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했지만 알게 되는 것들

영화 '애프터썬, ' 부모와 자식 그 사이의 수억광년의 시간에 대하여

by 언어유랑자


집중력 따위 도둑맞은 두 달이었다. 여느 때처럼 회사일은 바빴고,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잠시 잠깐 짬이 날 때에도 그저 유튜브와 틱톡을 배회하며 도파민을 충전했다. 무언가에 집중하기에 2시간은커녕 1분도 버거웠다. 날 웃기든 울리든 15초 안에 결론지어지길 원했다. 감상이란 걸 느낄만한 영화도 드라마도 보지 못한 채 그렇게 두 달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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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갑자기 가게 된 한국 출장. 비행기 좌석에 앉아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꾸고 나서야 드디어 그 어떤 것도 날 방해하지 않는, 다소 심심하고 조금 허전한 나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하네다에서 김포까지 단 두 시간. 고맙게도 내가 탄 대한항공은 알찬 플레이리스트를 준비해두고 있었고, 목록을 훑다가 ‘애프터썬'이란 영화 제목을 봤다. 봐야겠다고 언젠가 메모해 둔 기억은 나는데, 메모를 한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차에 발견한 상영시간. 마침 딱 2시간 짜리였다. 딱히 할 것도 없는데 뭐. 무심하게 재생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2시간. 참으로 오랜만에 영화와 함께 고요한 시간이었다. 난기류 때문이었을까. 영화 때문이었을까. 문득문득 마음이 울컥울컥 흔들렸던 것 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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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줄거리랄 것이 없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갔던 튀르키예 여행에 대한 추억이 영화의 전부. 우연히 발견한 캠코더 영상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아버지 캘럼과 10살 소피가 떠난 여행을 추억한다. 사건도 없고, 우여곡절도 없다. 둘은 꽤나 사이가 좋은 부녀. 엄마, 아빠가 이혼을 한 터라 소피와 아빠는 함께 살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여행 내내 함께 웃고 떠들고 장난을 치고 어울려 노는데 어색함이 없다.


영화 속 둘의 여행은 우리의 기억 속 대부분의 여행이 그러하듯 희미하지만 아련한, 어쩐지 애잔한 빛깔이 덧씌워져 있다. 중간중간 들어가는 캠코더 영상 같은 것들이 특히나 그랬다. 우리가 오래전 갔던 가족여행의 추억 속에 다시금 들어가는 느낌. 실제로 그 여행이 어땠는지와 상관없이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더 자세하게 보여주는 영상들.


딱히 갈등이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행 동안 그 둘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약간의 말다툼과 침묵들. 말하지 않은 것들과 기어이 말해버린 것들 사이의 갈등. 영화 내내 소피와 캘럼 사이에는 그런 미묘한 순간들이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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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가 아빠에게 “아빠가 보고 싶을 때면, 우리가 같은 태양을 볼 수 있단 사실을 떠올려. 비록 같은 장소에 함께 있진 않더라도, 같이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라고 말할 때의 아빠의 표정. 돈 이야기가 나올 때면 조금은 난처해 보이는 아빠의 뒷모습. “11살 때 아빠는 지금 뭘 할 거라고 생각했어?”라고 소피가 천진하게 물었을 때의 아빠의 막막한 얼굴과 끝내 듣지 못한 아빠의 대답. 며칠을 고민해서 카펫을 산 뒤 그 카펫에 가만히 누워있는 어둠 속 아빠의 모습 같은 것들.


영화는 그러한 순간들을 통해 소피의 아버지 캘럼이 당시 쉽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만들 뿐, 끝끝내 그가 그 당시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그 여행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데, 생각해 보면 딱히 울만한 장면도 사건도 없는데, 나는 그 와중에 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비행기 불이 꺼진 걸 고마워했다. 가슴은 먹먹한데, 왜 먹먹한지 모호했다. 그랬다. 정말이지 모호한 영화였다. 뭐 하나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도 뾰족하게 드러나는 것도 없는 영화. 하지만, 이내 알게 되었다. 그 모호함이, 그 어렴풋함이 바로 어른이 되어 그 캠코더 속 영상을 다시 보고 있는 소피의 시선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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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어른이 된 소피는 여행을 떠올리면서, “아빠는 그때 어떤 감정이었을까.” 궁금하면서도 “아빠도 쉽지 않았겠구나.” 이해하게 되었겠지. 영화 중간중간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는 아빠의 모습처럼, 당시 아빠의 감정을 그렇게 서서히 알게 되었겠지. 11살 소피는 보지 못했지만, 아빠의 나이가 된 소피에게는 보이는 것들.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은 감정들.


캠코더 영상을 보고 있는 어른이 된 소피를 보며, 8년 전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8년 전, 나는 아빠의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떠올렸다. 아버지의 암수술을 기다리던 나보다 어렸던 아빠의 모습을. 친할아버지는 내가 6살 때 암으로 쓰러지셨다. 이미 암이 많이 진행된 상태에서의 수술. 병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복도는 어떤 모양이었는지, 몇 시였는지, 어떤 계절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기억나는 건 울고 있던 젊은 아빠의 모습. 그런 아빠에게 “암이 뭐야?”라고 천진하게 묻던 내 모습. 그때 아빠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빠의 수술을 기다리며, 비로소 나는 그 당시 아빠에게 할아버지의 수술이 어떤 의미였을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때 아빠도 참 무서웠겠구나. 6살의 내 눈엔 보이지 않았지만, 그때 참 막막했겠구나. 지금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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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쩌면 엄마를, 아빠를, 우리의 부모를 이해하면서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슈퍼히어로였던 그들이, 한낱 나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그들에게도 인생은 쉽지 않았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들은 참 부단히 노력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렇게 그들이 안쓰럽고 짠해지면서,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된다.


아직 어른이 되기까지 기나긴 세월이 남아있는 5살 딸아이를 바라본다. “엄마는 왜 나랑 안 놀아줘?”라며 무해하게 묻는 아이를 보며, 부모와 자식 간의 감정, 그 사이에 놓인 그 엄청난 시간의 간격에 대해 생각해 본다. 회사일 때문에 늘 유치원 종일반에 늦게 데리러 가는 내가 얼마나 미안한지, 함께 하는 주말이면 얼마나 마음을 다해 행복한지, 딸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 어떤 사랑이 담겨있는지, 지금 나의 이 감정을 딸아이가 알게 될 때가 되면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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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억광년 떨어져 있기에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하늘의 별은 언제나 별의 과거 모습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지금은 절대 알지 못하는 것들, 알게 되면 결국엔 과거일 수밖에 없는 것들. 부모와 자식 간의 그 수억광년 떨어진 시간의 간격을 떠올리며 마음이 먹먹해진다. 하지만, 나의 이 마음이 수십 년 후에라도 가서 닿을 수 있다면, 비록 과거의 별이라도 미래의 딸아이를 따스하게 비출 수 있다면,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침내 딸아이가 지금의 나의 마음을 알게 되는 때가 오면, 딸이 웃고 있으면 좋겠다. 밝게 행복하게.


* <광고계동향 AD-Z> 2023년 9-10월호 T-Vibe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