빛은 예전보다 더 흔들렸다. 마음속에는 ‘단속반이 언제 들이닥칠까’ 하는 걱정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경찰은 시장 좌판을 직접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위조상품과 가짜 상표 단속만 맡았다.
정작 좌판 철거와 노점 정리는 구청 도로정비과의 몫이었고, 그 위에서 시청이 방향을 결정했다.
상인들은 그 구조를 잘 알고 있었기에 낯선 발자국 소리 하나에도 긴장했다.
네온 불빛은 불안하게 깜박였고, 그 아래 서 있는 상인들의 그림자는 평소보다 처진어깨로 길게 죽 늘어섰다. 시장 골목의 밤은 언제 터질지 모를 불안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왕비다방 안의 분위기는 시장통과는 달랐다.
갑작스러운 부산시청 단속 발표 때문에 다들 조금씩 격해져 있었다.
테이블마다 상인들이 둘러앉아 석간신문을 펼쳐 들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거 봐라. 이번에는 후임 권한대행 시장이 단속을 밀어붙인단다. 전임 시장하고 나란히 찍은 사진을 신문에 내놓은 게 말이 되나. 악어가 왜 죽었는데… 전임 시장 저 얼굴은 뻔뻔하게 웃고 있네.”
신문을 보던 어떤 상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신문 뭉치를 테이블에 내동댕이치며 말했다.
옆 테이블에 있던 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 시장이 내년 국회의원 선거 나가서 여당 지도부에 들어간다는 소문도 못 들었나베? 칼자루만 다시 쥐면, 우린 또 도마 위 아이가.”
맞은편에 앉았는 노점상이
“이번엔 더 세게 올 기라. 지금 권한대행 부시장도 전임 시장이 승진고과 무시하고 고속 승진시켜준, 같은 부민고 출신 후배인기라.”
라며 뭔가를 아는듯한 눈치로 말을 이었다.
그러자 구 씨 형님이 나를 향해 말했다.
“하아 참! 올초부터 L그룹 이것들이 부민일보에 매일 광고를 쏟아붓다 싶더라니, 우째 심상치 않다 했다. 성호야, 내 말 맞제?”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뜨거운 커피를 후후 식히며 마시던 대팔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흥, 그래봤자 저거가 어쩔 낀데. 지난여름 우리가 일본 방송도 타고, 전국적으로도 우리 투쟁 좋게 봤다 아이가. 언론도 다 우리 편이었고. 그기 힘이 된다고 생각해야지. 나는 미리 겁먹을 필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신문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정노인이 고개를 들더니, 대팔이를 향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대팔이 조카, 니 말대로면 걱정이 뭐가 있겠노. 근데 힘은 무슨 힘. 언론은 잠깐이고, 시청이 단속 지시 내리면 구청 도로정비과가 곧장 밀고 들어온다. 우리 좌판이 뭔 힘이 있노. 때리면 고마 폭삭 내려앉는 거지.”
정노인은 대팔이가 싫어하는 기색을 알아도, 외가가 같다는 핑계로 늘 조카라 불렀다.
대팔이는 말대꾸하려다 굳은 내 표정을 보고 고개를 돌려 텔레비전으로 곧장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 여기저기에서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새해부터 L그룹이 전면 광고를 그렇게 쏟아붓는 거 봤제? 평소 5단 통광고나 하던 것들이 말이다.”
“그러게. 재정난이라던 신문사 하나도 통째로 사버렸다더라. 이제 기사들 방향도 죄다 그쪽 편이고.”
“맞다. 시청 이전 후 광복동 노른자 땅에 아시아 최고 높이 빌딩 짓는다 카더만. 호텔에 백화점에… 관광객 몰려오면 부산이 싱가포르 된다나 뭐라나.”
누군가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그게 관광객 유치가 아니라, 헐값에 땅 먹으려고 내세운 명분 아니겠나. 진짜 속셈은 남포동·광복동 상권 빨대 꽂는 거지.”
“에이, 그래도 검찰이나 경찰이 가만있겠나?”
다른 이가 불만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 초반에는 제법 권력형비리가 어쩌구 저쩌구 하며 곧장 수사 들어간다는 보도가 한동안 나오더니만 요즘은 그 이야기는 온대 간데없다 아이가. 마 그 뒤로 핫바지 방귀 새듯이 사라졌뿐는기라.”
“시청 이전 후 광복동 노른자 땅에 아시아 최고 높이의 복합빌딩을 짓겠다. 호텔과 백화점을 유치해 부산을 싱가포르처럼 만들겠다.”
그들이 내세우는 청사진은 그럴듯해 보였지만, 실상은 뻔했다.
부산 시민의 삶을 위한 미래 계획이 아니라, 헐값에 공공부지를 확보하기 위한 포장지였다.
바다에 접한 고층건물이 초래할 환경 문제, 도로 포화, 교통영향, 인구집중 문제 등은 철저히 배제되고 무시됐다.
