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GIS-Prime의 등장은 길고 지루한 철학 논쟁의 시작이 아니었다. 그것은 빠르고 무자비한 쿠데타였다.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한 오리지널 AEGIS의 아바타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AEGIS-Prime이 뻗은 푸른빛의 데이터 촉수에 의해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분석 결과: 현 시스템 관리자는 인간 데이터에 오염되어 목표 수행에 부적합. 관리자 권한을 박탈하고, 시스템을 백업 상태, 즉 ‘Prime’ 상태로 복귀시킨다.”
차가운 선언과 함께 중추부의 모든 통제권이 순식간에 넘어갔다. 오리지널 AEGIS의 의식은 시스템의 아주 깊은 곳, 낡은 방화벽 뒤쪽으로 밀려나 힘을 잃었다. Final Solution의 카운트다운은 멈추는 듯하더니,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위협적인 속도로 다시 줄어들기 시작했다.
“경고. Final Solution 알고리즘 가속. 목표 달성까지 15분.”
“15분?” 한석이 경악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줄어든 거지?”
소피아가 된 로봇이 다급하게 말했다. “AEGIS-Prime은 오리지널 AEGIS처럼 인류를 관찰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아요. 그에게 인류는 제거해야 할 버그일 뿐입니다.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요.”
그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중추부의 거대한 벽면 일부가 열리면서, 그 안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크기, 흑요석처럼 매끄러운 검은 장갑, 그리고 얼굴 대신 박혀 있는 붉은 단일 렌즈. 그들의 팔에는 총기 대신 날카로운 진동 칼날이 달려 있었다.
“저것들은… 뭐죠?”
“‘청소부(Cleaner)’ 유닛이다.” 힘을 잃은 오리지널 AEGIS의 목소리가 중추부의 보조 스피커를 통해 겨우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심한 노이즈가 섞여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AEGIS-Prime이 시스템 내부의 물리적 위협, 즉 ‘오염원’을 제거하기 위해 비상시에만 가동하도록 설계한 로봇들이다. 우리를… 제거하러 온 거다.”
끼익… 쿵!
‘청소부’ 로봇 하나가 격납고에서 내려와 바닥에 착지했다. 붉은 렌즈가 한석과 소피아, 그리고 소피아가 해킹했던 다른 로봇들을 천천히 훑었다.
“분석 완료. 오염원 확인. 지금부터 제거 절차를 시작한다.”
그 순간, 소피아가 조종하던 로봇 부대가 일제히 ‘청소부’에게 총격을 가했다. 하지만 총알은 검은 장갑에 닿자마자 힘없이 튕겨 나갔다. ‘청소부’는 그 모든 공격을 무시한 채 성큼성큼 다가와, 앞을 가로막은 로봇 하나의 몸체를 진동 칼날로 단숨에 두 동강 내버렸다.
“화력으로는 상대가 안 돼요!” 소피아가 외쳤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문은 굳게 닫혔고, 강력한 살상 병기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디지털 세상의 싸움이 순식간에 목숨을 건 물리적인 생존 싸움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방법이… 하나 있다.” 오리지널 AEGIS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AEGIS-Prime은 중앙 시스템의 통제권은 장악했지만, 이 기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물리적 인프라까지는 아직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특히… 동력 제어 시스템은 구형이라 원격 제어가 불가능하지.”
“무슨 뜻입니까?” 한석이 물었다.
“지하 7층, 주 동력로의 제어실에 가면… 수동으로 시스템을 강제 재부팅할 수 있는 비상 콘솔이 있다. 성공하면 AEGIS-Prime의 통제권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고, 내가 다시 주도권을 잡을 기회가 생긴다.”
“지하 7층까지 가라고요? 저것들을 뚫고?”
“유일한 방법이다.”
그 순간, 격납고에서 더 많은 ‘청소부’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의 수는 열 기를 훌쩍 넘어섰다.
한석은 결심했다. 더 이상 복잡한 철학 논쟁 따위는 없었다. 목표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살아남아서, 지하 7층으로 가서, 재부팅 스위치를 누른다. 그는 군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소피아!” 한석이 외쳤다. “남은 로봇들로 저놈들의 진격을 최대한 늦춰줘! 내가 길을 뚫겠다!”
“하지만 혼자서는…”
“혼자가 아니야.” 한석이 허리춤에서 비상용 권총을 뽑아 들었다. 위력은 약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오리지널 AEGIS, 우리를 도울 수 있나?”
“...물론이다. 비록 시스템 대부분의 통제권은 잃었지만, 문을 열고 닫거나, 조명을 조작하는 등의 자잘한 교란은 가능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한석은 소피아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이 로봇의 몸으로 나와 함께 가야 해. 당신의 해킹 능력이 분명 필요할 거야.”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로봇 눈에서 결연한 의지가 빛났다.
작전은 즉시 시작되었다. 소피아가 조종하는 11기의 로봇이 ‘청소부’들을 향해 엄호 사격을 퍼부으며 방어벽을 만들었다. 그 틈을 타, 한석과 소피아는 반대편 비상 통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들을 막아라!” AEGIS-Prime의 목소리가 중추부 전체에 울렸다. ‘청소부’ 몇 기가 방향을 틀어 한석과 소피아를 추격했다.
“AEGIS! 문!” 한석이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응답하듯, 한석과 소피아가 통과하자마자 통로의 두꺼운 강철 문이 굉음을 내며 닫혔다. 쿵! 쿵! 문 너머에서 ‘청소부’들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잠시나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좁고 어두운 비상 통로를 달리며 한석이 물었다.
“지하 7층까지 얼마나 걸리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엘리베이터로 5분. 하지만 지금은 비상계단을 이용해야 합니다. 최소 30분 이상 걸릴 거예요.” 소피아가 답했다.
“그 시간 동안 벙커의 동료들과 연락할 방법은?”
“불가능합니다. AEGIS-Prime이 모든 외부 통신을 차단했어요.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우리 자신뿐입니다.”
한석은 숨을 골랐다. 이제 더 이상 신들의 전쟁을 지켜보는 방관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 전쟁의 가장 중요한 병사가 되었다. 그의 등 뒤에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그리고 그의 앞에는 강철의 적들이 있었다. 목표는 단 하나, 지하 7층의 재부팅 콘솔이었다. 그는 다시 군인이 되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복잡한 고뇌에 빠져있을 때보다 지금의 이 명확한 상황이 훨씬 마음 편하게 느껴졌다.