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분33초’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다. 백남준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준 바 있는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가 1952년 발표한 곡이다. 막이 오르면 정장을한 연주자가 무대에 등장해 피아노 앞에 앉는다. 연주를 하는 대신 연주자는 피아노 뚜껑을 닫고 대신 스톱워치를 손에 든다. 정확하게 스톱워치로 각 악장의 길이를 재어가면서 침묵 속에 4분33초를 흘려 보낸다. 피아노 연주 대신 객석에서 나는 기침소리, 관객들이 몸을 움직일 때 나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운다.
콘서트 홀에서 연주자는 음악을 연주하고 관객은 숨죽여 감상하는 것이 음악회의 알고리즘이다. 기침소리나 의자에서 나는 소리 등은 소음이고 가능하면 없애야 할 오류이다. 존 케이지의 음악은 거꾸로 그 오류를 예술로 본 것이다. 프로그램으로 정해진 것보다는 우연성 또는 비결정성을 예술의 본질로 보는 그의 철학은 알고리즘 시대에 시사하는 바 가 크다. ‘명령과 제어(Command and Control)’의 제국에서는 오류만이 자유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오류로부터 혁신이 나온다. 성공한 혁신은 제국을 만들기도 하고 거기에서 튀어나온 반항아들이 또 다른 제국을 만들어간다. 인터넷의 역사가 그렇다. 중앙집중적인 1세대 사이버네틱스인 IBM에 대항해 개인화된 컴퓨터인 PC혁명을 서부의 히피들이 만들어냈다. 실리콘밸리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 었는가 질문에 휴렛패커드의 창업자 데 이비드 휴렛은 ‘워싱턴DC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라 한 바 있다.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라든가 마우스, 노트 북의 원형, 이더넷 등 수많은 발명품을 1970년대에 만들어낸 연구소 파크 (PARC)의 모기업 제록스는 프린터를 만드는 회사였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 트 창업자들은 제록스 파크가 발명만 하고 상업화하지 않는 아이템들을 가져다 PC혁명을 일으켰다. 그들은 모두 대학 중퇴자였다.
웹2.0 시대의 구글은 오픈 플랫폼이 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야후나 넷스케이프와 같은 1.0 시대의 인터넷 기업들을 무너뜨렸다. 혁신을 영속적으로 내부화 하려는 의도로 오픈 이노베이션 시대를 연 것이다. 그런가 하면왜집 안에서만 인터넷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언 제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는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다. 자기가 만든 기업에서 쫓겨났던 스티브 잡스는 돌아와 파괴적 혁신 시대의 불멸의 아이콘이 됐다. 페이스북은 어느 날 밤 하버드 대학의 전산시스템을 해킹해 학생들의 기록을 빼 낸 문제아가 창업했다. 학생들의 얼굴을 올려 누가 더 마음에 드는지 투표하게 한 마크 저커버그는 곧 소셜네트워크의 제왕이 됐다. 물론 그가 실리콘밸 리로 이주한 점, 그리고 당시 거액의 인수 제안이 들어왔음에도 팔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사업에 확실한 비전을 가졌던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느덧 인터넷이 반항아들이 건설한 제국들-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넷플릭스로 재편돼 버렸는가 싶었을 때 또 혜성과 같이 일군의 이단아들이 등장했다.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네트워크 기술에 토큰 경제라는 고유한 경제 프로그램을 장착해 분산화와 투명성의 기치를 내걸자 전 세계 밀레니얼들의 마음이 단번에 사로잡혔다. 마음뿐 아니라 지갑까지 사로잡아 문제가 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인터넷을 향한 도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의 반항아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데이터 주권의 확립을 통해 플랫폼 기업들에 의해 유린 되고 있는 개인의 권리와 주체성을 되찾자는 실천 철학에 바탕을 둔다.
인터넷상의 혁신처럼 고도의 기술 기반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탈프로그램의 기회는 적지 않다. 기존과 생각을 달리하고 바닥부터 배우고자 하는 성실함과, 역경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끈기와 배짱이 있는 개인들에게는 언제나 기회가 주어진다.
게다가 디지털 미디어는 좋은 아이디어의 확산을 손쉽게 한다. 예컨대 창고 에서 재고로 썩고 있는 못생긴 농산물 을 저렴하게 팔거나 건강 간편식으로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지구인컴퍼니’가 있다. 이들이 구출하는 못생긴 농산물은 한 해 버려지는 잉여 농산물의 절반이 넘는다. 또한 독자적으로 개발한 피자 화덕을 푸드트럭에 싣고 다니며 1인용 피자시대를 연 ‘고피자(GOPIZZA)’의 임재원 대표도 전도유망한 혁신가이다. 카이스트 출신의 임 대표는 피자 학원을 다니며 도우를 반죽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드물지만 10대 창업자도 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전기차 충전소를 찾아주는 앱을 개발한 유병현 학생의 케이스이다. 이 친구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내실도 없이 너무 쉽게 창업을 한다며 대표라는 직함의 무거운 책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빛나는 탈알고리즘의 사례들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청년들은 대체로 체제 순응적이다. 오죽하면 공무원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군일까? 도전보다는 안정을, 사회를 바꾸어가기보다는 자기 계발을, 그리고 사회 전체에 선한 영향을 끼치기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우선시한다. 교육 시스템과 디지털 미디어의 탓도 있겠지만 이들에겐 특수한 상황이 있었다. 현재의 20대는 90년대 에 역사상 가장 유복한 유년기를 보내다가 10대 청소년이던 97년 갑자기 외환위기가 닥친 세대이다.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아버지가 직장을 잃고 가정이 파산되는 것을 보고 자란 이들에게는 경제적인 안정이 최고의 가치일 수 있다. 게다가 세상은 이미 저성장 시대에 돌입했다. 그러나 패기와 열정이 없는 젊은이들이 대다수인 나라의 미래는 어둡다. 알고리즘의 굴레에서 모두가 서서히 가라앉고 만다. 무엇으로 이들 청년의 가슴을 뛰게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