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수는 이십삼 년 동안 전화를 먼저 끊은 적이 없었다. 각하가 먼저 끊었다. 각하의 부관이 먼저 끊었다. 각하의 부관의 비서가 먼저 끊었다. 강태수는 항상 나중에 끊었다. 상대가 끊고 나서 뚜— 소리가 나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강태수가 스스로 정한 규칙이었다. 전화를 나중에 끊는 사람이 이 관계에서 무게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강태수는 알고 있었다. 무게를 가진 사람은 기다린다.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기다릴 수 없는 사람보다 위에 있다. 강태수는 이십삼 년 동안 그런 식으로 위에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새벽 두 시, 전화가 왔다. 부하의 목소리였다. 각하가 돌아가셨습니다. 강태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가 끊었다. 뚜— 소리가 났다. 강태수는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뚜— 소리가 계속 났다. 그는 그 소리를 들었다. 오래 들었다. 창문 너머로 서울의 불빛이 보였다.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세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강태수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먼저 끊어야 하는 전화들이 올 것이다. 그 생각이 들었을 때 강태수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십삼 년 동안 쌓아올린 것들의 무게를 느꼈다. 무거웠다. 무겁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사라진 것은 무겁지 않았다.
* * *
관저를 나온 것은 열여드레 뒤였다.
서랍을 비웠다. 문서를 소각했다. 악수를 스물여섯 번 나눴다. 강태수는 악수를 나누면서 상대의 손에서 무게를 쟀다. 힘이 없는 악수는 이미 다른 곳을 향해 기울어진 사람의 악수였다. 스물여섯 번 중 스물세 번이 그랬다. 강태수는 그 스물세 명의 얼굴을 기억했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것이었다. 강태수는 아직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에게 언젠가가 있다고.
짐은 가방 두 개였다. 강태수는 그것을 적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머지는 나라 것이었으니까. 관용차, 관저, 수행원. 그것들은 강태수가 빌려 쓴 것이지 소유한 것이 아니었다. 강태수가 가진 것은 가방 두 개와 이십삼 년이었다. 이십삼 년은 가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더 무거웠다.
고향으로 내려갔다. 경북의 어느 군 읍내였다. 버스를 탔다. 강태수가 버스를 탄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버스는 오래되었다. 좌석이 좁았다. 강태수는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고속도로 양쪽으로 논이 있었다. 추수가 끝난 논이었다. 강태수는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잠깐 내려와 있는 것이다. 새 정권이 자리를 잡고 나면 다시 올라갈 자리가 생길 것이다. 강태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십삼 년을 쌓은 사람을 세상이 그냥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 * *
읍내에 아버지가 살던 집이 있었다. 이층집이었다. 낡았다. 마당에 감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강태수는 이 집을 이십삼 년 동안 팔지 않았다. 퇴로를 열어두는 것. 그것이 강태수가 배운 첫 번째 원칙이었다. 이 집은 퇴로였다. 퇴로는 오래 써야 비로소 퇴로다운 것이 된다. 강태수는 이 집이 퇴로다운 것이 됐다고 생각했다.
동네 사람들이 찾아왔다. 강태수는 마루에 앉아서 그들을 받았다. 그들의 얼굴에서 강태수는 오래된 것을 보았다. 권력 앞에서 사람이 짓는 얼굴. 서울에서 이십삼 년 동안 보아온 얼굴과 같은 종류의 얼굴이었다. 강태수는 그것을 보면서 자신이 아직 그 얼굴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려왔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힘이란 자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강태수는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아침마다 마당을 쓸었다. 처음에는 빗자루 잡는 법을 몰랐다. 손바닥에 물집이 생겼다. 강태수는 그것을 보면서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쓸었다. 강태수는 여전히 스물세 명의 얼굴을 기억했다. 여전히 어디에 어떤 문서가 있는지 알았다. 여전히 누가 누구와 무슨 관계인지 알았다. 물집은 그것을 바꾸지 못했다.
감나무는 아무도 돌보지 않았는데 감이 열렸다. 익을수록 주황빛이 됐다. 강태수는 감나무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저것도 제 할 일을 안다. 나도 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 * *
이재문이 온 것은 두 달이 지난 가을 오후였다. 강태수는 마루에서 감나무를 보고 있었다. 대문에서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서 있었다. 강태수는 그 얼굴을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주름이 생기고 머리가 세어 있었지만 그 아래에 어릴 때 얼굴이 있었다. 이재문이었다.
