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 오는 밤
그해 봄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사월 내내 비가 왔고, 오월에도 비가 왔다. 강민준은 나중에 그 시절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젖은 아스팔트 냄새와 함께 기억했다. 그리고 현관 앞에 나란히 세워진 두 개의 우산.
하나는 민준의 것이었다. 손잡이가 나무로 된 검은 우산. 대학원 시절부터 쓰던 것이라 살이 한 군데 살짝 휘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서윤의 것이었다. 남색 바탕에 작은 흰 점들이 찍힌 우산. 서윤은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그것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혹시 모르니까, 라고 했다.
그 두 개의 우산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볼 때면 민준은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우산들이 서로 기대어 있는 것 같아서. 아니, 그냥 둘 다 거기 있다는 것이.
그날 밤도 비가 왔다.
강민준은 마흔세 살이었고, 아내 정서윤은 마흔한 살이었다. 그들은 결혼한 지 십사 년이 됐다. 처음 오 년은 좋았다. 그다음 오 년은 괜찮았다. 나머지 사 년에 대해서는 민준도 정확한 말을 찾지 못했다. 나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좋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집 안에서 조용히 존재했다.
서윤은 인테리어 설계 일을 했었다. 삼 년 전부터는 집에 있었다. 그게 그녀의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서서히 그렇게 된 것인지, 민준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물어봤지만 서윤은 그냥이라고만 했다. 그 두 글자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있는지를 민준은 그때 헤아리지 못했다.
일을 그만두고 나서 서윤은 달라졌다. 처음에는 집이 더 깨끗해졌다. 요리가 다양해졌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집은 조용해졌다. 깨끗했지만 조용했다. 서윤은 민준이 퇴근해도 현관까지 나오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밥을 먹었고 설거지를 했다. 씻었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민준은 그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려 하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면 실재가 될 것 같았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오랜만에 가까워졌다. 비가 오고, 방이 어둡고, 두 사람이 같은 침대 위에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한 이유가 됐다.
끝나고 나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서윤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감지 않았다. 민준은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창밖의 빗소리가 들렸다.
"여보."
낮은 목소리였다. 민준을 부르는 방식이 예전과 조금 달랐다. 예전에는 이름 끝에 힘이 있었다. 지금은 그냥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응."
서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빗소리가 계속 들렸다.
"이곳에서 제발 꺼내줘."
민준은 그 말을 듣고 잠시 굳었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어디로?"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준은 그녀의 손을 찾았다. 이불 위에서 손가락 끝이 서윤의 손가락에 닿았다. 차가웠다. 오월의 밤인데도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언제부터였을까. 손이 이렇게 차가워진 것이. 아니, 언제부터 자신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을까.
서윤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잡지도 않았다. 그냥 있었다.
민준은 그날 밤 오래 잠들지 못했다. '이곳에서 꺼내줘.' 그 말이 머릿속에서 잘 지워지지 않았다. 이곳이 어디일까. 이 방? 이 집? 이 결혼? 이 삶?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물으면 대답을 들어야 하고, 대답을 들으면 무언가가 달라질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들었다.
서윤은 그의 옆에서 끝내 잠들지 않은 것 같았다.
2. 편지
나흘 뒤였다.
그 사이에 특별한 일은 없었다. 민준은 강의를 나갔고, 논문 심사가 있었고, 저녁에 돌아왔다. 서윤은 집에 있었다. 밥이 차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밥을 먹었다. 서윤이 내일 날씨 이야기를 했다. 민준이 학교 이야기를 조금 했다. 나흘 내내 그게 전부였다.
민준은 나중에 그 나흘을 되새기며 신호를 찾으려 했다. 뭔가 달랐던 것이 있었을 텐데. 눈빛이, 말투가, 움직이는 방식이. 그러나 기억 속의 서윤은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조용한 것이 이미 신호였는데, 그는 그것을 오래전부터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 가지만 기억났다. 사흘째 되던 날, 민준이 외출하면서 현관에서 우산을 챙겼다. 서윤이 그것을 보며 말했다.
"비 안 와."
"혹시 모르니까."
서윤이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게 전부였다. 민준은 그때 그 눈빛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날 아침 민준은 여덟시 반에 일어났다. 오전 강의가 없는 날이었다. 거실로 걸어나왔다.
서윤이 없었다.
식탁 위에 편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흰 봉투. 봉투 위에 '여보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서윤의 글씨였다.
민준은 그것을 보는 순간 무릎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봉투가 그냥 봉투가 아니라는 것을, 몸이 머리보다 먼저 알았다.
