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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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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Sep 15. 2019

겨우 1박 2일의 짧은 강릉 여행이,  

안 갔으면 어쩔 뻔했나 싶은 여행이 되다니



슬럼프가 찾아왔다. 일이 재미가 없고 사는 데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일이 재미가 없어서 슬럼프가 온 건지 슬럼프가 오는 바람에 일이 전부 재미가 없어진 건지 선후 파악도 잘 안 됐고. 웃고 떠들면서도 어딘가 한편이 바닥에 진득하게 들러붙어 껍데기만 매가리 없이 끌려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회사가 문제냐 일이 문제냐, 고민도 해봤지만 이쯤 되면 사실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나한테 있다는 걸.


직장생활의 위기가 3년 주기로 찾아온다는 말은 유명하다. 3년, 6년, 9년, 12년... 마치 그 속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나는 첫 직장에서 3년 차 되는 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옮겼다. 그러나 어느 회사를 다니든 직장은 직장이고, 아마 직장인들은 전부 알고 있을 것이다. 직장생활의 위기는 3년 주기가 아니라 3달, 아니 3주, 아니 3일... 가끔은 3분 단위로도 찾아온다는 것을. 사실 그 법칙을 깨달았다면 그다음은 의외로 간단하다. 위기가 3분 단위로도 휘몰아침을 이해한다는 것은, 갑자기 오만 일이 다 거지 같아 보인다고 해서 바로 사직서를 쓰지는 않는다는 소리니까. 모든 일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새 회사와의 허니문이 소리 소문 없이 떠나갔듯이, 권태기도 곧 그런 게 있기나 했었냐는 듯 지나가버릴 것이다. 물론 그것이 빨리 지나갈 수 있도록 잠깐 주의를 환기시키는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겠지. 나의 경우엔 언제나 그게 여행이었다.


 




여름휴가도 이미 다녀온 데다 한창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 언감생심 휴가를 낼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딱 토요일-일요일, 1박 2일 일정의 짧은 강릉행. 토요일 아침에 고속버스를 타고 출발하여 일요일 점심쯤 KTX를 타고 돌아오는, 겨우 30시간 남짓되는 여행이었다. 그럼에도 여행을 확정 짓고 나서 일주일은 겨우겨우 그걸로 슬럼프를 버텨냈다. 죽을 것 같아요, 집에 가고 싶어요, 저 때려치워야겠어요, 하다가도 '근데 저 주말에 강릉 가요!' 하고 눈을 반짝일 수 있었달까. 지루하던 일상에 누가 아주 크게 박수를 짝! 친 듯했던 순간. 뭐 대단한 여행이 아니었던 만큼 대단히 설레지는 못했으나 나는 일부러라도 계속해서 상기했다. 내가 곧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늘어져있기보단 설레여야 한다는 것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짧은 여행은 완벽히 내 기분을 전환해주었다. 기대 이상의 효과, 들인 돈과 시간을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런 가성비가 나올 수 있나 히익- 숨을 들이켜게 될 만큼의. 단숨에 끌어올려진 기분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서 여행 내내 ‘좋다’, ‘지금 진짜 좋다’, ‘너무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 고양감이 그대로 남아 나를 웃게 했다. 여행 가기 전보다 할 일은 배로 쌓여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번 주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일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일이야 여전히 힘들었지만, 3일 전처럼 전부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지루하거나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무력하지는 않았다. 글쎄, 겨우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 이 정도의 반전을 가져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은 나도 잘 믿기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더욱 곰곰이 생각해본다. 도대체 이 여행은 어떻게 이렇게 효과가 좋을 수 있었나? (이 이유를 잘 알아두는 것이 내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말했듯이 직장생활의 위기는 3분마다 새로이 찾아오고, 곧 나는 다시 여행이 필요해질 것이므로.)