이재문은 강태수보다 네 살 아래였다. 키가 작고 말이 없었다. 물을 무서워했다. 강태수가 헤엄을 가르쳤다. 그런 아이였다. 지금 앞에 서 있는 남자가 그 아이였다. 강태수는 그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어떤 아이였고, 그 아이가 어른 안에 남아 있다. 이재문이 그 증거였다.
"재문이냐." 강태수가 말했다. 이재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수는 그를 마루로 불렀다. 이재문이 신발을 벗고 올라와 마루 끝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강태수는 그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찾아온 사람이 먼저 좁혀야 한다. 이십삼 년 동안 그렇게 했다.
"어떻게 알고 왔어?" 강태수가 물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재문이 말했다. 강태수는 그 말을 들었다. 알고 있었다. 강태수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강태수는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있었다. 이십삼 년이 그런 것들을 가르쳤다.
* * *
저녁을 같이 먹었다. 강태수가 된장찌개를 끓였다. 이재문이 두 그릇을 먹었다. 어릴 때와 같았다. 강태수는 한 그릇을 다 먹지 못했다. 요즘 입맛이 없었다. 그것뿐이었다. 입맛이 없다는 것이 몸의 상태였지 마음의 상태는 아니었다.
"형은 사람을 많이 다치게 했잖아요." 이재문이 말했다.
밥 먹다가 하는 말치고는 무거운 말이었다. 강태수는 국물을 한 숟갈 떴다.
"더 많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생각이 아니야. 사실이야."
이재문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강태수를 보았다. 강태수도 이재문을 보았다. 오래된 눈이었다. 이재문의 눈이 어릴 때와 달라져 있었다. 무언가를 많이 본 눈이었다. 강태수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자신도 그런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밤에 이재문이 가방에서 소주 두 병을 꺼냈다. 준비해온 것이었다. 강태수는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방문이 즉흥이 아니라는 것. 이재문은 어릴 때도 즉흥적인 아이가 아니었다. 개울에서 헤엄을 배울 때도 물가에 서서 오래 보다가 들어갔다. 생각하고 움직이는 아이,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 소주 두 병을 들고 왔다.
강태수가 개울 얘기를 꺼냈다. 이재문이 물을 무서워했다는 것. 강태수가 등을 받치고 힘을 빼라고 했다는 것. 어느 날 손을 놓았다는 것. 이재문이 혼자 헤엄쳤다는 것.
"그때 형이 손을 놓은 거 알았어요."
"알면서 헤엄쳤잖아."
"화가 났거든요. 형이 날 버릴 것 같아서."
강태수는 잔을 들었다. 마셨다. 내려놓았다. 버린다는 것. 강태수는 이십삼 년 동안 무언가를 버린 적이 없었다. 쓸모없어진 것들을 제자리에 돌려보냈을 뿐이었다. 그것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강태수는 생각하지 않았다.
"형, 저 형을 데리러 왔어요."
강태수는 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국정원이야?"
"네."
"언제부터."
"오래됐어요."
강태수는 마당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감이 검붉게 보였다. 강태수는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올 것이 왔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다른 국면이다. 강태수는 이십삼 년 동안 국면이 바뀔 때마다 살아남았다. 이번에도 방법이 있을 것이었다. 강태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언제 데려가?"
"내일 아침이요."
"그럼 오늘 밤은 여기서 자."
이재문이 잠시 강태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예, 알겠어요."
두 사람은 더 마셨다. 강태수는 마시면서 생각했다. 내가 가진 것들을 그들이 원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것들. 내가 묻어둔 것들. 그것을 원하는 한 그들은 나를 함부로 하지 못한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뱉기 전까지 가치가 있다. 강태수는 그 원리로 사람을 다루었다. 이제 그 원리가 자신을 지킬 것이었다. 강태수는 그렇게 믿었다.
* * *
아침에 차 두 대가 왔다. 강태수는 그전에 일어나 마당을 쓸었다. 셔츠를 다렸다. 구두를 닦았다. 거울을 보았다. 셔츠를 다려 입고 구두를 신은 강태수가 거울 속에 있었다. 강태수는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아직 이 얼굴이다. 내려왔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이재문과 같이 된장찌개를 먹었다. 오늘은 그릇을 비웠다. 설거지를 했다. 가방을 들었다. 대문을 나섰다.
골목에 동네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강태수는 그들을 보았다. 또 그 얼굴들이었다. 권력 앞에서 짓는 표정들. 강태수는 그 얼굴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것만 해결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이재문이 동네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서울로 올라가십니다. 건강하게 올라가십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강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선장군처럼. 차에 탔다. 문이 닫혔다. 강태수는 창밖의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맞다. 나는 올라가는 것이다. 방식이 다를 뿐이다.
