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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May 05. 2020

어려운 시작과 가뿟한 마무리

스물여섯 번째 한 글자 주제, 끝 


1년 동안 2주마다 한 번씩 글을 지었다. 지금 이 글을 올리고 있는 <한 글자에 글 두 개> 매거진에. 친구와 둘이서 시작한 우리만의 프로젝트로, 매번 딱 한 글자로 된 키워드를 정해 각자 글을 썼다. 작년 5월 2일에 첫 글을 올렸고 오늘 마지막 글을 올린다. 1년을 꽉 채워 26개의 글, 둘이 쓴 걸 합치면 무려 52개의 글이다. 1년 52주를 꽉 채운 기분이 난다. 



시작이 쉽지는 않았다. 

같이 브런치에 글을 써보자, 그런 말이 나왔던 것은 무려 재작년 겨울의 일이다. 친구의 아이디어였다. 좋은 생각이라고 박수를 짝짝 쳤지만 진전은 느렸다. 처음엔 2019년 프로젝트로 만들 요량이었다. 연말이었으니까, 딱 알맞게 1월에 시작하면 되겠다 싶었더랬다. 그러나 1월이 지나고 2월이 지나도록 우리는 이 귀여운 아이디어 위에서 밍기적 밍기적 뒹굴거리기만 했다. 마음 잘 맞는 친구 둘이 만나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고 그중에 이만큼의 노동력을 요하는 일은 없다. 맛집을 찾아다녀도 영화를 보러 가도 심지어는 여행을 가도, 우리가 준비할 것은 돈과 시간과 재밌게 놀 마음뿐. '같이 글을 쓰자!'는 건 그런 거랑은 달랐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딱히 정기적인 글쓰기를 취미로 삼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기름까지 다 채워놓고도 어쩐지 시동을 걸지 못하고 운전석에 가만 앉아 있었다. 딱 요만큼의 용기가 모자라서. 


한 분기를 다 보내고 4월이 되어서야 우리는 구체적인 계획을 짰다. 한 글자 단어를 주제로 두고 둘이 각자 글을 쓴다는 컨셉을 잡고, Trello 앱을 이용해서 일단 서로가 생각해낼 수 있는 한 글자 단어를 모두 모았다. 개중에 그럴듯한 주제가 될 만한 것들을 또 한쪽으로 빼서 모으고, 각자가 봤을 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글감은 리스트에서 빼고, 그런 과정을 거쳤다. 그리하여 우리의 글감이 될 수 있는 한 글자 단어들 한 줌이 모였다. 순서를 미리 정해두진 않았고 그 단어들 중에 다음 주제를 매번 같이 골랐다. (처음에는 첫 주제를 '개'로 하려다가 '글'로 바꿨다. '개'에 대한 애착이 대단한 둘이라 첫 주제로 쓰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던지라. 이런 융통성의 발휘가 가능했단 게 장점!)


왼쪽에서 주제를 골라 다 쓰고 나서야 숫자를 붙여 오른쪽의 'DONE' 리스트로 옮겼던, 우리의 Trello



시작할 때는 딱히 이 작은 프로젝트의 기한을 정해두지도 않았다. '1년을 채우자!' 같은 거창한 계획은 세운 적 없다. 그냥 일단은 출발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쓰는 글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될지, 우리가 이걸로 무얼 만들 수 있을지 굳이 미루어 짐작하지 않은 채로.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은 드라이브 같았다. 굳이 어디에 당도해야 한다는 욕심이 없으니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중간에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나면 조금은 천천히 달려도 된다는, 허리가 아프면 잠시 쉬어가도 된다는 여유가 있었다. 그런 가벼운 느낌이 아니었다면 끝내 이 액셀을 밟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 


