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투병 일기 - 190305
폐암 환자에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미세먼지가 극성이다. 연일 미세먼지 경보가 이어지던 어제 엄마는 미세먼지 속을 헤치고 항암치료를 받으러 갔다. 엑스레이와 CT를 찍었고 피를 뽑았다. 혈관을 찾을 수가 없어서 매번 간호사가 고생을 한다. 그럼에도 간호사는 연신 죄송하다고 한다. 쩔쩔 메는 간호사에게 엄마는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내 몸뚱이가 그런데 뭐”라며 위로를 하며 안심을 시킨다. 엄마의 저 배려심이란... 역시 우리 엄마다.
지난 3차 항암에서 의사는 말했다. “폐렴과 패혈증이 왔었고 항암을 중단하는 게 좋겠어요. 오히려 더 위험할 수가 있거든요” 그러면서도 최종 결정은 다음번 진료 때 하자고 했다. CT 결과를 살펴본 의사는 항암효과는 좋은데 치료를 계속할지 여부는 직접 결정하라고 했다. 치료를 중단하면 이후에 어찌 되는가 물었더니 답을 하지 않고 말을 돌린다. 더 이상 쓸 수 없는 약이 없기 때문일 것임을 안다. 엄마도 이번 약이 쓸 수 있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지 중단하지 않겠다고 했다. 엄마의 저 강인함이란... 역시 우리 엄마다.
빈 병실이 나오기까지 4시간여를 기다려야 했다. 단백질이 체력 회복에 좋다고 해서 매일 콩물을 갈아서 마시게 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콩국수를 좋아하게 되었다. 여름이면 서리태와 백태를 한 포대씩 사서 콩물을 낸다. 하루를 꼬박 콩을 불린 후에 삶는다. 너무 오래 삶아도 그렇다고 너무 조금 삶아도 안된다. 삶은 콩을 한 번에 먹을 만큼씩 비닐팩에 담아서 냉동실에 보관해둔다. 전날 저녁에 한 봉지를 꺼내 놓으면 다음날 아침에 모두 녹아 있다. 그것을 우유와 잣, 호두, 아몬드 등 견과류를 넣어서 갈아서 마신다. 그 고소함은 하루 동안 입에서 맴돈다.
엄마에게 가지고 온 콩물을 한 잔 내밀고 난 자판기 커피를 뽑아서 병원 로비 커피숍 의자에 앉았다. 엄마 얼굴은 슬프고 불안해 보였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슬픔과 불안을 내색하지 말아야 함을 잘 알고 있지만 그건 이성일뿐이다. 이놈의 몸뚱이는 언제나 이성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요즘 드라마 ‘왜 그래 풍상씨’에 나오는 시한부 환자 풍상씨가 생각났다. 풍상씨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버킷리스트를 작성한다. 하나하나씩 실행에 옮겨보지만 결국 성공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엄마! 버킷리스트라는 것이 있는데 다섯 가지든 열 가지든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수첩에 적어놓고 하나하나씩 하는 거거든. 가령 일주일간 가출해서 여행하기 같은 거 말야” 폐암 말기임을 모르고 있는 엄마에게 뜬금없는 죽음과 버킷리스트 이야기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싶어 부러 과장되고 태연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피식 웃었지만 아주 잠깐 눈도 반짝거린 듯했다.
“퇴원해서 줄테니까 네가 애미한테 5만 원 줘라!”
“갑자기 5만 원은 왜?”
“이번 주 서윤이 생일이잖니! 내가 병원에 있어서 못해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수수팥떡은 꼭 해주라고”
그렇게 입원한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순간 짜증과 화가 밀려왔다. '분명 항암 주사를 맞았고 지금쯤이면 부작용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어야 할텐데'라는 생각이 들자 짜증과 화는 아예 쓰나미처럼 커져버렸다.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조마조마하면서 기껏 버킷리스트 얘기를 꺼냈더니만 고작 수수팥떡이라니... 수수팥떡을 검색해봤다. 아기가 태어나면 귀신을 내쫓고 건강하게 자라라는 의미로 열 살까지 해주는 거란다. 엄마의 버킷리스트 1번은 '손녀딸이 10살이 될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서 수수팥떡 해주기'로 정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자신의 안녕과 즐거움을 위해서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살아왔던 엄마에게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버킷리스트를 써보라고 한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 더도 덜도 말고 앞으로 딱 5년 간만 딸내미에게 수수팥떡을 해줄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버킷리스트 나머지 9가지는 순전히 엄마만을 위한 것으로 내가 직접 만들어줘야겠다. '2번은 뭘로 해야 할까?'
<커버 사진 출처 : 버킷리스트(遗愿清单)를 당장 만들어야 하는 이유 – 내가 쓰고 세상이 읽는다, 우리나무 (wulinam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