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밤을 샌다. 그게 편하고, 익숙해져버렸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어디 출근할 필요도 없고 내 집, 내 방에 처박혀 하는 일이니 굳이 남들의 정상적인 활동시간대에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늘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인이 박이는가싶더니 결국 낮과 밤이 아주 바뀌어버렸다. 이제 해가 뜨고 한참이 지나야 잠이 들고, 석양이 질 무렵에 눈을 뜬다. 어차피 혼자 사니까 누가 잔소리를 하거나 간섭할 일도 없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분리수거를 하는 날이 정해져 있다. 매주 목요일이다. 오전 11시까지만 내다버릴 수 있다. 나는 주로 새벽을 이용한다. 보통 전날 밤에 분리수거가 이뤄지는 공터에 분리수거를 위한 마대자루가 설치된다. 분리수거장이 된다. 나는 이것저것 일을 보다가 수요일 밤을 지새우다 새벽 4시쯤 나가서 분리수거를 하는 것이다. 분주하지도 않고 편하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수요일이었다. 나는 밤 11시 반쯤, 커피를 내려가지고 서재로 들어갔다. 일을 좀 보다보니 금세 시간은 새벽 3시를 가리켰다. 딱히 더 할 것도 없는 것 같고, 오늘은 좀 일찍 나가볼까 싶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냈다.
옷방에 가서 대충 점퍼만 걸치고 나와 다용도실에 가서 분리수거할 것들을 모은 바구니를 꺼내왔다. 딱히 분리수거물이 나올 만한 게 없을 것 같은데도 매주 최하 한 바구니는 나온다. 이런저런 우편물에 광고지, 택배박스에 라면봉지에 음료수 병이며 맥주 캔에 우유팩에 각양각색이다. 가만히 그것들을 들여다보면 내가 일주일간 뭘 하고 살았는지 대충 곱씹어지기도 한다.
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빵 봉지를 집어 대충 바구니 안에 쑤셔 박은 뒤,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섰다.
내가 사는 불암산 언저리의 재개발 아파트는 네 개의 동이 모여 한 구획을 이루고 여러 개의 구획이 모여 대단지를 이루고 있다. 분리수거는 네 개의 동이 둘러싼 중앙,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 마련된 공터에서 이뤄진다. 내가 사는 동에서 나가면 바로 정면이라 가까워 좋다. 우리 집은 3층인지라 계단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갔다. 방범출입문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각, 한겨울의 아파트 단지는 쥐죽은 듯 적막뿐이다. 슬리퍼 끄트머리가 바닥에 끌리며 나는 소리, 허연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소리, 바구니 안에서 캔과 병이 부대끼는 소리까지 하나하나 또렷하게 들린다. 아파트 동이 둘러싸 분지를 이룬 곳이라 그런지 메아리처럼 소리가 울리기까지 한다. 또 밤이면 감각마저 예민해지는지라 원체 소리가 크게 들린다.
실제로 내가 느끼는 것처럼 시끄러운 소리는 아닐 테지만, 깊은 새벽 잠에 빠져 있는 주민들에게 폐를 끼칠까,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밤을 새고 낮에 잠드는 나와 달리 밤의 단잠으로 에너지를 충전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조심조심 살금살금 마대자루들이 설치된 분리수거장에 가 분리수거를 시작했다. 미리 분리를 해놓지 않고 바구니에 마구잡이로 쑤셔 넣어놓은지라 하나씩 제 위치를 찾아 버려야 한다. 이리저리 왔다갔다 분주하다. 그렇게 약 10분에 걸쳐 분리수거를 마치고 돌아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아파트를 올려다봤다.
분리수거장 정면에서 아파트를 바라보면 주방 싱크대에 나 있는 작은 창들, 내가 옷방으로 쓰고 있는 작은방으로 난 커다란 창들이 보인다. 20층까지 일렬로 길게 늘어서 있다. 집 안에 불을 켜두면 저층일 경우 작은방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리고 나는 문득 보았다. 아니 보였다.
