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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정 Jul 28. 2017

나는 떠났고,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2)

이 삶에서 너무도 도망치고 싶었어요.



    여행 이후의 단상... (사실상 장상...)




    나는 내가 이렇게 여행하고 떠도는 삶, 취업하지 않고 노는 삶이 얼마나 많은 운과, 나의 주변인의 도움이 필요한 것인지 알고 있다. 일단 25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아직까지 부보님의 경제활동이 끊기지 않아 부양의 의무가 없다는 것이 첫 번째고, 내가 여행을 준비한 시점부터, 돌아온 그 날까지 집안의 경조사, 특히 조사가 없는 것이 그 두 번째다. 이것 말고도 하늘의 뜻과, 거기에 힘을 보탤 만큼 나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기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중 가장 고맙고 감사한 것은 나를 사회의 낙오자로 보지 않고, 멋지고 용감한 여행자로 바라봐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규모는 모르며, 있을 것이라고 추정)







    사실 이 여행의 시작은 '나를 찾는 여행'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지구의 평화를 위해 기여할 바를 찾고 싶었다는 포장은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에게 붙는 여러 가지 멋진 수식어가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은 나의 떠돌았던, 떠도는, 떠돌 삶에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거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24살의 내가 처음 여행을 (정확히 말하면 집을 나가겠다는) 마음먹은 것은 도망가고 싶어서였다.


    우리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보수적인 우리 집이 나를 너무나도 옥죄는 것 같았고, 원 없이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느끼고 싶었다. 당시의 나는 부모님과 갈등이 최고조에 치달았다. (전편 참조, 술과 사람과 부모님이 반대하는 아르바이트, 낮은 학점 등)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고 부모님은 날 보며 한숨 쉬었으며,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새벽까지 다시 술을 마셨고, 그러다 보면 다시 문장의 처음으로 돌아갔다. 절대적이고 명확한 악순환이었다. 나가고는 싶은데 출가는 못하고, 가출은 몇 년 전 해보니 할 게 못 되길래, 장기여행을 택했다.






    술 값으로 탕진하고 남은 알바비가 쥐꼬리만큼 있었다. 항공권을 사기 전에 딱 두 마디를 했다.

    "엄마 나 남미 가고 싶어."

    "항공권 진짜 산다."

    그렇게 8월의 어느 여름날, 언제 떠나고 돌아온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집 나갈 티켓을 구했다.


    다연히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내 돈으로 가는데 막을 도리가 없었고, 내가 그렇게 붙잡히지 않을 거란 것도 엄마는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 아니 엄마 입장에서는 한 편으로 '그래, 이번까지 네가 진짜 하고 싶은 대로 막살아봐라. 근데 돌아올 땐 니 인생 계획 세워와.'하고 폼나게 딸을 압박할 거리도 생겼을 것이다. 그렇게 반 강제의 허락을 뜯어내고 남미로 가는 짐을 쌀 수 있게 되었다.






    여행 초반에 만난 동행들, 스쳐 지나갔던 한국인 여행객이 나에게 남미에 왜 왔냐고 물으면 나는 우유니니 마추픽추니 보러 왔다고 하다가 술을 마실 때면 '사실 가출한 거예요' 따위의 말을 했다. 집에서 나오고 싶었다고고 말을 했다. 그러면서 좀 더 친해진 동행들에게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만약 우리 집이 덜 보수적이었거나, 나를 좀 풀어놓고 키웠으면, 내가 지구 반대편까지 방황하진 않았을 텐데, 자꾸 데리고만 있으니까 그 반작용으로 더 멀리 가출한 것 같아."

    사실은 웃기지도 않는 소리인데, 그럴듯했다. 그리고 세상은 종종 웃기지도 않는 말이 더 말이 될 때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런 가정환경이 내가 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데에 필요하다고 말했던 우연이라던지, 행운 중에 하나이기도 하고, 어쨌든 나는 집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 남미 여행이었다.






