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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 소설가 Sep 04. 2024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

" 진헌아, 너 이진헌 맞지? 나 소라야.  최소라 "

" 아.......... 소라 "


고요하고 낮은 탄성이 진헌의 입에서 나왔다 

진헌의 눈동자는 입바람 앞의 촛불처럼 잘게 흔들렸다


" 어, 그래 나 진헌이야, 소라, 너 소라구나 반갑다 "

" 신기하다 어쩜 투어를 신청한 사람이 너라니 정말 세상 좁다 그렇지? 진헌아 "

" 그러게, 나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

" 이게 얼마만이야?  우리 안 본 지 10년도 넘었지? "

" 어? 13년 만이야.  나 제대하고 난 후 너 영민이 형이랑 유학 갔었잖아 "

" 맞아, 너 내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었지 "

" 그래 "

" 동료들이랑 같이 온 거야? "

" 응, 회사 동료인데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경주에 가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

" 잘 됐다 내가 신경써서 안내해 줘야겠다 "

" 그래 잘 부탁한다 "


35살의 소라는 순식간에 진헌을 20살의 청년으로 만들어버렸다


' 넌 내 이름을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는구나

  나는 네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아직도 어색하고 힘들기만 한데 '


소라는 진헌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라 말하며 진헌을 보고 해맑게 웃었다

35살의 소라는 오롯이 자신의 모든 시간을 통과했다

아직도 과거와 현재에서 헤매고 있는 진헌은 소라가 과거의 소라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진헌은 온몸에 살얼음이 낀 듯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고 어색했다

소라에게 말을 건네거나 소라를 향해 몸을 돌리면 자신의 몸에서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얼음 조각이 연녹색의 풀밭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바사삭 깨지는 얼음 소리

투명한 살얼음이 떨어지면 소라도 얼어버릴 까 진헌은 너무나 두려웠다

자유롭고 거침없는 소라가

지금 진헌의 눈앞에 서 있는 소라를 계속 보고 싶었다 

제 마음껏 소라를 볼 용기가 진헌에게는 아직도 없다

잘못된 수식은 없는지 샅샅이 엑셀을 볼 때처럼 소라를 보고 싶지만 

소라가 다른 일행을 볼 때 진헌은 조금씩 소라를 엿볼 수 있었다

소라의 시선이 다시 진헌에게 돌아오면 진헌은 무심히 고개를 돌렸고

그런 진헌을 보며 소라는 연한 웃음을 지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소라는 여전히 소라 그대로였다

변한 것이 있다면 통통하고 글래머러스했던 소라가 살이 빠지고 성숙한 여인의 아우라를 풍기는 것

톤이 높고 맑았던 소라의 목소리는 반음 정도 다운되어 있었고 

시간을 더한 것만큼 말의 속도가 느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진헌에게 소라는 그저 스무 살의 소라일 뿐이었다


석굴암을 가장 먼저 보고 싶다는 앨리의 요구대로 진헌 소라 앨리 브라이언은 석굴암을 먼저 가기로 했다

주차장으로 갔던 소라는 검정 밴을 몰고 진헌의 일행 앞에 섰다


" 타세요 "

" 이렇게 큰 밴을 운전하세요? "

" 네, 관광객이 가족끼리 오는 경우가 많아서요 

  지금은 승용차를 모는 게 더 힘들어요 "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내내  호기롭던 앨리 브라이언은 현기증으로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뱀이 똬리를 트려고 하는 것처럼 산길은 곡선에 곡선이 이어져

한 참을 올라가도 끝이 나지 않았다


" 산 아래나 길을 바라보지 마세요 그럼 멀미가 더 심해져요 

  창문을 열고 하늘을 멀리 바라보세요  

  너무 어지러우면 눈을 감고 좀 주무세요

  도착하려면 15분은 더 가야 해요 "


소라는 어지럼이 심해져 멀미를 호소하는 앨리가 안쓰러운지 백미러로 그녀를 계속 쳐다봤다

진헌은 조수석 옆에 앉아 소라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신입생 오티 장소인 유명산으로 가던 관광버스 안에서 멀미가 나 하얗게 질려있던 소라

그런 소라가 걱정이 돼 진헌은 얼핏 잠이 들었던 소라를 자신의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소라 옆에 바싹 앉았다

소라가 진헌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을 때 

그녀의 체취가 숨소리와 어우러져 진혼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진헌의 심장박동은 마라톤을 완주한 육상선수처럼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날뛰는 심작 박동과 진동에 겨우 잠든 소라가 잠이 깰까 진헌은 숨을 깊게 마시고 길게 뱉었다

소라가 잠이 깨느니 차라리 자신의 숨이 멎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그런 소라가 멀미를 하는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있으니

진헌은 그런 소라가 기특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석굴암에 도착했지만 앨리와 브라이언은 초주검이 되어 불상기력이 없었다

불상을 보기 위한 줄을 설 힘은 한카락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방문해서 볼 테니 일단 숙소로 데려다 달라고만 했다

소라는 앨리와 브라이언을 숙소에 내려주었다


"진헌아,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너도 오늘 쉴래?  아니면 일정대로 갈까? 