저층부의 한 집 작은방 쪽의 창에 바짝 붙어 서있는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하얀색의 헐렁한 잠옷을 입고 있었다. 처음엔 불이 꺼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아 옷걸이나 화분 같은 것을 세워둔 줄로 알았다. 허나 분명한 사람의 형상이었다. 어깨까지 닿은 머리칼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것이 사람이라는 건 더욱 확실해졌다.
그 형상이 슬며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분리수거 바구니를 든 채로 그 모습을 그냥 지켜보고 서 있었다. 호기심 혹은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여자는 움직였다.
여자가 앞으로 한걸음 더 다가섰다. 창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두 팔로 창문을 짚는가 싶더니 얼굴을 바짝 창에 갖다 붙였다. 여자의 코와 입에서 숨이 뿜어져 나오는 족족 창에 짙은 김이 서렸다. 나는 그 틈으로 잘은 보이지 않았으나 여자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인지할 수 있었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입이 길게 거의 귀까지 찢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만치 활짝 웃고 있었다. 창에 서린 김과 머리칼에 가려 눈도, 코도 잘 보이지 않았는데 오직 그 입술만 또렷이 보였다. 그때 내가 놀란 것은 그 소름끼치는 웃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길게 찢긴 입술 사이로 혀가 길게 비어져 나와 턱까지 늘어져 있었다. 이따금씩 여자가 살짝 움직이면 혀가 덜렁덜렁 움직이며 창을 때리는 게 보였다.
어둠이 잔뜩 내린 아무도 없는 겨울새벽의 아파트의 분리수거장에서 생각지도 않게 목도한 여자의 모습은 참으로 기괴하고 무시무시했다.
나는 그냥 못 본 척 무시해야할지, 아니면 손이라도 흔들어 진짜 사람인지 확인할지를 고민했다. 물론 답은 금방 나왔다. 이런 건 못 본 척 하는 것이 최고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내리려는데 문득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충격에 빠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일단 모른 척하고 빠르게 다리를 놀려 방범출입구까지 갔다. 어쩌면 도둑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 괴이한 얼굴은 뭐란 말인가? 혹시 가면 같은 것을 쓴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큰일이다. 경비원이 새벽 4시까지는 휴식시간인지라 경비실은 비어 있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할까? 아니면 혹시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나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휴대폰도 없다. 어차피 신고를 하려면 집에 들어가야 했다. 주머니 속엔 피다만 담배만 한 갑 들어있었다. 다행히 라이터도 함께 들어있어 일단 담배부터 한 대 입에 물었다.
잠시 그렇게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겼다. 여전히 오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조용하기만 했다. 물론 이 시간엔 그게 자연스럽다. 나는 내키지 않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좀 허해서 헛것을 봤을 수도 있다. 귀신 따위는 믿지 않지만 착시 정도야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혀를 길게 빼물고 웃는 여자 따위를 본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돼는 착시 같았지만 일단 다시 확인하자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 집이 아닐 수도 있다. 1층 정도야 헷갈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만약 내 집이라면 여자가 얼굴을 들이대고 있던 창은 옷방이다. 내가 점퍼를 꺼내 입으러 들어갔을 땐 아무도 없었다. 그게 고작 십 몇 분전이다. 그렇게 빨리 잠긴 문을 열고 누가 안에 들어갔을 리도 없다.
나는 용기를 냈다. 천천히 분리수거장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걷다가 슬며시 뒤로 돌아섰다.
과연! 아무도 없다!
우리 집, 윗집, 아랫집 모두 텅 비어 있다. 어둠뿐이었다. 헌데 만에 하나라도 저 방안 어딘가 숨어 있기라도 한다면........... 나는 도리질을 치고 일단 집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날도 추워죽겠는데 어차피 여기서 날을 새울 수는 없는 일이다. 슬리퍼를 끌고나온 맨발이 시려죽겠다. 그나마 하잘 것 없는 착각일지도 모를 일 때문에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잠깐 분리수거를 하고 왔을 뿐이다. 내가 내 집에 들어가는데 어찌나 심장이 뛰고 긴장이 되던지 현관 앞에 다다르자 차라리 밖에서 밤을 지새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잠금장치의 비밀번호를 하나하나 신중히 눌렀다.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천천히 문을 열었다. 조용했다. 안이나 밖이나 그저 적막이다.
