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소정 Jul 28. 2017

나는 떠났고,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1)

이 삶에서 너무도 도망치고 싶었어요.




    '내가 여행을 떠난 이유'라는 딱딱한 주제로 나는 글을 수십번을 썼다. 내 성격이 원래 그러하듯, 합리화를 시키기 위해서는 무언가 이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브런치에도 글을 하나 썼고, 페이스북에도 썼고, 심지어 내 일기장에는 나는 왜 여행을 떠났는가에 대한 것으로만 빽빽히 채워진 것도 있다. 너무나도 진부하지만, 그래도 '나'의 여행을 설명하려면 내가 떠난 이유를 설명해야하니 이번에도 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떠난 이유에 대한 내 마지막 긴 글이 될 것이다.




    나는 심심하고 따분한 사람이다. 나 혼자 있을 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보통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앉아서 관람하는 사람 쪽에 가깝다. 내가 가진 재주 중에는 엔터테이너로서의 자질이 하나도 없다. 어렸을 때부터 남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부끄러워했고, 웃긴 얘기도 잘 못하는 걸 보면 그냥 성격이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하고 말을 잘 듣는 쪽을 택했다. 진부하고 따분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고등학교때까지 그렇게 살았다. 부모님과 크고 작은 마찰은 수시로 있었지만, 대체로 말 잘 듣는 모법생이었다. 밖에 나가면 꽤나 자랑스러웠던 큰 딸이자 손녀였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하지 말라는 것은 100개 중 99개는 하지 않았고, 하라고 했던 것들은 곧잘 해내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 특히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들, 어른들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이것 뿐이었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곧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다른 길은 본 적이 없으니, 부모님이 보여준 길이 곧 내가 본 길이었다. 항상 선택의 자유는 열어두셨지만, 선택지는 부모님의 가치관에 따라서 옳다고 생각하신 것들만 보여주셨기 때문에 나는 다른 길을 보기 전까지 내가 엄청나게 자유롭고 부모님께서 나를 존중해주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런 생활 속에서 나는 운이 좋았던 게 있는데, 바로 주입식 교육의 수혜자라는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사실은 지금까지도) 채택된 주입식 교육이 마침 나에게도 딱 맞는 학습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등에 업고 나는 과분한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모든 것이 우연히 잘 맞아 떨어져서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고, 매우 감사한 일인데 그 당시에는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 수능을 좀 망쳐서, 흔히 말하는 '원서질'을 잘 못해서 이 대학밖에 못 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처음 실패를 맛보았다고 생각한 것이 이 때가 아니었나 싶다.


    재수를 할까말까 고민을 하다가, 엄마는 재수는 너무 위험하니 일단 등록하고 반수를 하자고 나를 꾀었다. 아빠는 절대 안된다며 재수해서 더 나은 대학에 가라고 하시더니, 며칠 뒤에 회사 동료의 말을 듣고는 지금 다니는 대학을 가는 것도 좋겠다면서 은근 슬쩍 마음을 바꾸셨다. 나는 당연히 반수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진학했는데, 어쩌다보니 지금까지 6년째 학교를 다니고 있다. 아, 6년제가 아니라 4년제인데 휴학을 많이 해 아직 졸업을 못했다.





    내가 이렇게 학교를 계속 다니게 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동아리, 둘째는 학생회 활동이다. 동아리는 연합동아리였는데 당시에 다른 학교 친구들을 만나면서 술을 마시고 학회를 하고 엠티도 가고 하는 생활이 너무나도 즐거웠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아직까지도 내 대학생활의 베프들이다. 학생회 활동은 무언가 그 이전부터 계속 해왔던 습관과 하지 않았을 때의 허전함때문에 시작하게 됐는데 너무나도 좋은 선배와, 교류가 적은 우리 학교에서도 후배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하게 되었다. 당연히 술마시고 노는 즐거움을 알았기 때문에 나의 반수는 저 멀리 떠나가 버렸다. 사실 '이 두개가 아니었다면 반수를 했을까'하는 질문에는 쉽사리 예스를 외치지 못할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 두가지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게 이 두 활동에 3년을 바쳤고 나는 꽤 잘나가는 국내 프로야구 투수의 방어율 정도 되는 학점을 얻었다. 물론 활동을 하면서도 학점을 잘 받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핑계 없는 무덤 없다니 나도 내 학점에 핑계를 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어디에 당당하게 내 놓을 수 있는 학점은 아니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내가 배워온 것들은 꼭 숫자 몇 자리로 표현될 것들이 아니니까. 식상하지만, 학점은 숫자일 뿐이니까?





    그렇게 3년을 놀 때, 부모님께서 자꾸 학점 관리는 안하냐고 하시길래 선언한 말이 있었다.

    "나 3학년 끝나면 행정고시 준비할거야. 어차피 행시는 학점 안보니까 나한테 학점으로 잔소리 하지마. 나중에 행시공부 시작하면 못 노니까 지금 많이 놀아두는 거야."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당시에 잔소리를 피해보고자 했던 미봉책이었다. 집에서 나에게 기대하고 있고 어느 정도는 강요했던 것이 행정고시였고, 19년을 말 잘듣고 살다가 이제 조금 일탈을 맛 본 20대 초반의 나는 그래도 큰 틀은 부모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할 일로 생각했었다. 달콤한 말로 부모님을 꾄 지 3년이 지나고 약속한 시간이 되어 인생 처음으로 휴학이란 것을 해봤다. 신림 고시촌에 독서실을 얻었고, 아침에 가서 오전 공부를 하고 밥을 먹고 오후 수업을 내내 듣고 저녁을 먹고 밤에 공부를 하고 집으로 와서 잠자고 다시 아침에 가서 오전 공부를 하는 삶을 살았다. 근데 3년을 놀기만 했는데 어려운 말로 가득한 수험서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래서 6개월 정도 열심히 공부하다가, 시험을 그만두기까지는 12개월이 걸렸고 그 동안 나는 야구장을 약 40번 정도 다녔다.