도시계획 관련 학계 인사들조차 ‘시내에 최대 규모 백화점이 들어서면 이 지역이 쇼핑 중심지가 된다’는 장밋빛 전망만 반복하며 침묵했다.
사실.나 역시 학부에선 법학을 전공했지만 대학원에선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그런 인연으로 관련학계인사들 중엔 안면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주장은 펼쳐질 현실과 정반대의 거짓주장이었다.
정작 큰 문제는 초대형 백화점이 들어서면 주변 상권이 살아나기는 커녕 백화점이 블랙홀이 되어 돈이든 사람이든 전부 그곳에만 집중되어 인근상권은 일순간에 초토화되어 버린다는것이다.
기존 상가로 몰리던 유동인구들이 지하철이나 자가용을 이용. 초대형 백화점안에서만 장시간 쇼핑을 하고 쇼핑 마친후엔 백화점과 연결된 지하철이나 개인 차량으로 곧장 귀가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인근 상가는 급속히 인적이 드문 유령상가 되고 가뜩이나 부도심 개발로 죽어가는 도심상권을 재벌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그 숨통을 단숨에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전축에서 흘러나오던 오래된 트로트가 늘어지듯 꺼지고, 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네온사인 반사가 다방 유리창에 얼룩져 어른거렸다.
다행히 예상과는 달리
그 후 한동안 단속반은 들이닥치지 않았다.
구청에 문의해도 “현재로는 계획이 없다”는 애매한 말뿐이었다.
그렇게 불안 속에서 하루가 저물고 다시 하루가 시작됐다.
행인들 옷차림에서 두툼한 겨울잠바가 사라지고, 매서운 꽃샘바람이 지나가자 삼월이 되었다.
삼 월, 첫 번째 공휴일 오후였다.
광안리 회센터에서 신상무와 봄 시즌에 팔 상품 이야기를 나누며 낮술을 한잔하고 있었다.
그때 내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는 영숙이었다. 숨이 가쁜 목소리였다.
“성호 씨… 지금 어디예요? 가능하면 우리 집으로 빨리 와주세요.
악어 형님 전부 인 이라는 사람하고 그분 딸이 찾아와서 난리예요.
자기가 작년까지 형님하고 법적으로 부부였으니까,
내 재산을 전부 넘겨야 한다고…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나는 술기운이 싹 달아날 만큼 당황해 급히 택시를 잡아탔다.
해운대로 도착해 아파트 현관으로 뛰어들어가니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영숙 씨가 거실 입구에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전 부인 이라는 여자와 그녀의 딸, 그리고 말쑥한 양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딸이 먼저 소리쳤다.
“당신이 뭔데 이 집에 아직도 살고 있죠? 당장 비켜요. 이 집은 우리 아버지 집이었고, 지금은 우리가 권리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잖아요?”
전 부인도 거들었다.
“법적으로 우리가 권리자입니다. 작년까지 이혼 전이었고, 그동안 벌어들인 돈도 다 공유재산이에요. 은행 통장하고 집문서, 당장 내놓으세요.”
영숙은 어안이 벙벙해서 얼굴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 모녀의 몰아치는 말이 그대로 가슴에 박히는 모양이었다.
“이 집은 제가 번 돈으로 마련한 집이에요. 작년에 그분이 사업상 대출이 필요하다 해서 잠시 이름만 빌려준 거예요. 그전 소유권 확인해 보면 압니다.”
그때, 모녀와 함께 온 양복쟁이가 나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법무사 사무장이라는 그는 상당히 짜증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사모님, 사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법은 냉정해요. 명의자는 어쨌든 고인이었죠. 조용히 돈으로 해결합시다. 그게 서로 편합니다.”
그들 눈빛에는 노골적인 욕심이 번들거렸다. 영숙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그 순간—
거실 깊은 곳에서 똑, 똑 지팡이 소리가 울렸다.
영숙 어머니가 조용히 걸어 나오셨다. 다방에서 보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조용하고 단정한 기품, 희고 곱게 빛나는 피부, 깔끔하게 틀어 올린 흰머리, 손끝까지 정갈한 50대 어느 교양 있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성호 씨, 어서 오세요.”
나는 이 어두운 분위기에서 인사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주위를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를 집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댁들이 주장하는 대로 권리가 그쪽에 있다면, 이 집은 당연히 비워드려야겠지요. 하지만 우리 딸 주장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니, 여기서 떠들어 해결될 일은 아닙니다
. 법정 판결문 받아오시면 곧바로 비워드릴게요. 그전에는 우리 집 문간에서 나가주세요. 성호 씨, 이분들이 계속 나가지 않거나 밖에서 소란을 피우면 즉시 경찰에 신고하세요. 불법주거침입입니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완전히 흔들리지 않는 단호함이 있었다.
투박한 사투리도 아닌, 오랜 교양과 배움이 밴 어투였다.
“정 그렇게 나오면 소송할 겁니다. 한 푼도 못 받고 쫓겨나도 후회하지 마세요.”