나는 현관문을 붙든 채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소리가 나지 않도록 현관문을 닫았다. 살금살금 걸어가 슬리퍼를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방 즉 옷방 문은 닫혀있었다. 내가 문을 닫고 나왔는지 가물가물했다. 옷방 앞으로 갔다. 그대로 서서 귀를 기울였다. 잠잠했다.
문고리를 붙들었다. 문득 만에 하나 이 방문 너머에 정말 누군가 있다면 내가 놀라는 것보다는 상대방이 놀라는 것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감해지기로 했다. 문고리를 홱 돌리며 강하게 밀어제쳤다. “우왁!” 소리치며 활짝 문을 열어버렸다. 어두운 방 안, 옷걸이만 어지러이 서있다. 방안엔 아무도 없었다. 옷장 문도 열어봤다. 역시 비어있었다. 그래도 안심을 하지 못한 나는 온 집안을 돌며 비슷한 짓을 했다. 닫힌 방문을 열고, 붙박이장을 열어보고 소리를 질렀다. 결과는 간단했다. 빈 집에서 새벽에 혼자 난리를 피웠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서재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 온 집을 확인했음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어쩐지 불안감이 남아 여기저기 웹서핑을 하며 뉴스를 보거나 우스개를 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아무래도 여전히 어둡고 조용한 탓이었을 게다. 홀로 넓은 집에 있다 보니 더 그런 것 같았다.
그렇게 또 밤을 샜다. 날이 밝았다. 나만 홀로 불안에 빠져있었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밝은 햇살이 창을 때리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슬슬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보통사람들과 완전 반대로 가는 생체시계가 아침햇살에 즉각 반응을 하는 것이다. 나는 안방으로 갔다. 화장실에 가서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로션까지 착착 바른 뒤에 옷을 벗고는 커다란 침대 위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자고 나면 또 다 잊을 것이다. 지난밤의 착각도 공포도 말이다.
스르르 잠이 들어가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받지 않았다. 수신거부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잠시 뒤 재차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짜증스레 휴대폰을 낚아챘다.
아버지였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됐다.
자살을 했단다. 입원해 있던 병원의 화장실에서 목을 맸단다. 나는 잠이 싹 달아나버렸다.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새벽에 봤던 여자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애써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방은 원래 누이의 방이었다.
내가 사는 집은 혼자 살기엔 너무 크고 좋은 집이다. 방이 네 개나 되고, 거실도 주방도 넓고 좋다. 처음 내가 들어와 살게 되면서 수리를 해 새집 같다. 오랫동안 사귀던 연인과 이별한 뒤, 결혼은 포기했다. 나는 내 마음을 부모님에게 고백했다. 부모님은 어떻게든 날 설득하려했지만, 내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결국 부모님은 그대로 귀향을 해버렸다. 지금 내가 사는 집은 부모님이 사시던 집이다. 나는 홀로 오피스텔에 거주하고 있었고, 부모님은 귀향을 서두르고 있었다. 집을 처분하거나 세를 주려고 했지만, 큰 집이고 위치도 시내가 아닌지라 쉽지 않았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오가다 결국 내가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오피스텔을 처분하고 집을 수리해 혼자 이렇게 넓은 집을 차지하게 됐다.
집이 이렇게 넓은 이유는 원랜 부모님과 나, 그리고 누이까지 넷이 살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떠나고 다음엔 누이가 떠났다. 나는 일 때문에 누이는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을 했던 것이다.