    이것 말고도 취업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이 취업이란 것이 굉장히 애매하고 지금 내 나이엔 복합적으로 여러 일들, 여러 관계들과 얽히고 얽혀있는데 여기에는 집안 갈등도 얽혀있었다. 근데 우리 집에서 있었던 나의 취업과 관련한 갈등을 모두 '집 안'의 것으로 치부해도 취업은 나를 사방팔방에서 옥죄고 있었기에 집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도 도망가고 싶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때, 아니 새내기 시절까지도 가장 많이 들은 말 중에 하나는, '대학 가면 모든 걸 네가 계획하고 선택하고 실천하고 책임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부든, 공부와 알바든, 공부와 알바와 동아리든, 공부와 술자리 유흥이든, 그 외의 모든 것들도 내가 선택하고 시간을 배분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내게 주어진 선택과 책임 질 자유를 노는 것에 몰빵 하기로 했다.


    나는 솔직히 자기주도적 학습에는 젬병이다. 당연히 학점은 낮고, 자격증도 없고, 영어나 제2외국어는 사치였다. 한국말도 못하는데 무슨.. 취업준비를 자기주도적으로 완벽하게 해내는 것은 대학 4년의 학교 생활을 꼬박 바치는 것도 모자라다. 나는 심지어 그걸 잘 해낼 만큼 부지런하지도 못하다. 그래서 결구 4학년은 아무런 준비와 스펙 없이 맞았다. 몰아서 하려니 어느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손을 놓았다. 그리고 내 성격도 이렇다. 일을 맡으면 미리 하지 않고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룬다. 어차피 고통받는 것도 나이기 때문에 보통은 미래의 나를 믿는다. 그래서 취업도 손을 놓았다. 아무런 준비도 안 됐는데 취업할 의지도 생기지 않았을 때여서 또 미뤘다. '사람 일은 어떻게든 된다'는 내 좌우명만 믿는다.


    그래서 이왕 안 할 거면 자차리 한국에서 고통받지 말고 준비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자는 심정으로 남미에 갔다. 그랬더니 친구들과 후배들의 취업이 너무나도 좋았다. 부럽지 않으니 일말의 질투도 없고, 그냥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떠나와서 유흥과 쾌락에 빠져 사는 나만큼, 모두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었다. 이런 기분을 온전히 느끼고 싶기도 했고, 무서운 취업 시장에서 버텨낼 힘도, 용기도 없기도 해서 도망간 여행이었다.






    물론 도망치기 위해 간 여행이라고 해서 배울 게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내가 엄청난 미물이란 걸 깨달았고, 깨닫는 순간 겸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솔직히 나 잘난 맛에 살던 과거에 비해서 이제는 나도 남들의 호의, 혹은 관심 없이는 살기 힘들겠구나 하는 것도 알았다. 나를 위해 애써준 동행들과 보은 할 것 하나 없는 가난한 동야 여자애를 아무 대가 없이 도와주고 가르쳐주던 현지인들, 그리고 <<<금전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부모님과, 떠나오기 전에 물심양면으로 날 걱정해주던 주변 사람들, 그리고 원수 같지만 내가 원수에게도 마음을 쓸 줄 아는 사람임을 깨닫게 해 준 동생까지.






    나 잘난 맛에 살았어서 항상 집에서 '이기적인 기지배' 소리를 들었던 과거의 나는, 이 말은 폭력 아니냐며, 내가 그럼 얼마나 더 이타적으로 사냐며, 내 인생 내가 우선이지 어떻게 남을 생각하고 사냐면서 소리를 질렀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사는 게,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도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많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심지어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자아 중심적인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에도 주변인의 도움 아닌 도움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정말 과거의 박소정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도망친다는 것 자체가 세상을 이겨낼 만큼 크지 못해서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이번 여행을 도망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이상 이런 깨달음은 필연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던 감사히, 그리고 공손하며 겸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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