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행 일기 4
네 번째 이야기, 많이 기다리셨죠?
제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기 전에 글을 써봅니다. 여러분께 보여드리기도 하지만 제게도 소중한 기록으로 남으니까요.
세 번째 글의 끝이 “내일은 어떤 선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 였는데, 그럼 그 선물, 본격적으로 개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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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 적응이 첫날 바로 성공했다… 고 믿으면 절대 안 된다. 원래 뉴욕 도착해서 첫날은 비행기에서 못 잔 잠에, 피곤한 상태로 억지로 돌아다녔기 때문에, 시차 적응이 된 게 아니라 “기절? 한 상태로 뻗음”이 맞는 표현이다. 뉴욕의 첫날은 생각보다 늘 충분한 잠을 잔다. 커피를 낮에 사발로 마시지 않는 한 그렇다. 그러나 그다음 날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창 돌아다닐 오후가 한국시간으로 한밤중이기 때문에 아무리 전날 잘 잤어도 졸릴 수밖에 없다. 꾸역꾸역 잠을 참아 내고 밤 열 시쯤 잠이 들면 새벽에 엄청 일찍 눈이 떠진다. 말똥말똥, 뒹굴뒹굴을 반복하다 보면 아침이 밝아온다. 반대로 밤에 잠이 들어야 되는데, 잠이 오지 않기도 한다. 몸은 두들겨 맞은 것 같은데, 자정이 지나도, 새벽 2시가 지나도 고장 난 시계처럼 눈만 부릅뜨고 있다. 어떤 경우이건 간에 다음날 피곤한 상태로 돌아다녀야 되고, 낮엔 다시 졸리고, 이 졸음의 악순환은 적어도 일주일간 계속된다. 분명 괴로운 일이지만, 시차라는 것을 오랜만에 느꼈더니 이상하게도 즐거웠다. 이런 어정쩡한 몸상태를 다시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아직 덜 피곤하니까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건지도.
아무튼 아침부터 하이라인으로 향했다. 토요일이어서 오후면 사람이 많아질 게 분명하기에 서둘렀다. 지난번에 뉴욕에 왔을 때가 2019년 2월이었는데, 그때는 허드슨 야드의 샵들만 일부 문을 열었고 베슬은 한참 공사 중이었다. 15층 나선형 계단 형태로, 벌집 모양을 연상시키는 베슬을 보면서 아이언맨이 미래 세계로 나를 데려다줄 것 같아 기대가 컸다. 그러나 완공된 베슬은 통제 중이었다. 여기서 사람들이 뛰어내리는 참사가 일어나서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상태였다. 아… 안전상의 이유니까 어쩔 수 없었지만, 정말 아쉬웠다. 베슬 아래쪽에서만 사진을 찍었는데, 아무리 해도 각도가 잘 나오지 않아 그것도 또 아쉬웠다. 대신 에지에 올라갔다.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100층에서 내리면 367미터 높이의 전망대가 기다리고 있다. 고소공포증이 없어서 전망대 올라가는 것을 굉장히 즐기는 편인데, 낭만적이긴 하지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대신, 에지에 올라가 볼 것을 추천한다. 시원한 허드슨 강과 함께 이어지는 아름다운 로어 맨해튼의 뷰를 최대치로 즐길 수 있다. 강화유리 바닥으로 되어 아래를 볼 수 있게 한 것도 마음에 든다. 강화 유리 부분을 지나가지도 못하는 사람들 보란 듯이, 바닥에 턱 하고 앉았다. 이럴 때만 유일하게 겁이 없다.
에지에서 내려와 하이 라인을 본격적으로 걸었다. 2009년인가, 내가 뉴욕에 막 왔을 때 생겨서 그때는 찾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특히 관광객들은 여기를 잘 몰랐다. 그리고 구간이 하나씩 연장될 때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지금은 뉴욕에서 빠트릴 수 없는 주요 관광 코스 중의 하나이다. 뉴욕에 살 때도 그랬지만, 그 이후에 매년 뉴욕을 다시 찾을 때도 하이 라인은 내게 힐링의 공간이었다. 생각이 많을 때, 혼자 있고 싶을 때, 하이 라인을 걷고 또 걸었다. 센트럴 파크처럼 자연에 더 가까운 곳을 걷는 게 나은 선택일지도 모르겠지만, 빌딩들 사이에 파묻혀 공존하는 이 길을 걸어야 덜 외롭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여기를 더 선호했다. 너무 현실이 괴롭지만 현실과 떨어지고 싶지는 않을 때, 그때는 하이 라인으로 가면 된다. 가끔은 여기서 눈물도 훔쳤던 것 같다. 돌아갈 현실이 괴로워서, 내 미래가 걱정스러워서, 뉴욕이 좋아서, 날이 너무 완벽해서, 인생이 정말 아름다워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행복해 보여서… 갖다 붙일 수 있는 모든 이유로 말이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최애 식당인 ‘펄 오이스터 바’를 찾았다. 이곳은 내게 소울 푸드를 제공하는 곳이다. 랍스터 롤을 어릴 때부터 먹었던 것도 아니지만, 뉴욕에 오면 여기부터 찾는 것을 보면 분명 소울 푸드, 아니 소울 음식점이다. 세련되지 않아 분위기가 편하고 음식들이 죄다 맛있다. 이곳의 시그니처는 내가 가장 좋아하기도 하는 랍스터 롤이다. 통통하게 살이 꽉 찬 랍스터를 야들야들한 빵 사이에 먹음직스럽게 채워 넣었고, 그 옆에는 슈스트링 감자튀김, 신발끈처럼 가는 프렌치프라이, 이 푸짐하게 곁들여 나온다. 테이블보다는 바를 더 좋아한다. 주로 혼자 갈 때가 많아서 인지, 바에 앉으면 덜 심심하다. 바쁜 주인아저씨가 민첩하게 움직이는 동작들을 보는 것도 재밌다. 예를 들어 거품을 잘 조절하며 맥주를 따르거나 케첩을 건네주거나, 혹은 계산서를 작성하는 모습 같은 것 말이다. 화이트 와인 한 잔 하면서 약간 알딸딸한 상태에서 누군가 기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다. 뭐,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다.