확실히 말해 누이는 정신병원에 감금됐다. 누이는 히스테리성 발작에 조현병을 심하게 앓았고, 부모님이 어찌해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그리 됐다. 누이는 오랫동안 도통 제 방에 들어박혀 나오지 않는 은둔외톨이였다. 확실히 언제부터 뭐가 잘못돼 그리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엄하고 권위적이던 아버지 탓인지, 학창시절 왕따를 당한 트라우마 탓인지, 아니면 원체 성격이 그랬던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누이에게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늘 나만 생각한다. 이별도 실은 그런 내 성격 탓이 크다. 나는 나만 편하고 나만 잘 먹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그게 모두에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런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렇게 살아서 크게 문제가 생긴 적도 없다.
나는 간섭받기 싫어 취업을 한 뒤에 곧장 혼자 살 곳부터 마련했고, 집을 나와 버렸다. 누이의 상태가 아주 심각해진 건 그 뒤의 일이었다. 어느 날인가 집에 잠시 들렀을 때 보게 된 누이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귀신이라도 들린 듯 비명을 지르고 욕설을 하며 집기를 부시던 누이는 당시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했다.
나는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가 되어 시간적 여유가 많이 생겼음에도 누이가 있는 병원에 찾아가본 적이 없다. 형제자매가 가까이 지내며 서로 돕고 즐기면서 인생을 사는 것도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허나 혈연, 형제자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굳이 나서지 않아야 할 일에 나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누이의 병원비를 보탰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누이는 바로 그 병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아버지의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병원에서 그리 된지라 곧바로 장례절차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병원은 생각보다 꽤 멀었다. 차를 몰고 갔는데 출근시간까지 겹쳐 가는데 상당히 오랜시간이 걸렸다.
병원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장례식장을 찾아 갔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뭐랄까? 좀 현실감이 없었다. 비몽사몽인 것도 그렇거니와 갑자기 누이가 자살을 했다는 말도 도무지 믿기 힘든 일이었다. 때문에 난 어떤 슬픔이나 안타까움의 감정 없이 그냥 무덤덤하게 장례식장 안에 발을 들였다.
장례식장은 언제나 그리 달가운 장소가 아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 누이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부모님도 오랜만에 보게 됐다. 이미 많이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놀랍게도 늘 엄하고 화만 낼 줄 알던 아버지의 눈도 그랬다.
부모님은 내 성격을 잘 안다. 내가 짜증을 내거나 싫어할 것이 뻔해 여태 드러내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누이는 병원에 입원한 뒤로 늘 입버릇처럼 날 보고 싶다 했다고 한다. 죽기 전날에도 ‘오빠 얼굴 한 번만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누이가 날 왜 보고 싶어 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사춘기 이후로 은둔외톨이가 되어버린 누이에게 좋았던, 행복했던 기억이란 아련한 어린 시절의 기억뿐일 게다. 나도 어릴 땐 누이와 가까웠다. 커가며 제 의식과 알량한 가치관이 생겨버렸을 뿐, 중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누이와 대화도 많이 하고, 나가 놀기도 했던 것 같다. 특히 유년시절엔 매일 누이의 손을 붙잡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놀던 기억이 난다. 누이는 날 잘 따랐다. 하나뿐인 오빠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집을 떠난 뒤부터 그저 집밖에 나가지 않을 뿐이던 누이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버렸다. 내 탓인지도 모른다. 누이에게 나는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을지 모른다. 무너져가는 정신을 지탱해주는, 언제라도 손을 내밀어줄 일종의 희망이었는지도 모르고, 물론 나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치부했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도 떠오른다. 어지간해선 방밖을 나오지 않는 누이지만 가끔씩 집에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면 아무 말도 없이 내 밥상을 차려주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내 생일날에 돈이 없으니 선물은 못해줄지언정 짤막하게 편지를 써주기도 했다.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보냈던 누이와의 일들이 하나하나 다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지난밤의 일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 방에 있던 그 여자가, 그 얼굴이 누이가 아니었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니 누이가 확실하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지금까지 가치관의 하나라 자부하던 고립된 삶은 실상 이기심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무엇도 책임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관계에서 도망쳤을 뿐이다.
내 눈에도 끝내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