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혼기> 김자하
단숨에 읽었다. 낯선 세계로의 초대는 언제나 즐겁고 설레는 일이다. 내게 이 웹소설이 그랬다. 한국 신화 요소가 곳곳에 스며든 이 낯선 세계가 익숙해지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캐릭터가 친숙해질 즈음 이야기는 끝이 난다. 더없이 완벽한 방향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더 이상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다는 아쉬움이 이번에는 유독 오래 남았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은 사라질 수밖에 없고, 헤어질 수밖에 없고,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미련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진혼기>의 가르침과 달리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화랑도를 이끄는 최고 권력자, 상선 때문에.
<진혼기>의 매력은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지만, 독자로서 가장 큰 매력을 느낀 건 시대배경이다.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신라에만 존재했던 집단인 화랑도가 이야기의 중심에 선다.
화랑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주를 포함한 그 일대를 뛰어다니고 구르며, 신라인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일들을 맞닥뜨린다. 여기에 토속신앙과 한국신화, 불교적 세계관이 어우러진다. 실제 역사와 판타지를 적절히 섞어낸 서사는 마치 한 편의 신비로운 역사서를 읽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주술을 주 무기로 쓰는 주인공이 있다는 것. 주인공 '설영'은 어릴 때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귀신들의 손에 길러진 특이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영력을 지닌 설영이 귀신들과 살며 배운 것은 다름 아닌 주술이었다. 하지만 불교를 국교로 따르는 화랑도에 몸을 담게 된 이상, 설영은 모종의 사연으로 주술 능력을 봉인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운명은 그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다.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며 돌아가신 스승님이 걸어둔 주술의 봉인이 강제로 풀리게 되고, 설영은 화랑으로서 불명예스러운 누명까지 쓰게 된다. 결국 <진혼기>는 설영이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다시 주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그 여정에서 만난 망자들을 달래주는 이야기다.
<진혼기>는 엄연히 투탑 주인공물이다. 설영의 백의종군이나 다름없는 여정에 합류한 이가 있으니, 바로 8년 전 대재앙신으로부터 신국을 구하고 홀연히 사라졌던 전대 국선, '자하'다.
자하는 가장 빛나는 별인 천랑성이 사람으로 태어나, 신라를 구할 거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실제로 자기 목숨을 등가교환 하는 동귀어진(同歸於盡)을 통해 대재앙신을 끝장냈다. 하지만 신라를 구하는 대가로 대재앙신과 함께 죽어야 했던 자하는 그 존재와 함께 8년 만에 죽음에서 돌아왔다.
죽음에서 돌아왔으나, 산 자에 속할 수 없는 자하는 망자가 되어서야 생애 처음으로 이해자를 만난다.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생존을 위해 살아온 설영이다. 처음엔 흉신으로 지목당한 설영을 의심하고 이용하려 했지만, 끝내 설영을 믿게 된 자하는 비로소 모든 미련과 운명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자하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자하의 인생은 생존을 향한 강한 집념 그 자체였다. 죽음이 그림자처럼 쫓아와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뛰어난 능력과 처세술로 권력과 사람을 얻어 소소한 행복을 누릴 줄도 알았다. 그런 그가 초토화된 신라를 구할 유일한 방법이 동귀어진이라는 것 밖에 없자, 끝내 죽음을 택했다. 무려 두 번이나 말이다.
"8년 전에 끝내지 못했던 걸 제대로 끝낼게. 이번에는 믿어도 좋아."
8년 전에는 분노에 차서 자기를 희생했던 사람이, 설영과 함께한 여정 끝에선 웃으며 대재앙신과의 끝을 택했다. 천랑성이라는 무거운 기대와 운명을 홀로 짊어져야 했던 그는 설영을 만나 모든 패를 써보고, 함께 고민하며 울분에 잠식당했던 과거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더 강하고 견고해진 자하는 매 에피소드의 막다른 길목에서 언제나 든든하고 안심되는 존재였다.
살고자 강해졌고, 지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며, 불우한 과거를 딛고 약자에게 다정하던 김자하. 짓궂은 장난기를 가졌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엔 망설임 없이 선두에 서서 모두를 단단히 붙잡아주던 사람. 삼천세계를 모조리 유람해도 그런 김자하는 오직 단 한 명뿐이다. 자기가 애정한 모든 존재를 지키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 화랑도의 상선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작품을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대사가 있다.
“하늘이 가르쳐 주고 땅이 가르쳐 줬으니까. 죽음이 있었으면 반드시 진혼(鎭魂)을 해야 한다. ‘진(鎭)’이란 곧 진정시킨다는 의미지. 영혼을 달래 고이 잠들게 하는 거야.”
이 대사는 결국 자하의 마지막 선택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작중 자하는 끊임없이 '죽은 사람'임이 강조된다. 과거의 영광과 행복이 모조리 흑백이 된 채 폐허처럼 남겨진 망령. 그런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이해받았다고 느낀 순간은 바로 설영이 '진혼'을 설명했을 때였을 것이다.
설영이 매번 성심껏 죽은 자의 말을 들어주고, 왕생부를 그려 망자를 달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자하의 마음속에 가득했던 분노도 서서히 잦아들었을지 모른다. 진혼의 과정을 함께하며 마침내 자하 자신의 외롭고 지친 영혼도 달래진 것이다. 그랬기에 자하는 후회도 미련도 없이, 진정으로 모두를 구하기 위한 두 번째 선택을 내릴 수 있었다.
그 평온한 마음이 있었기에 마지막 내기에서도 이길 수 있지 않았을까. 대재앙신을 소멸시키고, 수천 수억 개의 세계를 가로질러 다시 같은 세계로 돌아오는 일. 하늘과 땅이 가르쳐준 그 가르침 덕분에, 운명에서 자유로운 인간 김자하로서의 삶으로 돌아온 그를 힘껏 반길 수 있었다.
그렇게 김자하는 ‘우리는 할 수 있을 거라던 약속’을, 설영과도, 독자인 우리와도 끝내 지켜냈다.
자하가 수천만 번의 싸움과 방황을 끝내고 우리에게 돌아왔기에 알 수 있다. <진혼기>는 결국 사람을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이야기였다. 떠나는 사람도, 남겨진 사람도 모두 위로를 얻음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