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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Dec 03. 2022

눈 딱 감고 열 번만

먹어 보면 세상이 넓어져요

길고 긴 코로나 시대를 지나 3년 만의 해외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베트남 호찌민. 태국도 필리핀도 아닌 베트남으로, 하노이도 다낭도 아닌 호찌민으로 정한 데 큰 이유는 없었다. 셋이 같이 떠나기로 했으니 목적지는 어디여도 좋았다. 마침 셋 중에 둘은 베트남이 처음이고 하나는 호찌민이 처음이라 더 좋았고. 


하여간 정말 오랜만의 여행이었다. 동남아로 떠나는 여행은 거의 4년 만. 사실 그 지점에서 이 여행은 내게 또 하나의 개인적인 의미를 가졌는데... 그 사이에 달라진 게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내가 고수를 먹게 되었다는 것! 








고수를 싫어하는 한국인이 고수를 좋아하는 한국인보다 많을 테니 뭐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처음 딱 시도해봤을 때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건 아니라는 걸. 역한 화장품 향 같은 게 올라왔다. 나는 애초에 '화장품 냄새'가 난다는 나만의 이유로 망고도 코코넛도 싫어하던 사람이라 더 시도해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한국에서야 고수가 들어가는 음식이 많지 않으니 피하기 어렵지도 않았고. 외국여행을 갈 때는 적어도 '고수 빼주세요'라는 말 하나는 현지어로 외워갔다. 태국 여행을 갈 땐 마이 싸이 팍치, 중국으로 갈 땐 부야오 샹차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면 그대로 영영 끊어버리면 될 일인데, 어쩐지 고수는 내 주위를 자꾸 맴돌았다. 내가 유난히 태국이나 베트남 음식을 즐기기 때문인가. 제일 가까운 친구가 고수를 좋아해서 매번 신기하게 그 모습을 쳐다봤기 때문인가. 언젠가 들린 레스토랑에서 '이 요리에서 고수를 빼면 맛이 완성되지 못하므로' 고수를 빼드릴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인가. 그 모든 것들이 짬뽕이 되어 나는 매번 고수 잎 끄트머리를 한 번씩 베어 물곤 했다. 으 여전히 싫어. 늘 눈을 찌푸리면서도 괜히 또 한 번 찔끔. 


고수 하나 못 먹는다고 큰 일 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계속 자학할 필요 없지 않나. 영 바뀌지 않는 입맛에 신물이 나서 그 여정도 그만두려고 할 때 즈음, 이런 귀한 조언을 만났다.




정말인가요 선생님. 예능 프로그램에서 휙 지나간 순간에 불과했지만 나는 어쩐지 이 말을 격언처럼 받들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의 고수가 저번의 고수보다 쪼끔, 아주 쪼끔은 나았던 것도 같고. 매번 역하게만 느껴졌었는데 그 속에 어떤 '맛'이 있다는 게 쪼끔, 아주 쪼끔은 느껴지는 것도 같고. 딱히 기대할 만큼의 진전은 없었지만 그래도 고수가 보일 때마다 이파리 하나를 뜯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그게 열 번이 되었을까. 어쩌면 스무 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어느 날 깨달았다는 데 있다. 나 이제 고수를 먹을 수 있어! 


정확히 몇 일이었는지는 모른다. 아마 멕시칸 요리를 먹던 중이었던 것 같은데, 그것마저도 정확하진 않다. 하여간 그날도 저 열 번을 채우는 수행자의 마음으로, 같이 서빙되어 나온 고수 한쪽을 잘게 찢어 요리와 함께 먹었다. 그리고 그게 괜찮았다. 한쪽 더. 이 번엔 두 쪽. 스스로를 믿을 수 없어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그날 처음으로 고수를 '어거지로' 먹지 않고 음식에 곁들여 먹었다. 그 뒤로는 거리낄 게 없었다. 고수를 '먹을 수 있다'의 상태에서 '좋아한다'의 상태로 접어드는 데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수가 들어가야 맛이 훨씬 풍부해지는 음식들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되었으니까. 


백 선생님이 옳았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고수를 듬뿍 넣은 베트남 포(Pho)를 충만하게 즐겼다. 고수에 대한 오픈 마인드 덕으로 같이 나온 이름 모를 향채들도 거부감 없이 시도했고, 모든 게 성공적이었다. 그 음식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들이 그 향채를 넣어먹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고수 빼 달라고 신신당부를 해놓고도 혹시 까먹고 고수를 넣었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불과 4년 전의 내가 들으면 우스울 자부심도 부렸다. 








겨우 안 먹던 채소 하나를 먹게 된 것으로 세상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뭐, 내게는 그랬다. 그 사이에 고수를 먹을 수 있게 되지 않았다면 이번 베트남 여행의 감각은 전혀 달랐을 테니까. 단순히 그걸 먹을 수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모르는 음식을 접할 때의 거부감이나 경계심이 훨씬 줄었고, 낯선 향도 일단은 시도해보게 되었다. 난 고수도 먹게 된 사람이니까. 세상에 못 먹을 음식은 없다는, 어떤 요상한 종류의 믿음이 생겼달까. 


베트남 여행을 함께 한 친구들에게 이 믿음을 전파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코코넛은 좀 별로-라고 했더니 이번엔 코코넛의 열 번을 채워주기 위해 친구들이 나섰다. 아무래도 코코넛 칩이 제일이라며 편의점 두 군데를 뒤져 제일 맛있어 보이는 코코넛 칩을 사주었다. 그리고 진작에 내가 아홉 번을 채워뒀었는지, 간만에 시도하는 코코넛 칩은 그저 맛만 좋아서. 분명 나 이 향을 싫어했던 것 같은데 말야. 내내 의아해하면서도 그날 밤에는 코코넛 칩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맥주 한 캔을 비웠다. 


문 하나를 연 것이 다른 문을 여는 마음을 훨씬 가볍게 한다. 그 문을 먼저 열어 본 친구들이 옆에서 도와주기도 하고. 아, 다음번엔 또 무엇을 열 번 채워 내 세상을 좀 더 넓혀볼까. 벌써 기대가 되어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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