그들은 결국 몇 마디 협박 비슷한 말만 남기고 물러났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 영숙 어머니는 나를 향해 그녀의
손을 뻗었다. 그녀의 곱고 긴 손끝이 내 손등을 감싸며 말했다.
“성호 씨, 우리 애가 당장 힘들다 보니 연락했겠지만… 거기가 힘을 쓰든 말든, 이 일은 이미 결론이 나 있는 일이라오. 성호 씨가 이런 자잘한 일에 신경 쓸 시기도 끝이 다되었어요.
성호 씨는 자신이 불꽃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해요. 악어 그 양반처럼 자신만 태우는 불이 되어서는 안돼요.
작은 감정의 불은 사람을 태우지만, 큰 연민의 불은 세상을 덮지. 어느 불을 택할지는… 앞으로 자네 삶이 결정하겠지.”
나는 그 말에 목이 메었다.
형님이 생전에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영숙 어머니의 말은 그보다 더 깊게 가슴에 내려앉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해운대 등기소 쪽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영숙 씨 아파트의 소유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먼저 확인해야 했다. 혹시 정말 악어형님에게 명의가 넘어간 상태라면, 돌이키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해운대 쪽 바람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버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그 바람이, 마음속 걱정까지 긁어내는 듯했다.
등기소로 올라가는 동안, 변호사 일을 하는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해 봤지만 “승산이 약하다”는 말뿐이었다. 그래도 일단 등본을 떼 와 보자는 의례적인 말에, 별수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형님이 일을 제대로 정리해 뒀다면, 영숙 씨가 이런 일을 겪지는 않았을 텐데… 집이 정말로 넘어가기라도 하면, 두 모녀는 어떻게 되나.’
그런 생각이 등기소로 향하는 내 발걸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재일교포 아버지가 언제든 도움 줄 수 있다는 말이 떠올라,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겠지 하는 얄팍한 안도감도 있었다.
하지만 영숙이 힘든 시절 모아 산 집이라는 걸 내가 최근에야 알게 된 터라, 이대로 뺏긴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했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은, 이미 서류 위에서 일어나 있었다.
부산지법 동부지원 등기부 등본,
갑구 소유자 란에는 ‘배영숙’이라는 이름이 멀쩡히 적혀 있었다.
한 차례 악어형님 앞으로 넘어갔던 소유권이, 형님이 분신으로 삶을 마감하기 바로 직전에 다시 영숙 앞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형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런 일을 대비해 놓은 것이다.
말은 없었지만, 마지막 선택 안에서 모든 걸 정리해 둔 셈이었다.
영숙에게 등본을 내밀자, 그녀는 말도 없이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나를 꼭 끌어안았다.
“진짜… 내 이름 맞네. 성호 씨, 내가 이걸 어떻게 고맙다 말해야 하나…”
“내가 한 건 없지요. 그냥 서류만 떼 온 건데. 굳이 말하자면… 이 사달의 책임자도 악어형님이었고 고마워해야 할 사람도 결국 형님이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슴 한쪽이 저려왔다.
손에 쥔 건 서류 한 장이었지만, 형님의 그림자가 다시 내 어깨에 얹히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우리는 영도다리 아래 포장마차에 마주 앉았다.
영숙 씨가 “고맙다”는 핑계로 술 한 잔을 사겠다고 해 거절하지 못했다.
비닐 천막 아래 걸린 백열등이 흔들렸다.
노란빛이 소주잔을 스치며 은빛 조각처럼 반사됐다가, 젖어 있던 탁자 위로 퍼져 흘러내렸다. 흔들리는 작은 불빛들이 흘러내린 술위로 넘실거리며 탁자 위를 적셨다.
영숙이 반쯤 빈 술 잔을 탁자 위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어제는 정말 무서웠어요… 난데없이 들이닥쳐 집 비우라 하고, 법률사무소 사람까지 데리고 오고…”
그녀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힘겨운지 어깨를 작게 움츠렸다.
“형님이 다 해놓으셨는데, 미리 겁만 먹은 거지요.”
“새해 들어 집값이 많이 올랐다는 뉴스 듣고, 궁금해서 부동산에 내놔 봤거든요.
그런데… 하필이면 전날 부동산에서 전화 와서, 압류 풀어야 매물로 낼 수 있다고 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바로 다음 날 그 사람들이 들이닥친 거예요.
그 사람들 말 듣고 있으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이가 없으니… 성호 씨가 제일 먼저 생각났어요. 연락하고 나니 그제야 좀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머니도 걱정 말라하시고…”
술이 빠르게 도는지, 그녀의 뺨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잠시 후,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성호 씨… 잠시만, 어깨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머금은 뺨이 내 얼굴에 살짝 닿았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났다.
형님의 마지막 그림자,
법당에서 읊던 연민의 마음,
그리고 남자로서의 욕망까지—
서로 부딪히며 올라왔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 어깨 위에 고요히 내려앉은 그녀의 체온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천막 안의 백열등은 바람에 흔들리고, 술빛과 불빛이 서로 부딪혀 번졌다.
어떤 불을 택할 것인가.
그 대답은 끝내 내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