그는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봉투를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다시 집어 들었다.
펼쳤다.
글자들이 보였지만 처음에는 읽히지 않았다. 두 번째로 읽었다. 세 번째.
서윤의 글씨는 단정했다. 편지는 길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이 여러 번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미 여기 없었어. 그냥 몸만 있었어. 그게 더 힘들었어.'
민준은 편지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서윤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갔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 후의 일들은 흐릿하다.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경찰이었다. 장례가 치러졌다. 사람들이 왔다가 갔다. 민준은 그 모든 것들을 따라가며 해야 할 것들을 했다. 서류에 도장을 찍었고, 인사를 받았고,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어딘가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장례가 끝나고 모두 돌아간 날 밤, 민준은 혼자 현관 앞에 섰다.
우산이 하나였다. 그의 것만 남아 있었다. 서윤의 남색 우산은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서윤이 마지막 날 들고 나간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가져간 것인지.
민준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싱크대 위에 서윤이 쓰던 찻잔이 있었다. 청자색 작은 잔. 서윤이 제주도에서 사온 것이었다. 민준은 그것을 씻지 않았다. 씻으면 서윤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가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미 여기 없었어.'
그 문장이 자꾸 떠올랐다. 자신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서윤이 너무 잘 숨겼던 것인지.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
민준은 그날 밤 찻잔 앞에서 처음으로 울었다.
3. 이 년이라는 시간
이 년이 지났다.
시간은 상처를 아물게 했다. 그런데 아문 자리는 남았다. 그 자리를 어떤 각도로 건드리면 여전히 아팠다.
민준은 일 년 가까이 강의를 나가지 못했다. 집에서는 주로 책을 읽었다. 강의와는 관계없는 낡은 소설들. 문장들이 마음에 들면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 행위가 뭔가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손을 움직이고 싶었다.
서윤의 물건들은 한참 동안 그대로였다. 어느 날 화장대 위의 것들을 상자에 담았다. 천천히. 하나씩. 옷들도 담았다. 그러나 찻잔은 담지 못했다. 찻잔은 여전히 싱크대 위에 있었다.
현관의 우산꽂이에는 그의 우산만 있었다. 검은 우산. 살이 한 군데 살짝 휜 것. 민준은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그것을 챙기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 몰랐다. 어느 날 보니 그렇게 하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라는 서윤이 하던 말이 자꾸 생각났다.
두 번째 해가 되자 민준은 조금씩 외출을 늘렸다. 우산을 들고 비가 오든 오지 않든 근처 공원을 걸었다. 가끔은 학교 근처 카페에 앉아 논문을 읽었다. 저녁을 같이 하자는 동료의 연락에 나가기도 했다.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조용했다.
그것이 이 년이라는 시간이었다.
봄 학기가 시작되기 이틀 전, 민준은 강의 준비를 하면서 수강생 명단을 훑었다. 현대소설론. 이십사 명. 이름들을 읽었다.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이름은 없었다.
그는 커피를 한 잔 내리고 강의 계획서를 다시 열었다.
4. 그녀
강의 첫날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민준은 현관에서 우산을 집었다. 검은 우산. 살짝 휜 살. 그는 우산을 펴고 학교로 걸었다. 빗속을 걷는 것이 싫지 않았다. 우산 안쪽은 조용했다. 빗소리가 포물선처럼 사방에서 들려왔지만 그 안에 있으면 이상하게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의실 문을 밀고 들어서며 잠깐 멈추었다. 2년 만의 강의실이었다. 형광등 불빛이 눈에 좀 강하게 들어왔다.
출석부를 펼쳤다. 이름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학생이었다.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숨이 막혔다.
순간적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안에 무언가가 흔들렸다. 서윤이었다. 아니, 서윤이 아니었다. 서윤은 죽었다. 이 사람은 대학생이다. 이십 대 초반이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턱선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빈자리를 찾는 그 동작이.
민준은 출석부로 시선을 내렸다. 헛기침을 했다.
학생이 자리에 앉았다. 왼쪽 두 번째 줄이었다.
"출석을 부르겠습니다."
목소리가 처음에 잠깐 흔들렸다. 이름들을 읽었다. 이름 앞에 예, 라고 답하는 목소리들이 돌아왔다.
"이하은."
"네."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서윤의 목소리와 달랐다. 그런데 어조가 비슷했다. 말끝을 살짝 당겨 올리는 방식이 같았다. 민준은 다음 이름을 불렀다.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이 나갈 때, 민준은 강의 노트를 정리하는 척하며 앉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발소리가 멈추었다.