1. 새로운 것을 배웠다 


이번 강릉행의 메인은 누가 뭐래도 서핑이었다. 같이 간 친구는 원래도 여름이면 양양으로 제주로 자주 서핑을 하러 다니는 자타공인 서퍼였지만, 나는 머리털 나고 한 번도 서핑을 해본 적이 없다. 몇 번 할 기회도 있었으나 괜히 겁이 나 발을 뒤로 물리곤 했었다. 수영은 할 줄 알지만 바다에는 딱히 익숙한 편이 아니기도 했고, 출렁거리는 파도 위 보드에 우뚝 선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공상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내게는 서핑의 즐거움보다 서핑 뒤에 찾아올 근육통이 더 생생했다. 나는 팔다리에 힘도 별로 없는 사람인데 애써 찾아 가 배운 들 제대로 탈 수나 있을까, 까맣게 타서는 팔에 근육통만 얻어오는 게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들. 기실 다 떠나서 그냥 이제 와 또 새로운 걸 배운다는 것 자체가 꽤 부담이 되었다.


그래도 한 번은 해 보자, 그렇게 결심하게 된 것은 뭐라도 새로운 걸 해보고 싶을 만큼 일상에 지쳐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말하면 슬럼프가 내게 새로운 문을 열어주었다. 아마 이렇게까지 지루해있지 않았으면 결코 내가 여름의 끝자락에 서핑 수업을 듣고 있지는 않았을 테지. 서핑에 완전히 실패하는 꿈까지 꿀 정도로 이유 모를 두려움엔 꽤 실체가 있었지만, 어쨌든 서핑을 배우기로 한 것은 아주 잘한 결정이었다. 물론 새까맣게 타기야 했지만 뭐 어떠랴. 나는 결국 서핑을 배웠고, 어설프게나마 보드 위에 서서 파도를 타보기도 했으니. 한 번 배웠다는 것은 언제고 내가 원할 때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을 놓았다는 뜻이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면 늘 느끼지만, 나와는 전혀 안 맞을 것 같은 일에도 분명 나를 흠뻑 빠지게 하는 매력이 숨어있다. 안 쓰던 근육을 쓰고 안 하던 일에 도전해보는 것은 확실히 일상의 지루함을 깨부순다. 




2. 맛있는 것을 먹었다


그래, 먹는 것은 중요하다. 일상에서도 그럴진대 여행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먹을 수 있는 끼니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고민은 길고, 선택이 잘못되면 후회도 꽤 진득하게 남는 편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딱 세 끼가 허용되었다. 도착한 날 점심, 서핑하고 나서 저녁, 다음날 서울로 돌아오기 전 점심. 첫 끼니는 강원도의 향토음식이라는 장칼국수를 먹었고, 저녁은 숙소 근처의 허름한 백반집에서 고추장삼겹살찌개를 곁들인 백반을 먹었으며, 마지막 끼니는 유명한 막국수집에서 비빔막국수와 수육을 먹었다. 익숙한 음식들, 그러나 확실히 지방의 특색이 느껴지는 새로운 맛. 가면 갈수록 딱 한 끝만큼만 새롭다는 게 오히려 반갑다. 세상 반대편에서 난생처음 보는 음식이 맛있다는 걸 깨닫는 것도 즐겁지만, 내가 잘 아는 음식을 먹으러 가서 새로운 맛을 느낄 때는 더더욱 즐겁달까. 이미 얼추 아는 맛이라 먹기 전부터 침샘이 촉촉한데, 입에 넣는 순간 평소에 먹던 것관 다른 독특한 한 방이 느껴질 때.


세 끼니 중에서는 마지막에 먹은 수육과 막국수의 조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다음에 또 강릉으로 도망가는 일이 생기거들랑 한 번 더 방문해 볼 예정.