* * *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나서 차가 멈추지 않은 채로 첫 번째 질문이 왔다. 앞좌석의 남자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서류 말입니다.”
강태수는 그 말을 들었다. “어떤 서류?”
“아시잖습니까.”
강태수는 말하지 않았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협조하시면 편합니다.”
강태수는 창밖을 보았다. 고속도로 양쪽으로 논이 있었다. 추수가 끝난 논이었다. 볏단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강태수는 생각했다. 내가 가진 것을 쉽게 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저들도 알고 있다. 알기 때문에 묻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묻지 않는다.
첫 번째 주먹은 그다음에 왔다. 턱 아래였다. 이가 부딪혔다. 소리가 머릿속에서 났다. 강태수는 팔로 막으려 했다. 공간이 없었다. 두 번째 주먹이 옆구리를 쳤다. 세 번째가 왔다. 강태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심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도 그렇게 했다. 차 안에서 하는 심문. 피할 공간이 없는 곳에서. 강태수는 그 방식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효과적이라는 것은 상대를 무너뜨린다는 것이었다. 강태수는 무너지지 않으려 했다. 이것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이었다. 버티는 한 아직 협상이 남아 있다.
갈비뼈 아래를 맞고 나서 신음이 나왔다. 강태수는 그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강태수는 생각했다. 소리가 나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한 말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는 한 가치가 있다.
이재문은 앞좌석에 앉아 앞을 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주먹이 다시 왔다. 어디서 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쪽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남자가 다시 물었다.
“서류, 어디 있습니까?”
강태수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한 아직 기회가 있다. 강태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창밖으로 산이 보였다. 낙엽이 진 나무들이었다. 강태수는 그것들을 보았다. 나무들이 흘러갔다.
주먹이 멎었다. 강태수는 숨을 골랐다.
“생각해보십시오.” 남자가 말했다.
강태수는 생각했다. 나는 이십삼 년 동안 생각해온 사람이다. 당신들이 나에게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 * *
차가 서울 외곽의 어느 건물로 들어갔다. 지하였다. 창문이 없었다. 방이 있었다. 강태수는 그 방에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강태수는 방을 둘러보았다. 의자가 하나 있었다. 탁자가 하나 있었다. 강태수는 의자에 앉았다. 자신이 이런 방을 몇 개나 만들었는지 생각했다. 숫자가 나오지 않았다. 세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방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았다. 기다리게 한다. 기다리는 동안 사람은 약해진다. 강태수는 생각했다. 나는 이십삼 년 동안 기다려온 사람이다. 전화를 나중에 끊으면서 기다려온 사람이다. 기다리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자신 있었다.
시간이 지났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시계가 없었다. 창문이 없었다.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들어왔다. 물을 가져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갔다. 강태수는 물을 마셨다. 또 기다렸다.
심문은 다음 날부터 시작됐다. 남자들이 들어왔다. 앉았다. 서류에 대해 물었다. 이름에 대해 물었다. 강태수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물었다. 강태수는 말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나갔다가 들어왔다. 다시 물었다. 강태수는 말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나갔다.
강태수는 혼자 방에 앉아 생각했다. 내가 말하지 않는 한 저들은 나를 필요로 한다. 필요로 하는 한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는 한 국면은 바뀔 수 있다. 강태수는 일하면서 상황이 바뀌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단단해 보이는 것이 하룻밤 사이에 바뀌는 것을 보았다. 총성 하나로 이십삼 년이 바뀌는 것을 보았다. 강태수는 기다렸다. 자신을 기다리게 만든 방식으로, 기다렸다.
* * *
사흘째 되는 날 이재문이 들어왔다.
강태수는 이재문을 보았다. 이재문이 의자를 끌어다 강태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은 마주 보았다. 강태수의 얼굴이 부어 있었다. 한쪽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이재문은 그 얼굴을 보았다.
"강태수 씨, 불편하진 않으세요." 이재문이 말했다. 존댓말이었다. 강태수는 그것을 들었다. 고향에선 형이라고 불렀다. 여기서는 존댓말이었다. 강태수는 생각했다. 이재문이 지금 어떤 사람으로 여기 앉아 있는지를 그 한 마디가 말하고 있었다.
"불편하지." 강태수가 말했다. "그래서 뭐."
이재문이 탁자 위에 서류를 올려놓았다.
"협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강태수는 서류를 보았다. 보지 않았다. 이재문을 보았다.
"재문아." 강태수가 말했다. "나는 네가 헤엄치길 잘했다고 생각해. 진짜로."
이재문이 강태수를 보았다. 표정이 없었다.
"서류입니다. 이걸로 마지막이었으면 합니다."