"교수님, 죄송한데요."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이하은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서윤과 닮은 점과 닮지 않은 점이 동시에 보였다. 눈매의 선은 닮았다. 그러나 눈 안의 것은 달랐다. 서윤의 눈은 조용했다. 이 학생의 눈은 뭔가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수업에서 이청준 작가 언급하셨잖아요. 추천해주신 작품 외에 다른 것도 읽어보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여쭤 봐도 될까요?"
"'당신들의 천국'부터 읽어. 도서관에 있을 거야."
"'당신들의 천국'." 하은이 노트 귀퉁이에 받아 적었다. 메모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돌아서서 나갔다.
민준은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창밖에서 비가 아직 내리고 있었다.
5. 가까워지는 것
하은은 다음 주 강의에서 맨 앞줄에 앉았다.
강의가 끝나고 또 남아서 질문을 했다. 이번 학기 텍스트 중 하나인 최인훈의 소설에 대해서였다. 질문이 단순하지 않았다. 민준은 예상보다 길게 대답했다.
세 번째 주에 하은은 연구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리포트 방향에 대해서 여쭤 봐도 될까요?"
민준은 연구실 문을 열었다. "들어와."
그날 대화는 삼십 분이 넘었다. 리포트 이야기로 시작해서 소설 속 인물의 심리 문제로, 그다음에는 작가의 자전적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하은은 말할 때 손을 가끔 썼다. 무언가를 설명할 때 손가락으로 공중에 선을 긋는 습관이 있었다.
민준이 커피를 한 잔 탔다. 잠깐 망설이다가 하은 쪽으로도 머그컵을 하나 내밀었다.
"괜찮으면."
"감사합니다." 하은이 책에서 눈을 들지 않고 말했다.
연구실 안이 조용했다. 두 사람이 각자 읽는 소리. 커피 향. 서윤이 죽은 이후로 이런 적막이 편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민준은 그것을 의식하자마자 불편해졌다.
그 이후로 하은은 격주 정도 연구실에 왔다. 매번 질문이 있었다. 소설에 관한 것이기도 했고, 하은이 직접 쓰는 글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단편을 쓰고 있었다.
어느 날 민준이 먼저 물었다. "지금 쓰는 거 어디까지 갔어?"
"중간 쯤요. 자꾸 막혀요. 인물이 말을 안 들어서요."
"인물이 말을 안 들으면 보통 그게 맞는 거야. 작가가 원하는 방향이 인물한테 안 맞는 거니까."
하은이 그 말을 받아 적었다. 민준은 그것을 보며 잠깐 멈추었다. 서윤도 중요한 말을 들으면 메모를 했다. 작은 수첩에. 그런데 서윤은 받아 적는 속도가 느렸다. 하은은 빨랐다. 같은 행동인데 달랐다. 민준은 그 차이를 의식했다.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동시에 찾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좋지 않은 신호라는 것도.
6. 비 오는 날의 서점
가을이 왔다.
비가 오는 토요일 오후였다. 하은에게서 문자가 왔다.
- 선생님, 학교 앞 서점에 찾는 책이 있는데요. 혹시 같이 가주실 수 있어요? 아니면 괜찮아요.
민준은 문자를 읽고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다시 집어 들었다.
- 몇 시?
오후 세 시에 학교 정문 앞에서 만났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은은 우산을 쓰고 있었다. 투명한 비닐우산이었다. 민준은 검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깐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서점 쪽으로 걸었다.
골목이 좁아지는 구간에서 두 사람의 우산이 부딪혔다.
"제가 접을게요." 하은이 말했다.
"그냥 이리 와."
민준이 우산을 기울였다. 하은이 그 안으로 들어왔다.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였다. 빗소리가 우산 위에서 났다. 민준은 앞을 보며 걸었다. 하은도 앞을 보며 걸었다.
우산 하나 안에 두 사람이 있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서점에 들어섰다. 오래된 독립서점이었다. 책 냄새와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 보고 싶은 책을 훑다가 한 선반 앞에서 동시에 멈추었다. 같은 책에 손이 갔다.
"먼저 봐." 민준이 손을 뺐다.
하은이 책을 집어 첫 페이지를 폈다. "교수님은 이거 읽으셨어요?"
"두 번."
"두 번이요?" 하은이 고개를 들었다. "어떤 책을 두 번 읽어요?"
"처음에 놓친 게 있을 것 같을 때."
하은이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책으로 눈을 돌렸다. "저는 같은 책 두 번 읽는 것 못 해요. 이미 어떻게 되는지 아는데 또 읽으면 뭔가 속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두 번 읽는 거야. 두 번째에는 속지 않고 읽을 수 있거든."