  너 마음대로 해 "

" 그럼 우리 커피나 마시러 가자 "

" 그래, 잘 됐다.  나 어제 잠을 설쳐서 커피 좀 마셔야겠어 

  주차하고 올 테니까 커피 주문해 줘 난 아아야  "


진헌은 커피 두 잔을 들고 카페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 왜 여기 있어? 더운데 들어가자 "

" 아니, 나 밖에 있고 싶어서 "

" 그래? 그럼 여기 앉자 여기도 좋아 "

" 나 제대하고 나서 복학했을 때 넌 이미 졸업을 하고 없더라

  취업을 하고 나서 가끔 네 소식을 듣긴 했어 

  니가 영민 형이랑 결혼했다는 것도 경호를 통해 들었고 "

" 그랬구나 "

" 네가 영민형이랑 이혼했다는 것도 딸아이를 네가 키우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어 "

" 응 "

" 영민형이랑은 자주 보니? "

" 아이 아빠니까, 한 달에 한 번씩은 봐 오빠가 내려오기도 하고 딸을 데리고 서울로 가기도 하고 "

" 넌? "

" 어? 뭐가? "

" 넌, 아니, 아니야 "

" 너 그때처럼 실없는 건 여전하구나. 넌 결혼은 했어? "

" 아니 "

" 왜 아직 결혼 안 했어? 결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을 텐데 "

" 결혼하고 싶은 여자도 있었고, 결혼할 수 있을 것도 같았는데 어쩐지 결혼이 쉽지 않더라 "

" 그래, 맞아.  인연이란 게 억지로 이어지지는 않지 "

" 내가 정말 좋아했던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어

  그 애가 내 첫사랑이었어 "

" 그랬어? "

" 응, 그 애를 보고 첫눈에 반했었거든 근데 용기가 나질 않아서 난 한 번도 고백하지 못했어

  군대에 가고 나서 그 애가 멋진 남자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단 소릴 들었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헤어질 테니 제대해서 그 애한테 고백해야겠다고 다짐했었지

  근데 제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애가 그 남자랑 약혼을 했고 함께 유학을 간단 소리를 들었어 

  그때 난 고백을 하면 안 된다고 했어

  그 애는 그 남자 옆에서 정말 행복해 보였거든

  남자인 내가 봐도 정말 멋진 남자니까 그 애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해 줄거라 생각했어 "


진헌처럼 소라가 얼어붙었다 

소라와 진헌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진헌이었다


" 소라야, 너 시간 되면 우리 술 한잔 할까? "

" 어, 그래 

  잠깐, 엄마한테 우리 딸 봐줄 수 있는지 물어볼게 "


소라는 통화를 마치고 진헌에게 나풀대며 걸어왔다


" 가자, 진헌아, 내가 가는 호프집이 있어 "

" 그래 "


소라와 진헌은 맥주를 마시며 함께 하지 못했던, 궁금했던 서로의 시간들을 알아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롤 

소라와 진헌이 시간 여행을 마쳤을 때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집에 가야 하는데, 대리 부르자 "

" 아냐, 술도 깰 꼄 걸어갈래 "

" 그래, 그럼 데려다줄게 "


소라의 집은 대릉원 가까이 있어 커다란 능을 3개쯤 지나자 집에 도착했다


" 고마워 진헌아 "

" 아냐, 내일 나올 수 있겠어?  지금 자면 일어나기 힘들 텐데 

  그러지 말고 점심 먹고 내일 2시에 나와

  내가 친구들한테는 적당히 둘러댈 테니까 "

" 그래, 고맙다 

  너 좀 바뀐 것 같다.  예전에 거짓말이라면 질색을 하던 샌님이 말이야 "

" 얼른 들어가서 자 "

" 그래, 내일 보자 "


진헌과 일행은 소라가 안내하는 데로 경주 곳곳을 투어 했다

박물관 유적지 유물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는 소라의 말들은 진헌의 고막을 통과하지 못했다

진헌의 귀에서는 소라의 목소리만 숨소리만 웅웅 거리며 진동하고 있었다


경주에서의 마지막 밤

진헌은 소라에게 밤산책을 가자고 했다


" 진헌아, 우리 동궁과 월전에 가자

  야경이 정말 멋진 곳이야

  네가 서울에 돌아가면 경주에서의 모든 것은 다 잊을 수 있어도 오늘 밤은 잊지 못할 거야 "

" 그래, 가자 "


진헌과 소라는 동궁과 월전에 도착해 연못 주위를 천천히 걸어 다녔다

마침 평일 밤이라 관광객은 드물어 소라와 진헌은 그들만의 깜깜한 밤과 물, 누곽, 수면 위의 여러 그림자를

즐길 수 있었다


" 내일이네 "

