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소정 Aug 10. 2017

자연 밑에 인간 있고, 인간 위에 자연 있다.

공생이다, 하지만 자연의 품 안에서의 공생이다.





    브라질 보니또에서였을 것이다. 더 이상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해서는 안된다고 느꼈던 것이. 볼리비아에서도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명확하지는 못했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는 브라질 보니또는 전체가 자연보호구역 정도 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호스텔 주인아주머니는 우리에게 모든 액티비티와 공원 등은 정부가 관리한다고 얘기해주었다.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 강을 따라 흘러가는 스노클에서 나는 온전히 손님이었다. 함부로 물속 생물을 만져서도 안되고, 힘이 들어 일어선다고 돌 하나라도 함부로 밟아서는 안됐다. 물장구를 쳐서도 안되고 손으로만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 강의 주인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삶이 궁금해 잠시 들여다보고, 내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않고 돌아와야 하는 손님이었다. 사람의 삶이라고 생각하면 지극히도 당연한 것인데도, 아직까지는 인간-자연 간의 수직적 지배제도가 완전히 사라지지 못하여 착각 속에서 존중 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사실 남미는 우리나라보다 월등히 잘 산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의 국민총생산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빈부격차가 굉장히 크고, 마약 등의 범죄가 여전히 존재한다. 관광객으로 바라본 것이기 때문에 내가 본 것이 전부 진실된 것, 옳은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연을 바라보며 대하는 이들의 시각은 단순히 경제적 지표가, 국제 사회적 지표로 표시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곳에서 인간이라는 생물의 생태계적 위상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고 왔다.





    우리나라도 이와 같이 자연과 인간의 공생, 특히나 자연 위에 인간 없다는 가치관을 향해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다. 현재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얼마 전 TVN에서 방영했던 <알쓸신잡>에서도 이와 비슷한 논의가 잠깐 등장한 적이 있다. 아마도 경주 편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이때 소설가 김영하 씨께서 새 공원 정도 되는 곳에 방문하시고 남긴 감상평이 화두가 되어 현재의 동물원에 대한 논의가 나왔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한국의 대부분의 동물원 특히 동물들이 좁은 우리 안에서 사육되고 누군가의 관람을 위해 좁은 공간에 가두어져 있는 행태를 매우 비판하는 바이다. 가능하다면, 나는 이 동물들을 자연의 품 속으로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라는 점 또한 인정한다. <알쓸신잡>에서도 말했듯, 이러한 경험의 장(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이 사라지면 가장 많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아마 부모가 보통 이하의 소득 수준을 가진 어린이들일 것이다. 당장에 동물원이 사라지고 동물들이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자본주의인 이 세상에서 돈이 있다면 많이 주고서라도 자연 속에 있는 그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좁게는 동물을 보는 것, 조금 더 넓혀 보자면 새로운 종을 인식하고,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부모의 소득별로 차이가 나게 되면 윗대의 지위나 소득이 후세로 갈수록 좁혀지지 못하고 넓어질 수 있다. 이 의견 또한 맞는 것이다.






    나는 이 날, 이 방송을 보며 크게 공감했다. 내가 브라질에서 느꼈던 그 감정들이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정리되어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나의 입장을 조금 더 깊은 곳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생명이 있는 것이 그것답게 태어나 그것답게 살다가 죽을 권리는, 다른 종 특히 인간의 알 권리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물들을 자연에서 격리시키고 가두어 누군가의 눈요기를 위해 사용하는 것. 동물들은 그렇게 살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져야 의미를 가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들답게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로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로운 것이다. 무언가에 쓰여야 가치 있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인간중심주의적이다.




    한국의 동물원도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곳에 종사하시는 분들도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어떠한 소명을 가지고 일을 하고 계실 것이다.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그 동물들을 살려내고 지켜내려고 하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긁어 부스럼 내놓고 도와주는 것보다는 그냥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상태로 놓아두는 것이 조금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씨께서 방문하셨던 새 공원과 비슷한 것이 브라질에도 있다. 찾아본다면 전 세계적으로도 곳곳에 있을 것이다. 새들이 갇혀있기는 하지만, 비교적 넓은 공간에서 자유로이 날아다닐 수 있으며 사람들은 그 속을 지나가며 새들의 삶을 바라보고 나오는 동물원 말이다. 그리고 꼭 남미라고 하여서 동물원이 우리나라보다 선진적인 것도 아니다. 나는 방문해보지 않았지만, 아르헨티나의 루한 동물원에 가면 맹수들과 한 우리 안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사자나 호랑이 등을 만지면서 말이다. 다른 종의 손을 타고, 사진을 찍히기 위해서 강요된 삶을 사는 것.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어렵지 않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에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니, 시간이 흘러간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때문에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와 같이 변화를 주장하는 이유는 조금 더 근본적이다. 현상 유지에 대한 요구만 있을 경우에 우리는 다른 시각은 전혀 보지 못하고 길이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나의 선택이 여러 가지 가치관과 이해관계에 의해서 현상 유지를 택하더라도,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를 들어보고, 갈등해보고 택해야 한다. 다른 의견의 존재를 알고 자신의 선택을 하는 것과, 다른 의견의 존재를 모르기에 어쩌면 한 가지로 강요된 선택을 하는 것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현재의 동물원의 변화를 꾀하면서 내 의견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견은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피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기존의 방식에 반대하거나, 변화를 꾀하는 의견을 선택했다고 내 의견이 우월한 것은 아니다. 그저 나의 가치관이 그런 선택을 하게 했을 뿐이다. 나의 목소리로 사람들이 변화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그저, 다른 의견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은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비단 동물원과 동물의 권리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것에서도 그렇다. 내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몸소 깨달았던 것, 비용을 덜 들여서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깨달음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 나는 그래서 글을 썼다. 나의 존재를 보여주고, 내 생각을 보여주면서 어떤 누군가가 의외의 위로나 의외의 것들을 얻어갈 수도 있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진짜 짊어진 것은 배낭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