하은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책을 골랐다.
서점에서 나오자 비가 더 세졌다. 민준이 우산을 폈다. 하은이 비닐우산을 접으려 했다.
"그냥 같이 써."
하은이 멈추었다. 그리고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아까보다 가까운 거리였다. 민준은 우산 손잡이를 하은 쪽으로 기울였다. 빗소리. 젖은 아스팔트 냄새. 두 사람의 발걸음.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창가였다. 빗속의 길거리가 보였다.
"교수님은 왜 소설을 공부해요?" 하은이 물었다.
"다른 사람의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으니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잖아."
하은이 레몬차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저는요." 잠깐 멈추었다. "저는 반대예요. 글을 쓰는 게 제 내부에서 나가는 유일한 방법이라서요."
나가는 유일한 방법.
이곳에서 꺼내줘.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런데 민준의 내부에서 두 문장이 잠깐 겹쳤다. 그는 커피잔을 들었다. 창밖을 보았다. 빗속에서 우산들이 지나갔다. 검은 것, 투명한 것, 꽃무늬 있는 것.
"좋은 이유야." 그가 말했다.
하은이 작게 웃었다. 웃을 때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것은 서윤과 달랐다.
두 사람은 카페에서 두 시간 가까이 있었다. 바깥에서는 비가 계속 내렸다.
7. 연인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를 민준은 나중에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서점에서의 오후가 있었다. 그 뒤로 몇 번의 저녁이 있었다. 하은이 민준의 연구실에서 원고를 쓰다가 밤이 늦어 자리를 정리할 때, 민준이 "비 오는데 바래다줄게" 하고 코트를 집었다. 하은이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우산 하나 아래 나란히 걸었다. 교문까지. 교문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정류장에서 버스가 올 때까지.
버스가 왔다. 하은이 올라서려다가 돌아보았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
버스 문이 닫혔다. 민준은 버스가 출발하는 것을 보았다. 빗속에서 혼자 우산을 들고 서서.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알았다. 자신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다음 번 비가 오기를. 아니, 그냥 다음 번을.
손을 처음 잡은 것은 하은 쪽에서였다. 십일월의 저녁, 연구실에서 나란히 앉아 같은 소설의 다른 부분을 읽다가 였다. 하은의 손이 책상 위에서 민준의 손 위에 얹혔다. 민준은 굳었다. 손을 빼지 않았다.
"저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아요." 하은이 말했다. 책을 보면서.
"알면서 왜."
"모르면서 하는 것보다 낫잖아요."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을 빼지 않았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하은은 주말이면 민준의 집에 왔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그런데 몇 번이 지나자 어색하지 않게 됐다. 그것이 오히려 민준에게는 더 이상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집을 알던 사람처럼 하은은 부엌에 들어와 냉장고를 열었고, 소파 위에 다리를 올리고 앉았고, 민준의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가 다시 꽂았다.
어느 날 하은이 현관 우산꽂이를 보며 말했다.
"우산이 하나밖에 없네요."
"응."
"저도 하나 여기 두면 안 돼요?"
민준은 잠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둬."
다음 주에 하은이 우산을 하나 가져왔다. 투명한 비닐우산이었다. 그것이 민준의 검은 우산 옆에 놓였다.
민준은 그것을 오랫동안 보았다.
어느 밤, 두 사람은 하나가 됐다.
민준의 침실. 어둠 속에서. 나중에 하은이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상해요. 이게 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여기 있는데 여기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민준은 그 말에 몸이 굳었다.
이곳에서 제발 꺼내줘.
달랐다. 하은의 말은 그 말과 달랐다. 하은은 지금 이 행복이 꿈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민준의 내부에서 두 말이 겹쳤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어둠 속에서.
그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서윤에 대한 것인지, 하은에 대한 것인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참았다.
하은은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8. 도덕이라는 것
다음 날 아침 민준은 혼자 깼다.
하은은 옆에서 자고 있었다. 민준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내렸다.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하은은 자신의 학생이다. 교수와 학생 사이의 문제는 윤리 규정의 문제이기 이전에 무게의 문제였다. 민준은 직위가 있었고 나이가 있었고 평가권이 있었다. 그 무게들이 두 사람의 사이를 처음부터 기울게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자신이 하은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은 안에서 서윤을 찾는 것인지.