" 응, 소라야 나 가끔 여기 와도 돼? "

"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오고 싶으면 오는 거지? "

" 그런가? "


진헌과 소라는 멋쩍게 웃었다


" 언제든 네가 오고 싶을 때 와  여기 그대로 있을 테니까 "

" 그래 "


진헌과 소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못에 비친 달과 별만을 바라봤다 

'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얼마나 좋을까? '

진헌은 자신도 모르게 드는 생각에 흠칫 놀라 소라를 쳐다봤다

소라는 진헌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었고 

진헌은 소라의 손을 놓지않고 집에 데려다주었다


" 진헌아, 나 내일도 투어가 있어서 기차역에 나가지 못할 것 같아 "

" 괜찮아, 일하느라 바쁠 텐데 "

" 그래, 잘 가 우리 여기서 헤어지자 "

" 그래 잘 지내 "


진헌은 숙소로 돌아와 밤새 뒤척이며 잠을 자지 못했다

15년 만의 고백은 진헌에게 후련함과 설렘을 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진헌은 소라 앞에서 절대적인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소라가 그런 자신이 부담스러워 친구로 지내는 것을 거절한다면 

다시 소라를 만나지 못할 거란 생각만 해도 진헌은 잔잔한 슬픔에 잠겨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 나는 아직도 소라를 좋아하고 있구나 '


시간이 흘렀음에도 소라는 여전히 진헌의 심장 깊은 곳에 박혀 있어 정신없이 자신을 흔들어 댈 뿐이었다

브라이언이 진헌을 깨웠을 땐 기차시간이 임박해 소라에게 전화를 할 여유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한 진헌은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가끔 경주가 소라가 소라와의 고요한 밤이 생각나긴 했지만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진정된 진헌의 심장이 마음이 생활이 요동치는 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9월의 마지막주 금요일 

퇴근 준비를 하던 진헌의 휴대폰 채팅창의 숫자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무심히 본 동기들의 카톡 창에서 소라의 이름이 영민형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


' 무슨 일이지? '


동기들은 오래간만에 빅뉴스가 떴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영민형이 소라를 잊지 못해 재결합을 원하고 있고 다시 프러포즈하기 위해 반지를 샀고

내일 소라를 만나러 경주로 간다는 소식이었다

13년 만에 소라를 경주에서 다시 봤을 때처럼 진헌은 온몸이 굳어가고 있음을 

이번에는 살얼음이 아닌 온몸이 빙하처럼 뻣뻣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이번에 소라를 잃어버리면 다시는 소라를 볼 수 없을 거라는 불안함이 

진헌의 뇌를 자극해 아드레날린을 마구 뿜어대기 시작했다

간신히 평안을 찾았던 진헌의 심장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고 진헌의 얼굴과 몸은 열기로 달아올랐다 

진헌은 재킷을 챙겨 입지 않은 채 서울역으로 향했다

금요일 밤이라 경주행 ktx좌석은 남아있지 않았고 입석표만 구했다

경주로 가는 기차 안 

진헌은 한 달 동안 소라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은 자신이 바보 같아 끊임없이 후회를 하고 있었다

경주에 도착할 무렵

진헌의 휴대폰에 소라의 이름과 번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 여보세요 "

" 어, 소라야 "

" 진헌아, 나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

" 그래, 그럼 만나서 얘기하자 "

" 어? 아니, 나 지금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 "

" 소라야, 만나서 얘기하자,  금방 경주에 도착해 "

" 뭐? 무슨 소리야? "

" 나 지금 ktx 안이야.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기다려 소라야 나 금방 너네 집으로 갈 게 "

" 너, 지금 역에 들어오는 기차에 타고 있는 거야? "

" 응 "

" 너, 정말 "


ktx가 플랫폼에 도착하자 진헌은 가장 먼저 뛰어내려 계단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최진헌, 여기야 "


진헌이 돌아보자 플랫폼에는 하얀 수국처럼 환한 웃음을 띤 소라가 진헌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소라야, 너 어떻게 이렇게 일찍 나왔어? 

  나 아무한테도 여기 온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

" 나, 너한테 급하게 물어볼 말이 있어서 너한테 가려고 하는 중이었어 

  잘못하면 우리 엇갈릴 뻔했어 "

" 소라야, 이제 다시 우리가 엇갈릴 일은 없어

  다시 내가 너를 기다릴 일도 네가 날 기다릴 시간도 없을 거야 "

" 최진헌, 그게 무슨 말이야? "

" 지금 내가 네 앞에 서 있고, 앞으로도 내가 항상 네 앞에 서 있을 거란 얘기야 

  가자 소라야 "


진헌의 눈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다시는 소라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놓치지 않겠다고 

35살의 진헌은 35살의 소라의 손을 꽉 잡고 보름달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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