3. 다음 여행을 계획했다


서핑을 끝내고 개운하게 샤워를 한 뒤 저녁을 먹은 다음의 일이다. 우리는 바람이 솔솔 부는 테라스에 앉아 맥주 한 잔을 앞에 놓고, 11월로 예정된 포르투갈 여행에 대해 떠들었다. 날짜를 정하고 비행기표를 사두긴 했지만 아직 숙소부터 이런저런 교통편이나 투어까지 정해야 할 게 산더미였으니까. 이왕 둘이 마주 앉은 김에 제일 급한 숙소는 딱 정해버리자- 마음먹고 서로 열심히 리스본과 포르투의 숙소를 검색했다. 혹시 더 좋은 게 있을까 눈이 빠질 때까지 여기저기 들여다보고, 괜찮은 것 같은 숙소가 있으면 서로 슥슥 넘겨 보여주면서. 결국은 각 도시에서 머무를 숙소를 확정하고 결제까지 일사천리로 마무리했다. 세상에 포르투갈이 이제 겨우 두 달 앞이라고, 적절한 기대감과 감탄을 섞어가며.


여행지에서, 두 달 뒤에 '함께' '더 멀리' 갈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꽤 사치스럽고도 배부른 느낌이다.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의 빈백에 앉아 맥주 한 병을 앞에 놓고 이야기한다면 더더욱. 이 느낌을 꼭 기억해야만 하겠다. 뭐랄까, 마치 다음 주 수요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걸 알면서 일요일 저녁을 보내는 느낌이랄까. 이 짧은 휴일이 끝나간다는 건 아쉽지만 괜찮다고, 조금만 기다리면 더 길고 멋진 휴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빈땅 두 병과 포르투갈 여행 계획이라니 이렇게 완벽할 수가 있을까!




4. 좋은 친구와 함께였다  


앞서 나열한 것들을 빼고도 이번 여행이 성공적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많고도 많다. 날씨도 좋았고, 큰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방문했던 공간들도 마음에 쏙 들었고, 기타 등등. 여행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소는 여러 가지지만 그 모든 것을 무력화하는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그건 바로 동행인이다. 음식이 마음에 쏙 드는 게 무슨 소용이랴, 같이 간 일행과 마음이 맞지 않는다면.


이제 서로 알게 된 지는 햇수로 딱 4년 차인, 그러나 같이 보낸 시간으로 따지면 10년이 더 된 것 같은 내 친구가 이번 여행의 가장 결정적 성공요인이었다. 사실 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슬럼프가 길고 깊었어도 ‘그래 서핑을 배워보자!’ 마음먹게 되는 일은 어쩐지 없었을 것 같다. 애초에 이번 주말의 약속이 취소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강릉 갈래?’ 물어봐 준 것도 친구였다. 그 질문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주말 내내 침대 위를 뒹굴거리다가, 일요일 저녁쯤 우울하게 주저앉아 또 회사에 나가야 하는 일상에 대해 곱씹고 있었겠지. 장롱면허인 나를 대신해 내내 차를 몰아준 것도 친구, 강릉은 장칼국수가 맛있다며 맛집을 알아온 것도 친구, 근처에 테라로사가 있는데 들려보지 않을래 물어본 것도 친구. 그리고 경포호수 근처의 그 테라로사는 정말 멋있었다! 


이렇게 쓰다 보니 확실히 이번 여행은 친구에게 빚을 진 것 같다. 찐득찐득하게 방바닥에 들러붙어 있던 나를 쑤욱 끌어올려주어 고마울 따름. 이 친구와 함께 할 11월의 포르투갈 여행이 더더욱 기대된다.







말했듯이 여행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소는 이것 말고도 많다. 그러나 애초에 여행의 성공과 실패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내 이번 여행이 성공적이었다고 떠들어댔지만 그건 뭐랄까, 겨우 1박 2일의 짧은 여행에서도 이 정도의 환기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놀라움에 가깝다.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음식을 먹고 새로운 바람을 맞는 것. 여행의 의미는 거기에 있고 따라서 그 목적지나 여행의 길고 짧음보다는 떠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이유가 어찌 됐든 나는 여행을 떠나는 데 성공했고 그 순간 모든 것은 이미 완벽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앞으로도 언제고 기회가 생긴다면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게 겨우 1박의 강릉행이든 10박의 포르투갈행이든 간에. 이유도 없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고 눈 앞에 놓인 것이 전부 징글징글 지겨워진다면 일단은 떠나보시길. 아마 안 갔으면 어쩔 뻔했나 싶은 여행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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