그 경계를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닮은 외모로 처음 끌렸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다음에 알게 된 하은이라는 사람의 것들은 서윤과 달랐다. 그것이 하은이었다. 그런데 처음의 끌림에서 그 이후가 자라난 것인지, 처음의 끌림이 끝까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하은이 거실로 나왔다. 민준의 낡은 맨투맨을 입고 있었다. 부엌으로 가더니 냉장고를 열었다. "뭐 먹을 것 좀 있어요?" 자연스럽게.
그 자연스러움이 민준을 아프게 했다.
"하은아."
하은이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이미 굳어 있었다.
"잠깐 앉아."
하은이 식탁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았다.
"우리, 여기서 끝내는 게 맞을 것 같아."
하은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에 물었다. "왜요."
"이유가 여러 가지야. 네가 내 학생이라는 것. 나이 차이. 그리고 내가 올바른 이유로 너를 좋아하는 건지 확신을 못 하겠어."
침묵이 흘렀다. 창밖에서 새 소리가 들렸다. 이른 아침의 새 소리.
하은의 눈이 붉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들고 나왔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우산꽂이에서 비닐우산을 집었다.
문을 열었다. 잠깐 멈추었다.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저는요, 교수님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제 이유가 있었어요. 근데 교수님은 한 번도 안 물어봤잖아요."
그리고 문이 닫혔다.
민준은 소파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하은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9. 낙하하는 것들
삼 분 뒤에 그는 일어났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아직 들리는 것 같았다. 민준은 재킷을 집어 들고 현관을 나왔다. 우산을 집었다.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일층 현관문을 밀었다.
밖에 나오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는 빗줄기였다. 민준은 우산을 펴지 않았다. 그냥 뛰었다.
하은이가 보였다. 골목을 걷고 있었다. 빠른 걸음이었다. 한 손에 투명 우산을 접은 채로 들고 있었다. 펴지 않고 있었다.
"하은아."
그녀가 멈추지 않았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려 했다. 거기서부터는 큰 도로였다.
"하은아!"
그녀가 돌아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차 소리.
급브레이크.
충격음.
나중에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칠 초였다고 했다. 하은이 뒤를 돌아보고 다시 앞을 보기까지 칠 초. 그 칠 초 동안 신호가 바뀌었고 좌회전 차량이 진입했다.
민준은 뛰었다.
골목 입구에 닿았을 때 그는 보았다.
멈춘 차. 투명한 우산. 아스팔트 위에 흩어진 머리카락.
세상이 한 박자 늦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주위 사람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전화를 꺼냈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민준에게는 그 모든 것이 먹먹하게 들렸다.
그는 걸었다. 천천히.
하은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감고 있었다. 이마 위에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있었다. 아스팔트 위에 투명한 우산이 펼쳐진 채 쓰러져 있었다. 충격에 저절로 펴진 것이었다.
민준은 자신의 손에 아직 검은 우산이 들려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무릎이 아스팔트에 닿아 있었다. 차가웠다. 빗방울이 우산 없는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는 우산을 내려놓았다. 그냥 내려놓았다. 그리고 울었다. 소리도 없이.
서윤이 떠나던 날 울지 못했던 것이 지금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서 무언가가 끝나는 것인지. 두 가지가 구분되지 않았다.
그때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아주 가늘었다. 규칙적인 진동음이었다. 민준은 처음에 앰뷸런스 사이렌이 그렇게 들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달랐다. 더 가까웠다. 그리고 익숙했다.
알람 소리였다.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주위 사람들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달려오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고개를 젖혔다.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민준도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그 구름 사이에서 무언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 그다음에는 셋. 다섯. 열. 열다섯. 서른 셋. 오십…….
사람의 형상이었다. 기울지 않고 거꾸러지지 않고 똑바로 서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각자 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 검은 우산이었다. 살이 한 군데 살짝 휜. 정장 차림이었다.
민준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깨달았다.
자신이었다.
정장은 그가 강의 날 입는 것이었다. 우산은 지금 아스팔트 위에 내려놓은 그것이었다. 얼굴은 그의 것이었다. 마흔다섯의, 눈 아래 그림자가 짙은 그의 얼굴. 그러나 그 얼굴들은 모두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
그들은 내려오면서 아스팔트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민준을 바라보았다.
판단하는 눈이 아니었다. 동정하는 눈도 아니었다. 그냥 바라보는 눈이었다. 마치 이 자리에 있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알람 소리가 더 커졌다.
그들이 가까이 왔다. 민준은 일어서려 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짚고 일어서려다가 손바닥이 아스팔트에 닿는 것을 느꼈다. 차갑고 거칠었다. 그 감촉이 이상하게 선명했다.
알람 소리가 절정에 달했다.
민준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 당장 누군가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주었으면 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