강태수는 잠시 이재문을 바라보았다. 이재문의 눈에 무언가가 있었다. 강태수는 그것을 읽으려 했다. 읽히지 않았다. 이십삼 년 동안 사람의 눈을 읽어온 강태수에게 읽히지 않는 눈이었다. 강태수는 생각했다. 이 아이가 언제 이렇게 됐는가. 개울에서 화가 나서 헤엄치던 아이가 언제 이런 눈이 되었는가.
강태수는 서류를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나는 아직 협상할 것이 있어."
이재문이 서류를 거두었다. 일어났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서 멈추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강태수 씨,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강태수는 방에 혼자 남았다. 나는 아직 협상할 것이 있다. 내가 아는 것들이 있다. 내가 묻어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원하는 한 저들은 나를 필요로 할 거다. 강태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생각이 이 방에서 강태수의 전부였다.
* * *
이재문은 다음 날도 왔다. 그다음 날도 왔다. 매번 서류를 가지고 왔다. 매번 강태수는 말하지 않았다. 이재문은 돌아갔다. 강태수는 방에 남았다.
닷새째 되는 날 이재문이 서류 없이 들어왔다.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태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있었다. 창문이 없는 방이었다. 탁자가 있었다. 두 사람이 있었다.
"형." 이재문이 말했다. 존댓말이 아니었다. 강태수는 그것을 들었다.
"왜."
"다 됐어요."
강태수는 그 말을 들었다. 다 됐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협상이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협상 자체가 없었다는 것. 저들이 원한 것은 서류가 아니었다는 것. 서류는 명분이었다는 것. 강태수는 그것을 알면서도 믿지 않았다. 믿지 않으려 했다. 이십삼 년을 쌓은 사람을 세상이 그냥 버리지는 않는다. 강태수는 아직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아직 협상할 것이 있어." 강태수가 말했다.
이재문이 강태수를 보았다. 오래 보았다. 무언가 말할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았다. 일어났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서 멈추었다. 이번에는 돌아보았다.
"형은 형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아요?"
강태수는 그 말을 들었다. 이재문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알지."
이재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문이 닫혔다.
강태수는 방에 혼자 남았다. 이재문의 마지막 말이 방 안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요. 강태수는 그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말이 커졌다. 강태수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려 했다.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요.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서 어쩌겠냐는 것인지. 대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것인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이 이 방 안에서 무슨 의미냐는 것인지. 강태수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강태수는 자신이 이십삼 년 동안 가진 것들을 생각했다. 힘. 자리. 정보. 사람들의 얼굴. 전화를 나중에 끊는 것. 그것들이 지금 이 방 안에 있었다. 이 방 안에 있었지만 이 방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태수는 처음으로 그것을 알았다.
* * *
사살은 일주일 뒤였다.
이른 아침이었다. 남자들이 들어왔다. 강태수는 일어섰다. 셔츠가 구겨져 있었다. 구두가 더러워져 있었다. 강태수는 그것을 보았다.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남자들을 따라 걸었다. 복도를 걸었다. 계단을 올랐다. 지하에서 나왔다. 빛이 있었다. 강태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오래 빛을 보지 못한 눈이었다.
밖이었다. 이른 아침이었다. 하늘이 회색이었다. 바람이 있었다. 강태수는 바람을 맞았다. 차가웠다. 강태수는 그것을 느꼈다. 바람이 차갑다는 것. 그것이 지금 강태수가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이재문이 거기 있었다. 멀리서 보았다. 강태수도 이재문을 보았다. 두 사람은 멀리서 마주 보았다. 가까이 오지 않았다. 강태수는 이재문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 아이가 개울에서 화가 나서 헤엄쳤다. 형이 버릴까봐 헤엄쳤다. 그리고 헤엄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 여기 서 있다. 강태수는 그것이 잘 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판단할 위치가 아니었다.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강태수는 이 일주일 동안 배웠다.
남자들이 강태수를 어떤 자리에 세웠다. 강태수는 섰다.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낮게 있었다. 어딘가에서 새가 울었다. 강태수는 그것을 들었다. 눈을 감지 않았다. 강태수는 눈을 감는 것이 자신의 습관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십삼 년 동안 눈을 감은 적이 없었다. 뚜— 소리가 날 때도. 악수가 힘이 없을 때도. 마지막까지 눈을 뜨고 있는 것. 그것이 강태수가 이십삼 년 동안 한 일이었다.
총성은 한 번이었다.
새 소리가 그쳤다. 바람이 불었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었다. 이재문은 강태수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러고 나서 돌아섰다. 강태수가 쓰러진 자리에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은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