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우유와 현수
모든 순간들이 감사했다.
지후와 결혼을 하고 슬픈 일도 아픈 일도 많았지만
우리만의 가정을 꾸미며 살아가는 시간들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평화로움이 너무나 좋았다.
사람들은 모른다. 당연한 것들의 당연하지 않음을
당연해서 인식하지 못하는 것들은 당연하지 않을 때 당황하게 만든다.
그리고 당연함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 보통, 일상, 평범함 ’
나는 이 말들의 소중함을 너무나 잘 안다.
갖지 못하고, 놓쳐버린 삶을 한 동안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혼자 눈 떠 지후가 자고 있는 동안
나는 커피 한잔을 마시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혼자 깨어있는 것이 좋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 고요함이 너무나 좋았다.
자고 있는 그가 내 옆에 있어주는 누군가가 신기했다.
고요함이 지루함으로 바뀔 때쯤 지후가 깨고
식사를 준비하고, 같이 밥을 먹고, 뒷정리를 하고, 출근을 하고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이
나와 그의 일상을 갖는 것이 너무나 소중했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가
늦는다고 미안하다고 전화하는 그가
먹고 싶은 것을 사 가겠으니 말하라는 그가
늦은 저녁 같이 맥주를 마시고
같이 웃으며 장난을 치고, 서로에게 잔소리를 하고, 누군가의 흉을 같이 보며 맞장구도 쳐주는
나만의 그가 있어 나는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그의 존재가 고마웠다.
지후는 나의 발 뒤꿈치의 굳은살을 만지며
“ 우리 아기도 너처럼 궂은살이 생길까? 여자애면 진짜 안 되는데 ”
나의 발을 아무렇지 않게 만지고 비벼대는 그가 좋았다.
신혼 초 그가 출근한 어느 주말
화장실 변기가 막혀 버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30여 분간 사투를 벌여도 일이 자꾸만 커져갔다. out of control이다.
누군가를 불러 처리를 해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싫었다.
낯선 사람에게 내 분비물을 보인다고? 상상도 할 수 없다.
백 번쯤은 망설이다가 그에게 전화를 했다. 거의 울 지경이었다.
그는 가게에 있다가 얼른 뛰어왔다.
문 뒤에서 숨어 그의 등만 봤다. 참사 중의 참사였다.
저리 가라며 막힌 변기를 시원하게, 나의 마음도 완벽히 뚫어주었다. 그는 완벽했다.
“ 더럽다. 냄새난다. 어쩌다 그랬냐? 도대체 무얼 먹었냐? ” 등의
나의 수치심을 일으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 뚫고 나서는 땀을 닦으며
“ 다 됐다. 나 갈게. ” 하곤 급히 웃으며 나갔다.
그는 알고 있다. 나의 비위가 약한 것도, 내가 누군가에게 절대 전화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일 년여가 지나고
갑자기 퇴근길에 그가 바나나, 사과, 귤 등을 사 오기 시작했다.
귤껍질을 까주며 내 입에 넣어주었다.
다시는 너로 인해 막힌 변기를 뚫고 싶지 않다고
아침, 저녁으로 먹으면 변비에 좋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일 년도 지났는데. 그래도 창피했다.
나중에 이런 일도 할머니 할아버지 되면 웃으며 얘기할 거라고
너 때문에 재미난 추억거리가 더 많이 생긴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내 마음 한편을 천천히 조용히 채워주고 있었다.
우리 둘의 일상은 나에게 10년 만에 준 온전한 행복이었다.
“ 세희야, 대학 선배가 회사를 차렸는데 너 혹시 회사를 옮길 생각 있니?
연봉은 여기랑 맞춰주라고 내가 말해놓을 게. 지금 너네 집에서도 가깝고
너 마케팅 쪽은 잘하는데 기획 쪽이 부족하잖아.
마케팅이랑 기획 쪽 일을 같이 맡아 줄 사원을 구하는데 아무래도 네가 거기 가서 하면 잘할 것 같아.
기획은 배워놓으면 너한테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나중에 니 회사를 차려도 되고
이번에 가서 배워봐. 우리 회사는 부서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잖아.
거기 가서 2,3년 배우고 나서 다시 옮겨도 되고 그 선배 기획 쪽은 거의 천재였어.
내가 어리고 딸린 식구만 없어도 가겠다.
지금 애도 없고, 돈도 급한 거 아니니까 배운다 생각하고 옮겨.
벤처라 작지만 자금력도 괜찮고 그 선배한테 배울 게 많을 거야. 좋은 기회야. “
민 과장님이 가라고 하면 가야 한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언젠가 내 회사를 차려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있어왔다.
그녀는 항상 “ 너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아. 해봐.” 말하곤 했다.
‘ 옮긴다. 옮긴다. 옮긴단 말이지.
기획 일을 배우는 것은 좋은데 지금 여기 사람들 모두 다 좋은 데 거기도 괜찮은 사람들일까? ‘
회사 선배, 동기, 후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특히나 현수가 마음에 걸렸다. 미진이는 알아서 잘할 거고.....
현수가 문제다. 현수가 제일 걱정이다.