    시험을 포기할 때 쯤 눈에 보이는 게 있다. 포기하더라도 무언가 남는 시험과, 포기하면 남는 것 없이 사라지는 시험 두가지가 있다는 사실. 내가 했던 행시는 후자였다. 적어도 나한테는 시험과 관련한 지식이 남는 게 없었다. 그래도 행시는 내 인생에 두가지 중요한 것을 주었는데, 첫째는 야구장에서 만난 좋은 친구들이고 둘째는 활자 공포증을 극복하는 법이다. 합리화를 잘 하는 성격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 두가지는 나에게 아직까지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행시를 포기했으니 나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복학을 해야했고 취업을 해야했다. 사기업이든 공기업이든. 제기랄, 이럴 거면 학점 관리는 좀 할걸. 어쨋든 다음 학기에 복학을 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은 바음도 별로 없지만 집에서 나를 탐탁지 않게 보고 있기 때문에 꼭 복학을 해야했다. 복학하기 전, 정확히 말하자면 행시를 완전히 포기하기 바로 직전 나는 카페에서 알바를 시작했었다. 행시를 하기 전에 패스트푸드점에서 알바를 했는데 내 손으로 번 돈을 눈치보지 않고 쓰는 게 너무나도 좋았어서 다시 일을 했다. 이 때무터 나의 관심사는 복학한 학기의 성적이 아니라, 내 통장에 찍히는 몇 푼 안되는 월급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긍정적인 평가에 있었다. 학점은 당연히 처참했다. 이번에는 꽤 괜찮은 투수가 아니라, 리그 최정상습 투수의 방어율보다 좋았다. 이 학기에 처음으로 집으로 날아온 성적표를 숨겼다. 그래도 열심히 일하고 동료들이랑 재밌게 놀고 만나는 손님들이랑 이야기도 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이제 마지막 학기를 남기고 선택의 기로에 섰다. 학교를 계속 다닐 것인지, 휴학을 할 것인지 골라야 했다. 사실 선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내 마음은 휴학을 외치고 있었다. 일단 저지르고 집에 통보를 했고, 나가던 일을 더 열심히 더 많이 나가기 시작했다. 이 마음이 들 무렵 남미로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8월 말에 남미로 떠나는 항공권을 샀다. 내 앞으로 수도 없이 펼쳐진 '해야만 하는 것들'을 미뤄버린 결정이었다. 그 중 가장 큰 놈은 취업이었는데 어차피 내가 가진 지금의 것들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고, 집에서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가져다 줄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5-6개월 정도 더 일했고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떠나기 전, 나는 '남미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몇 안되는 대단한 여행자'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남미에 가보니 여행객만 수백명은 되어 보였고, 그 때 처음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여행을 얼마나 좋아하는 민족인지 새삼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대단한 인간은 전혀 되지 못했고 오히려 조금 더 세상과 동떨어진 인간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만약 내가 저 대단한 여행자가 되어 돌아오지 않는다면 현지에서 뭔가 먹고 살 방법을 찾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이상한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에 빠져있기도 했다. 결국 이것도 실패해서 대단한 사람이 되지도 못했는데 현지에서 먹고 살 방법도 못 찾은 귀국인이 되었다. 취업시장에서 실패하기 싫어서, 그리고 부모님의 기대를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라는 딸이 되기 싫어서 떠난 여행이었는데 결국엔 또 실패해서 돌아왔다. 하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이므로, 사람이 어머니가 될 때 성장하는 만큼 나는 더 성장해서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냥 말하고 싶었다. 나는 도망가고 싶어서 떠난 거라고. 일단은 나에게 앞날을 제시하며 당신들의 욕심을 나에게 투영하고 강요하는 부모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사실 부모님은 많은 부분 양보하고 배려했지만, 떠나기로 마음 먹은 당시에 나는 마음이 좁고 날카로워 이런 건 보이지 않았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딸이 행시도 포기하고 집에서 놀다가 학점도 말아먹었는데 살려 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배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은 나를 취업으로 밀어넣고 옥죄는 사회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친구들, 후배들이 취업할 때마다 쫓기는 기분이 들어서 마음껏 축하해 주지도 못하는 내 모습이 너무 못나보였고, 변하고 싶었다. 또 어차피 노력하지도 않을 취업으로 스트레스 받느니 저 멀리 떠나버려 취업을 준비하지도 못할 상황으로 나를 내몰면 당장의 취업은 피할 수 있으니까 떠나고 싶었다.


    이런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장소는 지구 반대편이 적절했다. 지구 반대편이라는 표현을 쓰는 국가는 너무나도 많지만 이왕이면 우리나라의 대척점 부근에 있는 남미를 가야겠다 싶었다. 우리 가족이 있는 한국과 제일 멀고, 나를 자꾸 재촉하는 한국 사회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






    2017년 1월 31일에 출발해 남미 첫 국가인 페루에 도착한 날이 2월 1일. 원래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던 날이 4월 12일. 실제로 돌아온 날은 6월 10일. 중간에 러시아를 들렸기 때문에 지구 한 바퀴를 정확히 돌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브런치를 시작한 첫번째 이유는 이 동안의 박소정과 이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박소정과, 그 이후의 박소정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글 쓰는 것을 제일 싫어했던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이 읽지 않아 쓰는 글도 허접하지만, 그래도 기록해야 무언가 남는다는 사명하에 꽤나 열심히 해 볼 생각이다.


    쉬다 가십시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