물론 쉽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충분히 품을 들여 글 한 편을 짓는 일이다. 2주에 한 번 돌아오는 마감이 어쩔 때는 너무 빨라서 뜨억 하기도 했었다. 며칠 전에 글을 써낸 것 같은데, 또 써야 한다고? 마감이 있는 일요일 저녁이 되면 우리는 엉엉 우는 이모티콘과 픽픽 쓰러지는 이모티콘과 한숨을 내쉬는 이모티콘을 경쟁하듯 서로에게 보냈다. 망했어, 하나도 못 썼어, 썼는데 마음에 안 들어, 다시 엎었어, 어떡해 벌써 열 시야... 하면서. 일 년 정도 했으면 글 쓰는 것도 습관이 붙어야 되는 게 아닐까 했는데 딱히 큰 발전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감을 앞두고 투덜투덜 웅얼웅얼 대는 데만 습관이 붙어버린 걸까나. 


딱 한 글자인 키워드를 가지고 뭘 써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도 길었다. 주제가 구체적이었으면 더 쉬웠을까 싶기도 했고. 결국은 에세이였기 때문에 어떤 글자를 들고도 내 이야기를 파내어 글을 쓰곤 했다. 처음엔 그래도 파낼 게 좀 있었는데, 10번 정도 반복하자 더 이상 꺼낼 이야기가 없는 것 같아 낙담하기도 했었다. 내가 가진 단면들 중 글이 될 만한 건 이미 전부 내보인 것 같은데, 이제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하나. 내가 이렇게 단편적인 인간이었나 싶어 좌절했다가도 꾸역꾸역 다른 면을 깎아 내어 글을 지었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완주했다. 

결승선 그어놓고 출발한 게임도 아니지만, 무려 1년 간의 꾸준함. 무엇이 되었든 우리 둘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글을 쓰면서 내가 몰랐던 내 이야기도 많이 만났고, 한 글자를 두고 우리 둘이 어떻게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는지도 즐겁게 보았고, 그 안에서 또 같은 결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웃기도 했다. 여전히 글 쓰는 습관이 안 들었다고 징징대고는 있지만 분명 내가 모르는 곳 어디에 없던 근육이 붙었을 거라는 것도 안다. 글 짓는 근육도 그렇겠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고차원의 것. 나를 위한 일을 용기 내어 시작하고, 유지하고, 충분히 공을 들인 뒤에 마무리한 경험은 소중하다. 이걸 가뿟하게 마무리한 덕으로 다음의 시작은 좀 더 쉬워질 테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용기를 내는 데 네 달이나 필요하지는 않을 거다. 


아니지, 어쩌면 네 달을 다 쓰고도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 혼자라면. 이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것도 친구였지만, 이걸 시작하고 유지하고 마무리하는 내내 나는 반쯤 친구에게 기대어 걷고 있었다. 내가 옆에 있으니 괜찮아, 그러니까 일단 출발해보자. 그런 지지에 둘러싸인 채 용기를 냈으니 이건 빌린 것이나 다름없다. 혼자였다면 어찌어찌 시작했다고 해도 곧 주저앉았을 거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고 건너뛰다가 흐지부지 되었겠지. 같이 하는 일이니까, 내 게으름 때문에 친구보고 거기 앉아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힘을 냈다. 낼 수 있었다. 아무리 가벼운 드라이브였어도 혼자 올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고. 시작은 늘 어려운 법이고, 어떤 시작은 함께일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친구야, 다음의 시작도 너에게 이만큼의 용기를 빌려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니? 대신 나도 그만큼의 용기를 너한테 줄게. 아무래도 사람은 혼자 낼 수 있는 용기보다 누구한테 내어줄 수 있는 용기가 더 커다란가 봐. 그러니까 우리 서로의 용기에 기대어 또 혼자서는 못 갈 길을 한 번 더 가볼까. 그게 언제나처럼 재미있는 길이길 가볍게 기대하면서, 혹은 어떤 길이어도 우리가 나름의 재미를 찾아낼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그리고 그 시간이 쌓여서 우리가 좀 더 넓고 깊은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라면서. 앞으로 더 많은 시작과 끝을 함께 해주길 부탁하며- 미리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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