현수는 일은 좀 느리지만 착하고 구김 없는 철없는 막내 동생 같았다.
현수는 빠릿빠릿함은 없었지만 성실함이 장착되어 있어서 포기가 없었다.
한 번은 가르치다 너무 화가 나서
“ 와! 진짜 말 못 알아듣네, 너 저리 가. ” 짜증을 낸 적이 있었다.
그래도 현수는 끈질기게 와서 “ 선배, 선배 ” 하며 완벽히 파악할 때까지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
뇌가 없는 사람처럼,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처럼 나에게 왔다.
내가 좋아하는 왕 꿈틀이 10 봉지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사람이 현수이기도 했다.
주위에서 유부녀가 신입이랑 썸 탄다고 불륜이네 어쩌네 웃고 난리가 났다.
“ 내가 아무리 고작 왕 꿈틀이 열 봉지로 얘랑 불륜을 저지르겠어요? ”
하며 웃어버렸다. 현수도 그런 나를 보고 웃었다.
그때 나는 현수와 내가 강한 끈으로 묶일 것을 예감했다.
퇴근 후 현수를 잡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언젠가 생수통 옆을 지나가는데 현수가 “누나” 하면서 나한테 바나나 우유를 주는 것이 아닌가?
‘ 얘 돌았나 봐? 회사에서 누나가 웬 말인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쳐다봤는데
씽긋 웃으면서 빨리 마시라고 손으로 마시는 시늉을 했다.
어서 또 내가 바나나 우유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마시는 걸 봤는지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현수는 그런 아이였다.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었다.
“ 세희야, 너 현수 보니까 떠오르는 사람 없냐? 내 보기엔 현수가 딱 너야.
너 신입이었을 때 얼마나 맹추였니? 내가 너 가르칠 때 탈모 왔다.
아주 검정 매직을 칠해야 할 정도로 왔었어.
우리 남편이 나보고 직장 내 집단 따돌림당하냐고 사람들 착해 보이던 데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으면 이러냐고
돈이 없어서 그만두라는 소리는 못하겠고 부서 이동 신청하라고
내가 그때 머리를 못 풀고 다녔다. 땜빵 보일까 봐. 맨날 묶고 다녔지.
졸졸졸 내 뒤따라 다니면서 ‘ 언니, 언니 ’ 해가며 구박을 해도 얼마나 들러붙던지.
보통 여자들은 구박하거나 무안 주면 자존심 상해서 화장실 가서 울거나 더 이상은 귀찮게 안 하는데
너는 웃으면서 계속 오더라. 뇌가 싹 다 포맷된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샌드위치 들고 마늘빵 들고 오는 데.
야~~~ 난 너 무섭더라. 무서워. 독하다 독해.
내가 그때 다짐했다. 얘는 지 다 배울 때까지, 잘할 때까지 거머리처럼 나한테 들러붙겠구나.
차라리 빨리 가르치자. 내가 그래서 너 퇴근 후에도 그렇게 잡고 가르친 거야.
현수가 딱 너야. 너. 내 생각해서 현수 구박하지 마라. “
“ 그렇지, 유대리가 바른말하네, 세희 씨가 그랬지. 똑같네. ”
“ 내가? 진짜 내가 그랬다고요? ”
“ 응, 근데 현수가 너 업그레이드야. ”
“ 둘한번 붙여 볼만해. 결승전이지. ”
“ 맞아, 붙여 놓으면 재미날 거야. 우승자는 임원까지 갈 거야. ”
갑자기 현수가 끼어든다.
“ 맞아요. 유 대리님이 저한테 알려주셨어요.
선배가 짜증 내도 계속 가서 배우라고 ‘누나, 누나’ 부르면서 가면 좋아할 거라고 “
유 대리님한테 한 대 맞는다.
“ 아이고 현수야, 우리 눈치 없는 현수 ”
“ 뭐? 네가 그래서 자꾸 ‘누나, 누나’ 했구나? 못 살아, 내가 ”
얼마나 웃음이 나왔는지 모른다.
다들 자신들의 신입사원 시절이 떠올라 한참을 웃었다.
‘ 맞아, 그래 내가 그랬었지. ’
나는 중,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과외나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다닐 수는 있었지만 학원비가 너무 아까웠다.
부모님이 힘들게 일하시며 버는 돈을 학원비로 쓰는 게 너무나 미안했다.
EBS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고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나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으면
복도에서 교과목 선생님에게 질문하고 교무실로 찾아가곤 했다.
선생님 전부는 모르더라도 학년 교과목 선생님들은 다 내 이름을 아셨다.
한 번은 교무실에 어떤 선생님이
“ 쟤 누구야? 쟤 왜 자꾸 교무실에 와? ” 내 이름을 묻는 소리에 얼굴이 빨개진 적도 있었다.
어느 토요일
혼자 나와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데 수학 선생님이 지나가셨고
유리창으로 그분의 머리가 보였다.
젊은 남자 선생님이셨는데 머리가 심한 곱슬머리라 존재감이 강렬했다.