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고 지하철을 탔다. 아시안 헤이트 사건이 지하철에서도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조심스럽게 올라탔는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일부러 부딪히는 사람은 없었다.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편치 않은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인종혐오니, 갈등이니 같은 단어들이 뉴스에서나 들리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씁쓸해진다. 예전에 뉴욕에 있을 때, 굉장히 부잣집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파티 비슷한 거였는데, 거기에 있던 사람들 중에 아시안은 나뿐이었고, 다 백인이었다. 그 집의 부인은 너무 친절했지만, 그 지나친 친절함 속에 알 수 없는 냉기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런 게 인종차별일까 생각했었다. 차별을 담은 말이나 직접적인 행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분명 차별이라고 느꼈다. 찰나지만, 너무 차가운, 가까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눈빛을 읽었기 때문이다. 한 번이었는데도 불편했는데, 차별을 넘어서 폭행 사건까지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세상이 분명 거꾸로 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누구나 분노를 가슴에 안고 살고, 특히 팬데믹으로 인해 그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 분노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아무런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그런 공격이 어떤 공간에서는 용인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무섭다. 나도 혹시 내 안의 분노를 정당한 이유 없이 혹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작게라도 표출한 적이 있었을까…
무사히 지하철에서 내려 센트럴 파크로 향했다. 이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돌아다니는 이유는 내일이면 어학연수를 받을 Tarrytown 태리타운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그랜드 센트럴 역까지 40~50분이면 도착하는, 맨해튼과 그렇게 멀리 떨어진 동네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수업에 집중하려면 당분간 맨해튼에 나올 일이 없을 것 같아 더 열심히 다녀야 될 것 같았다. 하이 라인을 좋아하긴 하지만, 센트럴 파크는 분명 뉴욕의 상징이자 하이라이트다. 이런 곳과 우리 집이 운 좋게도 매우 가까워서 집 앞 공원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는 하이 라인보다는 훨씬 자주 드나들었던 센트럴 파크에 아무래도 많은 추억이 있다. 여기서 달리기도 했고, 자전거도 탔고, 무도회라는 데에도 갔었다. 특히 주말이면 루틴처럼 쉽 메도우에 앉아 이어폰을 들으며 주말판 뉴욕 타임스를 읽었었다. 어르신처럼. 신문에 집중하기보다는 뉴요커들이 선탠을 하거나 가볍게 공을 주고받거나 피크닉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주말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여름이면 여름이어서 좋았고, 가을이면 가을이어서 좋았다. 한 번은 장화를 신고 무릎 가까이 눈 덮인 센트럴 파크를 어기적 거리며 걸었었는데, 동화 나라에 온 것처럼 환상적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달리는 사람들이 역시 많다. 저 대열에 합류해 뛰어보기도 했었는데, 다들 바람같이 달렸던 기억이… 뉴요커들은 뭘 먹고 저렇게 체력이 좋을까 생각했었다. 11월에 뉴욕 마라톤이 열려서 대회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 같다. 작년에 건너뛰고 드디어 열린다는데, 참가자들이 얼마나 기다렸을까. 나는 달리기에 진심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만으로도 괜스레 벅차다. 뭔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어서. 마라톤에 결승점이 있듯이 이 팬데믹에도 끝이 있었으면 좋겠다.
10월이지만 여름 같은 날씨다. 뉴욕의 가을을 기대하고 왔는데, 아직 센트럴 파크에 가을이 오지 않은 것 같다. 10월 말이나 돼야 가을 느낌이 제대로 나려나. 뉴욕을 떠나기 직전에 다시 와야겠다 생각하며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텔로 돌아와서 건너편 건물을 우연히 봤더니 화이자 건물이었다. 화이자 백신을 맞고 왔는데, 여기서 또 이렇게 화이자를 만나니 뭔가 안심이 되는 기분이다. 아니, 제발 백신의 효과가 제대로이길 바라본다. 잠은 별로 오지 않지만 일단 잠을 청한다. 내일은 맨해튼을 떠나 이번 여행의 주목적인 어학연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맨해튼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새로운 환경으로 이동이라니, 설레기도 하면서 귀찮기도 하다.
오늘도 크라이슬러가 반짝이며 인사를 건넨다. 그래, 행복했어. 오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