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연대, 그리고 에우다이모니아
몸 vs. 맘
몸과 맘은 운명공동체이다. 마치 샴쌍둥이처럼 어느 한쪽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몸이 아프면 의욕이 떨어지고 우울감이 찾아온다. 마음이 아프면 몸의 가장 취약한 부분 어딘가에서부터 이상신호를 보낸다. 그런데 우리가 '아프지 않고 건강한 삶'을 이야기할 때에는 신체 질병이 없는 삶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신건강을 여전히 '의지 부족'이거나 '성격의 문제'로 연결하는 사람들도 있다. '공감하는 유전자'의 저자 요아힘 바우어에 따르면 인간이 겪는 불안과 소외, 공포 등의 감정은 우리 몸의 만성 염증과 상관관계가 있다. 이러한 염증은 결국 심혈관 및 암질환, 치매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된다. 또한 인간관계의 여러 부정적 요소들은 인간이 난관을 극복하고 삶의 즐거움을 느끼도록 유도하는 신경전달물질을 활성화시키지 못한다. 반대로 주변인들과의 긍정적 유대감이 강화될수록 건강에 해로운 잠재적 위험 유전자 활동은 지속적으로 감소한다. 사실, 이런 류의 실험 결과가 놀랍진 않다. 인간의 경험과 역사는 겸손하게 서로 사랑하고 연대하는 삶의 긍정적 효과를 꾸준히 증명해왔다. 이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의 답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좋은 삶'의 바탕이 되는 공감, 공명, 연대와 같은 추상적인 말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각종 신경세포와 유전자 이름이 동원되고 다양한 실험 결과를 통해 바로 그 '좋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인간은 정서적 관계에 의존하는 사회친화적 동물이며 나를 둘러싼 모든 자연과 공존할 때 보다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당위성에 의존하지 않고 과학적이고 객관적 근거 자료들을 무기 삼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공감하는 능력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좋은 삶'에는 공감하는 능력이 필요하고 이를 발달시키기 가장 좋은 방법은 교육을 통해서이다. 가정에서의 양육과 학교에서의 교육만큼 이 '공감'의 가능성을 키우기에 적합한 장소는 없을 것이다. 다만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가르칠 교과와 교육과정으로 이어진 사이라 해도 이들 사이에 소통과 유대관계가 바탕에 있지 않으면 교육은 피상적인 지식 전달 역할에 그치고 만다. 그래서 교사는 지식 전달자이기 이전에 관계 맺기와 소통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전문가라고 자부할만한 교사는 실상 많지 않다. 더욱이 아이들은 점점 표현과 소통을 낯설어한다. 특히 인터넷 사용 시간이 외로움을 느끼는 빈도와 비례한다는 연구결과는 고독한 젊은 세대가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폭력과 혐오,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물밀듯 밀려오는 각종 오염된 정보와 부정적인 피드백은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정서를 심어주게 될까. 책의 내용대로라면 소외와 고립은 불안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하고 이는 스트레스 유발 유전자를 활성화시키며 여기서 발산되는 고통은 공격성으로 표출된다. 결국 촘촘히 이어진 인간의 신경세포가 도미노 게임을 하듯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솔직히 교직 연차가 쌓일수록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한 존재라는 확신에서 멀어져 왔다. 어떤 아이들에게 거짓말은 너무 쉽고 진실이 밝혀져도 그들은 한결같이 당당하다. 맥락 없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며 죄책감이 없다. 문제는 이렇게 극단으로 치닫는 아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다 그렇다거나 우리 때도 그랬었다는 식의 단순화는 위험하다. 분명 그 정도는 심해지고 있고 교사와 학부모는 지쳐가고 있다. 그러나 책임의 상당 부분은 우리 어른들에게 있다. 이들에게는 인생의 어느 순간 신경세포의 도미노가 와르르 무너져 공격성을 폭발시킨 도화선이 있었을 것이다. 긴 시간 외면되고 방치되었을 자아 연결망 붕괴의 그 출발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저자가 제시하는 교육을 통한 희망은 다소 이상적이다. 무엇보다도 가정과 학교에서의 관계 지향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아이가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환경에서 우호적이고 정서적인 교감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지속적으로 제공되어 나와 타인, 나와 사회, 나와 자연과 연대하는 법을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 현장에는 언제든 이들을 지원할 심리상담 전문가들이 있어야 하며 학생들의 공감능력 향상에 도움을 줄 다양한 예체능 프로그램도 활성화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예술과 문화생활을 경험하면서 다양한 상호작용에 익숙해지고 나의 주변인들과 지속적으로 유대하며 건강한 삶을 유지해 나간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보다 더 참혹하다. 사람들은 남 탓하기 바쁘고 교육은 여전히 개인의 성공을 위한 학업의 수단에 머물러 있다. 변화를 주도하는 자발적 개인은 소수이고 시스템은 깨어있는 그들을 뒷받침해주지 못한다. 그 어느 때보다 이해와 연대와 사랑이 필요하지만 인간의 악한 본성이 드러내는 검은 아우라가 우리의 눈과 귀를 현혹한다.
우리에게는 선하게 살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그리스어로 행복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최고선의 덕목으로, 저자는 이를 '좋은 삶'이라 칭했다. 그리고 좋은 삶은 목적과 의미가 있는 삶으로 정의된다.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타인에게 공감하고 공존할 때, 즉 선하고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할 때 신체 질병을 위협하는 유해 세포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선한 인간성을 통한 도덕적 일상은 건강한 삶에서 오는 행복감과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한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세상에 귀한 그 어떤 것도 건강을 잃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이러니한 것은 이 단순한 진리가 인생의 크고 작은 풍파를 겪고 뒤를 돌아볼 일이 많아질 때에야 비로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건강을 잃어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결국 에우다이모니아적 삶은 나와 관계된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주변 환경, 즉 자연의 생태계까지 끌어안는 모습으로 귀결될 것이다.
인간은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이고 정서적 따뜻함 속에 극진히 보호를 받으며 성장해야 공감능력이 발달된다. 또한 지속적으로 원활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선한 인간성이 발동되어야 한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매 순간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하게 사는 삶을 선택하는 인간들이 더 건강하게 살아남는 것이다. 어렵다. 인간다운 삶. 행복한 삶. 좋은 삶을 누구나 꿈꾸지만 에우다이모니아적 삶의 태도를 내 몸에 딱 맞게 장착하기 위한 여정이 결코 녹록지 않다. 하지만 나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실천하는 수많은 노력들 중 하나로 선하게 사는 삶을 선택해 볼 수 있다. 건강을 챙기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새벽 운동을 나가고 술을 끊고 식이요법을 시작하듯이, 그리고 그 결심이 흐지부지되고 잊힐 때쯤 다시 운동을 알아보고 커피를 끊고 영양제를 챙겨 먹는 무한반복 일상에 공감과 연대, 선하게 살려는 노력을 보태보는 건 어떨까. 실패의 반복이 되더라도 죄책감은 좀 덜할 것 같다. 나의 바깥세상과 공감하는 일이 나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을 가져보자.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