마침 못 푼 문제들을 표시한 수학 문제집이 있어서
“ 선생님 저 이것 좀 가르쳐 주세요. ” 복도에 서서 질문을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 나의 질문이 멎을 것 같지 않자
선생님은 교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아 기초 개념부터 두 시간여를 가르쳐 주신 적도 있었다.
수학을 그렇게 잘하는 학생도 아닌 나를 왜 선생님은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 주셨을까?
왜 그러셨을까? 의아해하면서도 그 날 이후 선생님과 나는 친하게 지냈다.
내가 무슨 얘기만 하면 선생님은 나를 보고 웃으셨다.
시험을 못 봤다고, 성적이 엉망이라고, 속상한 얘기, 짜증 난 얘기를 해도
선생님은 항상 웃으셨다.
졸업 후에도 종종 선생님께 안부 전화를 하곤 했다.
스승의 날이나 때로 너무 힘든 날이면 전화를 했다.
수학 선생님은 어느새 교감 선생님이 되었다.
“ 선생님 보고 싶어요. ” 힘들 때마다 나는 아이처럼 전화하곤 했다.
“ 세희야. 회사 잘 다니고 있어? 잘 다니고 있을 거야, 우리 세희는.
나는 우리 세희 믿어. 그때처럼 모르면 계속 물어보면 되는 거야. 알 때까지 계속 물어봐.
아는 척 하지 말고. 회사도 학교랑 똑같아. 그때처럼 하면 되는 거야.
언제든 와. 선생님이 밥 사주께. “
머리가 하얗고 주름진 나의 수학 선생님이 말하셨다.
삼 년 전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지만 갑자기 선생님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건 그리움이다.
나를 좋아하고 믿어 주셨던 선생님
아직도 나는 힘이 들 때면 여전히 선생님이 보고 싶다.
“ 선생님 보고 싶어요. ” 말하고 싶다.
나는 현수에게 그런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포기하지 않는 현수가 고등학교 시절의 나를 기억나게 해 주었다.
옮긴 회사에서 수학 선생님 같은 선배를 만날 수 있을까?
‘ 옮긴 회사에서 이런 동료들을 만날 수 있을까? ‘
‘ 현수를 미진이가 잘 챙겨주려나? ’ 많은 생각들로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지후에게 그날 밤 애기를 꺼냈다.
“ 너 생각 이미 정한 것 같은데, 가고 싶은 거지? ”
“ 아니야, 아직 결정 안 했어. ”
아직 회사에 얘기도 안 했고, 민 과장님만 알고 있지. “
“ 결정되면 회사에 먼저 얘기하고 인수인계하고 직원 뽑을 때까지 두 세 달은 걸릴 걸.
그 기간까지 새로운 회사가 나를 기다려 줄 지도 물어봐야 하고
조건도 맞아야 하니까 우리 내년에 집 사기로 했잖아.
연봉 협상도 해야 하고, 사장이랑 나랑 잘 맞는 지도 봐야지.
민 과장님이 괜히 그런 얘기는 꺼내지 않는 분인데. 좋은 기회야.
집도 여기서 가깝고 우리 출, 퇴근 시간도 절약돼서 힘들지도 않을 거야.
옮겨서 2년 정도 배우고 나서 이직할 수도 있고
아니면 작게라도 내 거 차려보고 싶기도 해. 한번 그래 보고도 싶어. “
“ 그래, 그럼 한번 해봐. 지금 한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내 보기엔 결정 난 것 같다. ” 그는 내 뜻에 맡겼다.
선배가 알려준 번호로 통화를 하고, 서류를 준비하고, 면접을 봤다.
급여는 전 연봉보다 조금 더 올려주기로 했다.
일은 힘들 거라고 했다.
초기라 자리가 잡힐 때까지 힘들 거라고 대신 기획 쪽 일은 확실히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지금 회사가 인수인계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아마도 민 과장님이 잘 말씀해주신 것 같았다.
회사에 알리기만 하면 되는 데.
마음이 안 좋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 바로 들어간 회사
나의 엉뚱함을 재미있게 봐주고, 구멍이 숭숭한 나를 단단한 매듭처럼 만들어 준 사람들
그 사람들을 두고 떠난 다는 것이 섭섭했다.
임신했던 나를 위해 해준 조용한 배려들
묵묵히 바라봐주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들
요란하지 않고 호들갑스럽지 않은 사람들
처음엔 나와 반대 성향인 사람들과 생활하는 것이 몹시 낯설고 힘들었다.
나도 그렇고 가족, 친구, 지인들
내 주변은 항상 시끄럽고 요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점점 알아갈수록 시간을 지낼수록 알게 되었다.
그들은
칭찬은 모두 알 정도로 표시 나게 했으며
실수나 잘못을 꾸짖을 때는 조용히
충고나 조언은 매우 신중하게 했다.
그것도 한참을 오래 동안 지켜본 뒤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그들에게 익숙해져 편안함과 안락함마저 느끼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곳으로 떠난 다는 것이 두려웠다.
‘ 내가 과연 잘해 낼 수 있을까? ’ 의심과 불안이 스쳐지나간다.
나의 수학 선생님이 떠올랐다.
" 세희야, 나는 너를 믿어. 너는 잘할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