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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일 Jun 18. 2021

연결된 시간선에서 만난 좋은 친구

<미얀마 8요일력> 마지막화



시간을 보다


흘러가는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고 잡을 수 없다. 변하는 그림자의 방향과 길이에서, 변하는 나뭇잎의 색에서 알 뿐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잡히지 않는 시간을 표현하려 애썼다. 해가 있는 동안에는 그림자로 시간을 짐작했고, 밤에는 별의 움직임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


태양과 달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인다. (c) Noh Sungil


시계 침이 회전하는 방향, 즉 '시계 방향'은 태양의 움직임을 반영하고 있다.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포물선의 방향과 해시계에서 그림자가 그리는 포물선의 방향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시계 방향이 정해졌다.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방향에 우주의 움직임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해보면 정말 놀랍다.



가장 오래된 해시계로 추정되는 이집트의 유물(기원전 15세기경, 왼쪽)과 조선시대 해시계 앙부일구 (오른쪽) (c) Bernat Agullo



종교 공간에 깃든 시간


무한히 떠오르고 지는 태양과 무한히 반복되는 계절의 흘러가는 시간을 마주하며 '나는 어떤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스스로 묻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잡히지 않는 시간을 일상에 드러내는 행위는 역사에서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표현되었다. 시간 개념은 종교가 추구하는 세계관을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이기에 신앙과 예배의 공간에도 깃들어 있다. 기독교와 불교를 예로 생각해보자.


기독교 세계관은 시간을 시작과 끝이 있고 한 방향으로 흐르는 직선형으로 설명한다. 인류의 시간은 창조주가 세계를 창조한 때 시작되어 예수의 재림에 이어질 마지막 심판의 날에 끝난다. 기독교 예배 공간인 성당 혹은 교회당은 예배자들이 정면으로 전진하는 직선형 구조로 건축되어 있다. 세속과 구분되는 육중한 문을 지나 성소를 바라보며 천천히 나아가는 과정은 예수를 통해 구별된 삶이 성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구조(위)와 기독교의 직선형으로 흘러가는 시간 (아래)



불교에서는 시간에 실체가 없다고 한다. 불교는  생명이 태어나 죽고 다시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반복하면서 주어진 (카르마) 수행한다고 말한다. 불교의 시간 개념은 석가모니 입적 이후부터 불교 신앙을 상징해온 불탑(Stupa) 순례자들이 도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오른쪽 어깨를 불탑 중심을 바라보게 하여  바깥부터 시계 방향으로 3 바퀴를 돌아 중앙 탑에 가까이 가는 우요삼잡(右繞三) 수행은 부처, 열반에 가까이 다가가는 생의 반복을 상징한다. 이것은 또한 시각적으로는 불교에서 (다르마) 상징하는 윤회의 수레바퀴와 연결된다.


미얀마 바간의 슈웨지곤 파고다 탑을 도는 방문자의 동선(왼쪽)과 다르마(법)의 수레바퀴(오른쪽).



위에서 알아본 태양의 움직임과 시계방향, 종교의 시간 개념을 한데 모으면 아래와 같이 시간을 기록하는 새로운 모양이 만들어진다. 날짜를 세로로 표기하는 미얀마의 달력과 회전하며 흘러가는 시간을 합치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선형 시간선이 된다.


시간선은 나선을 그리며 이어진다. (c) Noh Sungil




시간을 새기다


살다 보면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도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군대 이야기로 밤을 새울 수 있는 것이나 또래 아이를 키우는 부모끼리 느끼는 유대감처럼, 비슷한 사건을 겪은 사람들끼리 공감대가 생길 때면 서로의 마음이 확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 비록 장소와 시간대는 다르지만 서로의 인생이 지나온 시간선에 새겨진 비슷한 사건들을 발견하고 느끼는 끈끈한 동료애일 테다.


몸의 흉터로 상처의 기억을 떠올리듯, 달력에 새겨진 기념일은 공동체가 함께 겪어낸 시간을 기억하게 한다. 압제에서 벗어난 날, 모두가 슬픔에 빠졌던 날, 함께 즐기는 축제의 날, 새롭게 시작하는 날... 하나의 시간선을 살아가는 공동체가 겪은 수많은 기억이 마치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는 눈가의 주름처럼 달력에 기록된다. 공동체는 공통의 시간선에 새겨진 기념일을 보면서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다.  



연결된 시간선, 나선형의 연결 고리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달력의 개념을 벗어나 전혀 새롭게 시간을 기록할 방법을 떠올리게 된다. 역사 속에서 같은 사건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함께 삶의 리듬을 맞춰 살아가는 것을 달력의 사회적 함의라 해보자. 그렇다면 전혀 다른 공간과 시간을 사는 사람들 사이에도 동일하게 겪어온 사건들, 공감할 수 있는 기억을 기념일로 서로의 시간선에 새기고 연결하여 새로운 달력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닐까?


지난 몇 년간 태국과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노래들이 울려 퍼졌다. 80년대 한국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과 2010년대 촛불을 든 시민들의 민주화의 노래 '다시 만난 세계.'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국의 거리를 보며 새로운 달력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치열한 삶을 살아가며 새겨지는 사건의 순간을 서로의 역사에서도 발견하는 것. 그 발견이 서로의 시간선을 이어지게 한다. 7요일의 세계에서 8요일을 살아가는 미얀마 사람들은 군사 쿠데타라는 절망적인 현실을 바꾸기 위해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미얀마의 시간선에 새겨진 8888, 22222 민주항쟁의 흔적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선 위에 5.18, 6월 항쟁, 촛불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동일하게 새겨져 있다. 서로의 시간선은 이렇게 만나 마치 유전자 DNA처럼 끈끈하게 연결되어 흘러간다.



서로의 나선형 시간선에서 사건들이 연결되어 이루는 연대의 DNA (c) Noh sungil


"우리 버마인은 함께 선을 행하는 이들은 함께 쌓은 공덕이 연이 되어 윤회를 통해 다시 만날 것이라 믿습니다. 만일 내가 윤회의 바퀴 속을 계속 돌아야 한다면 가장 진실한 친구와 동지로 여겨지는 이들과 함께 돌리라 생각하는 일도 좋았습니다."
- <아웅 산 수 치의 평화>, 74p.



깔랴나 미타


불교에 깔랴나 미타(Kalyana Mitra, 善友), 즉 고귀하고 아름다운 친구라는 말이 있다. 이 친구는 주기 어려운 것을 주고, 하기 어려운 것을 하며,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비밀스러운 일을 서로 말하며, 잘못을 서로 덮어주고, 괴로운 일을 만났을 때 버리지 않으며, 비천할 때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선우칠사(善友七事), 사분율(四分律))


밝은 미래를 향하고 있던 시간의 축이 코로나 19로 흔들리고 고립되는 경험 속에서 "내일 떠오를 해가 나에게도 동일하게 떠오를까?"를 물어야 할 정도로 인류가 생명과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환상이 무참히 깨지고 상상이 불가능해진 삶, 미얀마 사람들도 동일하게 겪고 있는 이 불안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일이 아닐까?


주어진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

홀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선에서 흔적을 발견하는 것.

미얀마 8요일력을 연구하며 깨달은 것이다.



달력이 넘어간다.

삶은 이어진다.

그리고 삶은 이어져 있다.


<미얀마 8요일력>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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